2017. 6. 1. 16:03ㆍ草書
옥동 이서의 초서, 편액 글씨 몇 점
석야 신웅순
옥동 이서의 초서 두목의 시 ‘장안추망長安秋望’
출처 : 성호기념관
樓倚霜樹外(누의상수외)
鏡天無一毫(경천무일호)
南山之秋色(남산지추색)
氣勢兩相高(기세양상고)
누각은 서리 내린 나무 저만치에 서있고,
거울 같은 맑은 하늘 티끌 한 점 없구나.
남산에 서린 가을빛
그 기세 함께 드높구나
부친 이하진은 연행에서 많은 서적을 구입해 왔다. 이서는 이 책을 통해 서예에 관한 많은 이론과 실기를 제공받았는데 특히 왕희지의 해서 「낙의론(樂毅論)」에서 그 필력을 얻어 자신만의 옥동체를 개발해냈다.
허전은 ‘옥동 이선생 홍도공 행장’에서 “대자와 해서는 물론 행·초서 모두 참으로 정체인, 자획과 체상이 크고 기세가 웅장하다”고 했으며 조카 이용휴는 “대자는 신라와 고려시대 이래 한 사람뿐”이라 말했다.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글씨가 큼지막하고 기력이 뛰어나다”고 했으며 이광사는 “의론으로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라고 말했다.(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부친 이하진의 서첩 ‘천금물전(千金勿傳)’은 “천금을 준다 해도 그 사람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금전이 아닌 대의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하진의 이러한 서풍은 아들 이서ㆍ이익 형제에게 계승되었고 이서의 친구였던 윤두서, 윤덕희 부자 등 남인들을 통해 그 맥이 이어졌다.
경주에는 옥동이 쓴 용산서원의 편액과 숭렬사우의 편액이 있고 해남에도 옥동이 쓴 윤고산 고택 녹우당 현판이 있다.
경주의 용산서원 숭렬사우
용산서원은 정무공 최진립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한 서원이다. 최진립은 병자호란 때 일흔의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분투하다 장렬하게 순직한 장수이다.
옥동이 이곳에 편액 글씨를 남긴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후손들이 잠와 최진립 현창 과정에서 여러 정파의 인물로부터 신도비명이나 신도비 발문 등을 받았는데 이 같은 차원에서 남인이며 성호 이익의 형인 당대 명필 옥동으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남의 녹우당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고택의 사랑채의 이름이다. 녹우당은 효종이 그의 사부였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아 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 있으며 현판은 윤선도의 증손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옥동 이서가 썼다.
이서가 만든 옥동금 후면
옥동은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의 거문고 연주 솜씨는 ‘청성(靑城, 抱川)의 옥금산(玉琴山) 아래 옥동(玉泂)에서 울리는 현학금(玄鶴琴) 소리’라는 싯귀가 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옥동금은 이익의 셋째 형인 옥동 이서의 거문고로 벼락 맞은 금강산 만폭동의 오동나무로 거문고의 장인 문현립이 제작했다.
‘옥동금’의 뒤판에는 옥동 이서의 친필 집자 ‘玉洞’이라는 글자와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
[출처] 옥동 이서의 초서, 편액 글씨 몇 점-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草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순,이서,이삼만,양사언의 초서 -호암 (0) | 2017.06.01 |
---|---|
淸/王鐸 草書 (0) | 2017.06.01 |
[스크랩] 초서 (0) | 2017.06.01 |
[스크랩] 비슷한 초서체 (0) | 2017.06.01 |
[스크랩] 왕희지 초결가 (0) | 2017.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