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2) 피렌체의 영광과 몰락

2015. 10. 4. 18:31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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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

(2) 피렌체의 영광과 몰락

 

…동방박사 로렌초(메디치) ‘황금시대’ 꽃피우다

 

갓태어난 아기 예수를 찾아가는 동방박사들의 행렬.

성경이 전하는 모습은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벽화 ‘동방박사의 예배’ 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이 화려한 행렬 속에서 우리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후원자이자 피렌체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메디치 가문 3대의 얼굴을 모두 만나게 된다. 당시 갓 12살이 된 로렌초 메디치는 동방박사 중 한 명으로, 화려한 황금색 옷에 흰말을 타고 행렬의 선두에 서 있다. 가문의 본격적인 부흥을 이끈 할아버지 코시모가 갈색 말을 타고, 아버지 피에르는 흰색 말을 타고 뒤를 따른다.

 

이 벽화는 1439년에 있었던 피렌체 종교회의를 기념하며 20년 뒤에 그려졌다. 동서 교회의 분열, 이슬람 세력의 위협 등 당시의 복잡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회의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진행됐다. 메디치 가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과시한 사건이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공화주의를 표방한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코시모는 사후에 피렌체의 ‘국부(國父)’라 불리며 큰 존경을 받았다.

 

 

 

그림 ➊ 베네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예배’ 中 로렌초 메디치 부분.

 

 

동방박사로 분한 자손을 내세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행원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등장하고 있는 그림(그림 ➊)은 메디치 가문의 앞날을 예언하는 것 같다. 그림처럼 메디치가의 최고의 영광을 누린 이는 후에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린 손자였다. 메디치 가문은 영욕의 세월을 겪으며 17세기 말까지 300년 동안 세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다. 특히 코시모에서 1492년 로렌초가 죽기까지 100여년간이 피렌체의 가장 역동적이고 찬란한 시대였다.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가득 찬 지금의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업’ 눈총 무마하려 문화·예술 적극 후원

귀족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고촐리의 화풍은 아들인 피에르의 선택이었다. 이는 세습귀족이 아닌 자수성가한 신흥세력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최고의 갑부였으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메디치 가문은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점과 가문의 주요 사업인 금융업에 대한 당시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금융업, 즉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기는 ‘이자놀이’는 가톨릭 교리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행위였다. 이런 약점들을 보완해준 것이 바로 문학, 철학, 미술이었고 코시모는 이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등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사상을 기독교 교리 내에서 포섭하는 지식의 융합을 주장했다. 평민 출신에 기독교 교리와 부딪히지 않으면서 이자 사업 합리화를 모색하던 메디치 가문이 ‘가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문화운동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화려하고 장대한 미술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미화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자신의 정치선전을 위해 메디치 가문보다 미술을 잘 활용한 예는 없었다.

코시모는 기베르티,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고촐리, 필리포 리피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피렌체 시민이 그토록 원하던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돔 공사를 브루넬레스키가 16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코시모의 후원 덕이었다. 이런 후원으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고,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무늬만 공화주의인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됐고, 1446년께는 유럽 8개 도시에 지점을 두고 최소 11개 지역에 제휴기관을 둔 초대형 글로벌 은행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대 피에르는 아버지 코시모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과 거대한 은행조직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가장 큰 업적은 귀족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위대한 로렌초’를 낳은 것. 최고 교육을 받고 자란 로렌초는 이탈리아 문학사에 중요한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자였다. 할아버지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교육, 결혼, 돈을 통해서 만들어진’ 신흥귀족이었다. 아버지 피에르가 죽었을 때, 갓 스무 살의 로렌초에게 피렌체의 권력이 이양됐고,

피렌체는 소위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얼핏 보면 고촐리 그림의 환상이 현실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했다. 반대파에 의해 동생인 줄리아노가 암살됐고 로렌초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자들은 후에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장면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이 남아 있다(그림 ➋).

 

 

그림 ➋ 레오나르도 다빈치, ‘바론첼리의 교수형’, 1479년.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로렌초가 생각보다 예술 후원에 인색했다’라고 실망 섞인 어조로 말한다. 로렌초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가 없었던 것도, 예술에 대한 안목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 없었던 것은 돈이다. 젊은 로렌초는 무모했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인 교황과도 사이가 틀어져 사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 세계 메디치 은행의 지점들은 방만하게 운영됐다. 교황보다 더 센 자들이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 됐다. 전쟁과 허세를 위해 어마어마한 대출금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던 사람들. 바로 유럽 절대 군주들이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고객들에 대한 부실 대출로 메디치 은행은 허덕이게 된다.

‘대항해 시대’ 적응 못 한 메디치가와 이탈리아

로렌초가 죽기 5년 전에 메디치 은행은 4개 지점만 남았다. 로렌초 탓만이 아니다. 코시모 시대 때와 달리 이탈리아 전체 경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이제 강력한 군주를 내세운 해상강국들이 등장할 차례였다. 로렌초가 지병으로 죽은 1492년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해다. 이 해에 콜럼버스는 신대륙 발견을 위한 대항해의 길에 오른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이 가져와야 더 큰돈을 벌었다. 더 많은 자본이 투자돼야 했고, 국제무역상의 규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권력을 배후에 깔아야 했다. 많아야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도시국가 상태로 남아 있던 이탈리아는 이런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메디치라는 우산이 사라진 피렌체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초강대국의 침공 앞에서 무기력했다. 1494년 로렌초의 큰아들은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겁을 먹고 도망쳤고 메디치 궁은 시민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메디치가의 몰락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다시금 공화제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피렌체 시위원들은 당시 로마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젊은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시민들의 단결심을 호소할 수 있는 거인상을 의뢰한다. 길이 4m가 넘는 대형 조각 ‘다비드’상(그림 ➌)이 피렌체 정치 1번지인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다.

 

 

그림 ➌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가장 이상화된 아름다운 남자 누드상이라 평가받는 다비드상은 기독교의 성인을 가장 그리스 신처럼 표현한 혼성미학의 결정판이다. 성경에는 골리앗을 물리치는 소년 다비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를 20대 초반의 진지한 젊은이로 묘사했다.

그는 지금 골리앗을 향해서 거대한 새총을 겨냥하고 있다. 전투에서 ‘두 번’이라는 것은 없다. 공동체의 영웅이 될 것이냐, 아니면 공동체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냐의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다비드의 표정에 진한 고독과 결단의 아름다움이 깃든 이유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들, ‘메디치들’은 다시 돌아온다. 더 강력해진 이름, 교황과 군주의 이름으로. 시뇨리아 광장에서 어린 시절 다비드를 보면서 성장한 꼬마가 중년의 나이가 될 때쯤인 30년 정도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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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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