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형도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감상 / 권순진 *Crippled Mind / Blues Company

2013. 7. 26. 10:01나의 이야기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Crippled Crippled Mind / Blues CompanyMind / Blues Company

                                                       **Crippled Mind / Blues Company

                                                                      음원=> Crippled Mind / Blues Company

감상]

 삶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자의 암울하고 황폐한 내면이 바깥으로 삐죽이 드러나 있는 시다. 한때 내 육체를 점령했던 사

람은 어디로 가버렸나. 길 위에서 좌표를 잃은 지금 나아갈 바 몰라 막막하고 먹먹하다. 사랑도 꿈도 한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어떠한 희망도 기대되지 않는 좌절, 감정붕괴와 식욕감소. 나는 또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길 위에

서 중얼거린다.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져서 어두워졌고 기억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

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어쩌면 필연적인 비극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이지만 어쩌랴, 가볍게 살아지지 않는 것도 병이다. 체하고

구토하며 무심한 희망을 그르치며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나는 너에게, 또

다른 너에게, 무수한 너희들에게 나는 사라졌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고,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다 굳

는다. 그러나 잊지 못하니 눈을 감아도 네 얼굴만 아른거린다.

 

 불안전한 고뇌가 완전보다 낫다지만 그건 무책임한 탄식들이다.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다. 어둠만이 남

았다. 달이 떠있어도 내 눈엔 구름에 가려져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 그가 사라진 결핍의 자리. 새로운 위로를 찾아

질없이 미끄러지고 미로를 헤매며 중얼거려보지만 잃은 자의 지리멸렬함은 숨길 수 없다. 지나온 길은 지워지고 가야할

길은 여전히 미명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부질없는 희망 또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렇다면 희망도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적극적으로 슬퍼하는 일만이 ‘무책임한 탄식’에서 비로소 벗어나

는 길이다. 슬픔을 맘껏 받아들이되 짧고 굵게 끝내자. 슬퍼하라, 나도 슬프다.

 

-권순진(시인)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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