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장유의 지인인 이대재(李大載)라는 사람이 오랜 객지 생활 끝에 작고 누추한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2, 3십 대에 촉망받던 서울의 세족(世族) 출신이 어쩌다 세상과 어긋나버렸는지 살던 곳을 떠나 충남 면천(沔川)에서 객지 생활을 시작하여 거의 떠돌이 생활을 면치 못하다가 면천에 겨우 오두막 같은 집을 마련한 것이다. 좁고 지저분한 집이지만 자신에겐 안성맞춤이라 대궐 못지않다 여기며 그 집에 “내 밭 갈아서 먹고 내 샘물 길어서 마시며 내 본분 지키며 살다가 내 생애 마치리라.[食吾田 飮吾泉 守吾天 終吾年]”라고 한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사오당명(四吾堂銘)」을 본떠 ‘사오당’이라는 당호를 내걸었다.
석주가 사오를 쓴 이후로 참으로 많은 사람이 ‘사오’라는 호를 애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몇 가지를 더 붙여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는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가 있는 고령 재사(高嶺齋舍)를 육오(六吾)로 명명하고는1) 팔순의 나이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평생 동안 마음을 지킨 것이, 하나는 자긍심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자만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지위를 잊는 마음이며, 하나는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다. 만일 나의 마음을 알려면 고령 육오당을 보아라.[平生守心, 一則戒自矜, 一則戒自大, 一則布衣心, 一則水欲洗. 若知予心, 須看高嶺六吾堂.]”라고.2) 남용익(南龍翼) 역시 “내 집 지어 살고, 내 논밭 길 의지해 걷고, 내가 지은 시편 읊고, 내 거문고 타고, 나의 현묘한 도 지키고, 나의 잠 편히 잔다.[結吾椽, 依吾阡, 吟吾編, 鼓吾絃, 守吾玄, 安吾眠.]”는 여섯 가지를 더하여 십오(十吾)를 당호로 삼았다.3)
‘나’를 뜻하는 한자에 ‘아(我)’와 ‘오(吾)’가 있는데, ‘아’는 손[手]에 창[戈]을 들고 있는 형상이라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 과시하고 싶어 하는 ‘나’인 반면에 ‘오’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솔직한 ‘나’ 자신을 의미한다고 한다.4) 사실 세상은 솔직한 나보다 드러내 과시하는 나를 더 알아준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솔직한 나보다는 드러내 과시하는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낼수록 솔직한 나로부터 멀어지고 가식이 하나둘 보태지면서 어쩌면 불행하게도 진짜 나를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긍심과 자만은 바로 드러내 과시하고 싶은 ‘나’이다. 영조가 왕이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과시하는 나를 버리고 진실한 나를 찾으려 했던 것은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내 밭이니 내 샘물이니 내 시편이니 하는 것들은 꼭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내재된 본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윗글에서 계곡은 사오 가운데 나의 본분인 ‘오천(吾天)’에 초점을 두어 나의 본분을 안다면 물질적 풍요를 함부로 구하지 않고 분수에 맡길 수 있으며, 사회적 성공을 기필하지 않고 주어지는 기회에 순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현대사회는 나의 본분을 벗어나 나를 꾸미고 드러내는 데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잘난 외형과 더 많은 자격증과 더 높은 지위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진다. 성형과 화장으로 꾸며진 외형이 솔직한 ‘나’가 아니며, 수십 장의 자격증도 솔직한 ‘나’가 아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간 그 자리 역시 솔직한 ‘나’가 아니다. 그렇지만 솔직한 ‘나’보다는 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꾸며진 ‘나’를 원하는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요즘을 사는 우리는 참으로 고달프다. 그러나 가끔 선인들의 지혜를 본받아 자꾸 커져만 가는 ‘아(我)’를 버리고 사라져 가는 ‘오(吾)’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1) 『홍재전서(弘齋全書)』제17권, 「영종대왕행록(英宗大王行錄)」 2) 『영조실록』51년 10월 10일 기사 3) 『호곡집(壺谷集』제5권, 「십오당시(十吾堂詩)」 4) 심상훈, 『공자와 잡스를 잇다』제5부 「吾편」, 2011, 멘토프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