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아타령은 선소리 산타령을 다 부르고 그 뒤에 이어서 부르는 선소리로서 서울과 서도 자방에서 많이 부르는 민요이기도 하다. 이 방아타령에 대해서는 여려가지의 설화가 많다.
이 소리가 옛 신라의 노래중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없어지지 않고 구전 심수 되어 온것은 옛 조상들의 얼과 혼을 이어 받아 대대로 전승 되어 온 우리 민족의 긍지요 자랑이다.
때는 신라의 20대 자비왕 때에 경주의 낭산 기슭에 살고 있던 백결선생이 어느 세모를 당하여 이웃에서 집집마다 떡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그의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괴세를 하노)하고 탄식을하니,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夫人者는 死生은 有命이요 富貴는 在天이라. 대저 사람은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고 부하고 귀함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운이 오면 받을 것이오 운이 가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구태여 상심 해 무엇하리오)하고 거문고를 당겨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그 부인을 위로하였더니 그것이 세상에 전한 바가 되어 그 뒤에 대악이라 불럿다.
거문고의 방아 곡조는 그 때 처음 생긴것이 분명 하며 방아를 찣으며 부르던 여인들의 노작가요도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랜 것에 틀림없다.
또 한가지의 설화로 1865년 경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팔도에서 모인 부역 인부들의 고된 노역을 위로하는 것으로 무슨 위안을 주는 일이요. 한편 공사를 하는 일꾼들이 고향과 처자를 잊기 위하여는 마음껏 소리를 뽑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각도 민요의 교류와 함께 새로운 민요가 이때 많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방아타령은 여자들의 목가적 영항에서 남자들의 집단적인 노작가요로 변모하여 온 것이다.
선소리인 이 방아타령은 양산도와 더 불어 경 서도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가창방식은 도입부를 제외하고 독창부분의 원마루와 제창부분의 후렴으로 나뉘어서 장절형식의 짜임새 있는 소리로서 두 옥타브에 가까운 넓은 음역을 가지고있어 솔, 라, 도, 레, 미의 선법으로 되어 있다. 장단은 세마치 3박자와 중모리 12박자(8분의9박자로서 본절이 12박8장단이며 후렴이 12박 5장단으로 짜여져 있다.
계집년의 거동보소. 문열란 소리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일어나서 한숨쉬며 하는말이, 이를 장차 어찌 하나 김도령 처지가 망연하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뒤주 생각을 얼른 하고, 김도령을 뒤주에 넣고 금거북 자물쇠로 어슥비슥이 채워놓고, 허둥지둥 걸어나가 대문 열고 하는 말이 웬일이오 웬일이오? 외방장사를 나간다더니, 아닌 밤중에 웬일이오?
이도령이 하는 말이, 외방장사를 나갔더니 장사가 안되기로 영한 장님을 찾아가서 재수점을 보았더니, 당신네 뒤주에서 인성황이 났다기로 그 뒤주를 가져다가 화장 불사를 하러왔네. 계집년이 그말을 듣고 눈물지며 하는 말이, 마오 마오 그리 마오! 삼대 사대 내려오는 세전지물은 그 뿐인데 화장불사가 웬일이오?
이도령이 달려들어 계집년을 밀친 후에 참바 짚바 가져다가 뒤주 발에 걸어지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뒤주문을 열고보니 김도령이 들었구나. 이도령이 그모양보고 목불인견 불쌍하여 김도령보고 하는 말이 너도 남의 집 귀동자요 나도 남의집 귀동자인데 너를 죽일 배 내 아니다. 생명이 가긍하여 용서하여 주는 것이니 내 앞에 뵈지 말고 너 갈데로 빨리가라.
김도령을 보낸 후에 빈뒤주를 불사르고, 으슥한 숲을 찾아가서 몸을 숨기고 엿을 본다. 계집년의 거동보소. 김도령이 죽은줄 알고. 삼우제를 지낸다고 갖은 제물을 차려 이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뒤주 사른 그 앞에다 죄면지를 펼쳐놓고 갖은 제물을 차릴 적에 우명좌면 어동육서 홍동백소로 벌였으니 삼색과실 오색채소 주과포혜가 분명하다.
첫찬부어 산제하고 두잔 부어 첨작이요 석잔을 가득 분 후에 재배 통곡하는 말이 살아생전 만났을 적엔 범벅도 좋아하더니 화장불사가 웬말이오? 이리 한참 설리울제 이도령이 엿을보다 와락 뛰어 달려와서 천동같이 호령하며 죽일 듯이 달려들어 계집년보고 하는 말이 충신불사이 군이요, 열녀불경 이부라니, 네죄상을 모르느냐?
계집년이 하는 말이 죽을 죄를 지었아오나 대장부 도량으로번 용서를 하시구려. 당신이 살면 천년사오, 내가 살면 만년사오. 우리둘이 살아 생전에 의만 좋으면 그만이지. 이도령이 그 말을 듣고 기막히고 어이없어, 두 주먹을 불끈쥐고 땅을치며 하는 말이, 네 죄상을 생각하면 죽여 마땅하지마는, 나도 또한 대장부라 더러워서 안죽인다. 나는 가니 잘살아라.
계집년이 그말을 듣고 지난 일을 후회하며 이도령을 쫓아갈 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신만고를 하여 가며 이도령을 쫓아가다, 기진맥진 쉬진하여 펄썩 주저앉으면서 눈물지으며 하는 말이, 내행실 부정하여 두절개가 되었구나. 개과천선 마음을 고쳐 일부종사 알게 되니 차라리 이몸이 죽어 후인징계나 하오리라.
이 신고산타령은 일명 어랑타령 이라고도 하며 1900년대 초 개화기에 나온 민요이다. 곡명을 이 노래의 첫머리 가사에 "신고산이 우루루"라고 하는 말을 따서 신고산타령이라고 이름 하였으며, 또는 후렴의 "어랑어랑"하는 것을 따서 일명 어랑타령이라고도 붙인 것이다.
이 노래는 관북지방, 즉 함경도의 대표적인 민요로서 강원도 철원 이북부터 함경남북도 어느 곳을 가나 이 어랑타령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성창된 민요이다. 이 노래의 특징은 구성지고, 소박하며, 그 지방의 맛과 향토적인 미를 풍기는 민요로서, 원망스러운 푸념조, 자탄조와 함께 애조를 띠고 있으면서 후렴에 가서는 경쾌함과 또한 해학적인 사설 내용이 많이 담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빨래터에서 바가지를 물 위에 엎퍼서 띄워놓고 이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춰가며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 노래의 연주형태는 장절형식이라서 독창자가 원마루를 부르면 여럿이 후렴을 제창으로 부르는 것을 반복한다.
장단은 잦은 타령(8분의 6박자)으로 본절과 후렴이 각각 4장단으로 되었으나 창자에 따라서 본절의 첫머리를 1장단 느려서 5장단에 부르기도 한다. 이 신고산타령은 원래 사설 내용이 너무 해학적이고 잡다해서 교육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듯하여 많이 삭제 하고 건전한 가사만을 골라 기록했다. 첫 소절을 위시해서 몇 소절 외에는 모두 이창배님과 황용주님이 작사와 개사를 하였다.
하루는 궁중에 입궐하여 국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귀가하여 집에 있으니 심심도 하고 그래서 부인과 같이 뒤 후원을 거닐 때였겠다.
때는 마침 어느 때냐 하면 동삼 석달을 다 지내고 춘삼월 호시절이라 먼 산에 아지랑이 끼고 두꺼비 외손자 보고 강남 갔던 제비 옛 집을 찾아 들고 초목군생지물이 개유이 자락이라
장 「만물들이 씨가 있고 싹이 있고 가지가 있건만 우리 두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로 싹이(일점 혈육) 없으니 후세에 조상을 어찌 뵙겠소」 하니.
부인이 추파를 흘리며 하는 말이
부인 「너그러우신 재감께서는 이 못난 첩만 믿지 마시고 오늘이라도 취처를 하시와 소생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까.
대감이 부인을 위로하는 말이
대감「아예 그런 말을 마오 내가 무자하므로 부인까지 괴로움을 끼쳐 미안하오이다」하니
부인이 하는 말이
부인 「대감 청을 드릴 말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로부터 이르기를 무자한 사람들이 명산 대찰을 찾아가 발원을 하면 혹시 아이를 얻을 수 있다 하니까...」
대감이 듣고
대감「그것도 좋을 듯하다」하고
둘이서 명산 대찰을 찾아가 불공을 하되 석달 열흘을 하였겠다.
그때부터 태기가 있어 부인이 아이를 낳는데 열흘만에 일개 옥동자를 낳았겠다.
「에이 여보슈 그런 말 마소, 세상에 열흘만에 낳는 아이가 어디 있소」
「아 참, 대감에겐 급하니까 그 랬지, 열흘만에 낳았단 말이야」
그런데 이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유달리 빠르겠다.
한 두 살에는 모르지만 서너 살 먹으면서 말이 청산 유수였다.
대감이 기특히 여겨 심심한대로 글자를 가르치니 문일지십이라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통하니 남들이 말하기를 신동이라고 칭했겠다.
대감이 생각하기를 내가 늦게서야 낳은 자식이 이리 영특하다가 잘못되면 그릇될까 염려하여 자식의 속을 틔어 줄까하고 장안에서도 일등 가는 별감을 불러
「우리 아들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속을 틔어 주겠나」하고
장지문에다 엽전을 그들먹하게 채워 주었겠다.
그래서 그날부터 돈을 쓰되 어디다가 쓰느냐 하면 지금같으면 주사청루가 있겠지만 그때는 삼패나 기생집이라 장안 기생집을 빼지 않고 돌아다니며 외입을 하겠다.
그때 장대장 나이 열 살 남짓 했겠다.
부모들이 좋은 혼처를 구하여 혼례를 이루었나니라.
그후로 이삼 년이 지난 후에 부친 상을 당해 애통을 하다가 모친마저 별세하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는 양반이 멍하면 흔히 남산골로 살림을 옮기었겠다.
그래서 장대장네 집을 짓되 밑에서 올라가자면 맨 끝집이요, 위에서 내려오자면 맨 첫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휴달리 지었겠다. 다른 집은 한 간에 기둥이 네 개씩인데 이 집은 여덟 개씩이겠다.
「이층을 짓는 것이겠지」
「그런 게 아닐세. 풍우가 심하면 쓰러질까 염려하여 예비 기둥이지」
그집을 짓고 장대장은 상투를 풀어 봇장에다 매고 공자왈 맹자왈 하고 되풀이 공부를 하겠다.
그런데 살림이 세궁력진하여 먹기보다 못 먹을 때가 더 많겠다.
수입이라는 것은 부인이 남의 집 바느질 품으로 지내는 것이었다.
하루는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생쥐란 놈이 밥풀 낟이라도 얻어 먹을까 해서 다니다 못하여 얻었다는 것이 가랫톳 밖에 못 얻었겠다. 할 수 없어 생쥐란 놈이 나 잡아 잡수 하고 쓰러졌겠다.
이것을 본 장대장 부인이 슬며시 심사가 나서 장대장을 보고 조롱을 했겠다.
「영감, 양반이다 하고 문벌만 생각지 말고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고 남과 같이 등짐이라도 져서 구명도생이나 합시다」하였겠다.
양반으로서 부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체면이 아니라 생각하고, 풀었던 상투를 짯고 집을 나서 그 길로 그전 살던 다방골 어느 재상집 사랑을 찾아가 같이 놀던 친구 들 더러 하는 말이
「여보게들, 내가 살기가 군색하여 의지할 길이 없네. 그래서 등짐이라도 질까 하는데 내가 그렇게 되면 내 망신보다 여러분이 더 망신 이오니 당신네들 하고 남은 초시라도 한자리 하여 봅시다그려」
여러 선비들이 그럴듯하여 한 자리를 주는데 만포첨사를 보내겠다.
이때에 장대장이 좋아라고 떠날 준비를 하겠다.
마부놈 불러서 하는 말이
「이놈, 마부야 네 말 좋다 자랑 말고 내 말 좋다 자랑 말고 바삐바삐 말 등에 부담지어 양단에 채를 놓아 등대 하여라」
「예 등대 하였소 」
장대장 마상에 올라 앉아 채질하여 서대문 밖 얼른 지나 모화관 앞을 슬쩍 지나 홍제원을 당도하니 앞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를 보니 갈매치마에 진분홍 저고리를 입고 가는 엉덩이가 죽산마 엉덩이 같겠다.
그 여자가 들어가는 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떡집이었다.
「옳다 됐다」하고
한번 수작이나 하려고 말을 멈추고 마부더러 하는 말이
「내 목이 말라서 물을 한 그릇 먹고 올 터이니 말을 멈추어라」
마부놈이 생각하되
목이 마르면 나를 시키든지 하지 않고 여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수상하겠다
장대장이 떡집으로 들어가서
「여보, 떡 한 그릇만 주시오」하니까
물동이를 얼른 내려놓고 떡 목판을 들고 돌아선 여자 얼굴이 어찌나얽었던지 얽은 구멍에 물을 한 종지를 부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떡 먹을 맛이 없어 임시변통을 하겠다.
「여보 홍제원 인절미가 눅기가 사발로 퍼 먹도록 눅다더니 이렇게 단단하여 못 먹겠으니 내가 다녀올 때까지 푹 물렸다가 주게나」하고
그 길로 나서 마상에 올라 종일 가니 서산 일모시라 장단일경을 당도하였겠다.
장단은 한양에서 하룻길 주막거리였다.
그 곳에서 하루를 쉬는데 때는 가을이라 추강월색 달 밝은데 벌레 소리는 자자한데 어디선지 풍악 소리가 들려 오거늘 장대장은 곧 주인더러 물으니 주인 대답이
「서울서는 시월상달이라 하여 대감놀이 성주받이를 하지만 시골에서는 온 일년 내내 『소가 애를 썼다』하여 소굿이라 하나이다 」
장대장이 생각하기를 (내가 서울에서도 굿 구경을 빼지 않고 하였거늘 어디 시골 무당 구경이나 좀 하자)하고 굿집을 찾아가 보니 시골 무당일망정 양화도 곡식이거든 음 수수하단 말이지 그래.
「여보 만신, 노랫가락 한 마디 청합시다」 하였겠다.
한참 정신없이 굿을 하다가 별안간에 노랫가락 청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생각하기를 (시골 구석에는 노랫가락을 잘 모르는데 내가 서울 큰굿에 불려 가면 서울에서나 들었는데 웬일이야)하고 마당을 바라보니 인모망건 앞이 탁 터질 듯하게 쓴 양반네가 서서 청하는 것이었다.
무당이 장대장을 보더니 일만 시름이 저절로 나 신세자탄을 하겠다.
무당「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저런 영감을 품에다 품고 거드럭 거리고 지내는데 나도 남부럽지 않게 생긴 여자로서 시골 구석에서 무지랭이하고 한 평생을 지내란 말이냐」하고
이 기회를 잃지 않고 수작아니 하여 보리라 하고 노랫가락을 하겠다.
唱
무당 「들으니 농부라더니 창녀의 집이 무삼 일꼬.
오시긴 오셨지마는 주무시고는 못 가리다.
아희야, 신돌려 놓아라 열사흘 내세」
장대장이 듣고 기가 막혀 짝을 하나 채워서 불렀겠다.
「뉘라서 농부라더냐 만경창파의 사공일다.
광풍에 배를 잃고 오는 바이 네 집이라.
들으매 네 배가 논다기에 네 배 타러 예 왔노라」
무당이 생각하되 오랫가락으로 하다가는 시간이 길 듯하여 제석거리 막 불겹이로 하겠다.
唱
「아 제석(帝釋)」
「제불제천(諸佛帝天)」
「천제석(天帝釋)이요」
무 : 「어디 사오?」
장 : 「한양 삽네」
무 : 「뉘 댁이시오」
장 : 「장서반 일세」
무 : 「첩이나 있소」
장 : 「홀아비일세」
무 : 「나고나 살까?」
장 : 「작히나 좋지」
무 : 「어디를 가오?」
장 : 「만포첨사(滿浦僉使)」
무 : 「주인이 어디오?」
장 : 「건너말일세」
무 : 「어디쯤 되오?」
장 : 「주막집일세」
무 : 「이따나 갈까?」
장 : 「고대나 하지」
이런 수작을 하였겠다.
남들은 속을 모르고 오늘은 신나게 굿을 잘 한다고 칭찬이 자자했겟다.
속담에 (염불에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격으로 열 두 거리 굿을 건정 건정 해 버리고 주막집을 찾아가 하루 저녁을 장대장하고 지내 보니 떨어질 수가 없어 같이 만포첨사를 쫓아가서 사는데 이 사이에 둘이 좋고 나머지가 생겼겠다.
「아들인가 딸인가」
「에이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이왕이면 아들을 낳지」
그런데 장대장이 내직 명령이 내려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었겠다.
장대장이 부인 보고 신신당부를 하는 말이
「만약에 한양가서 무당의 행색이 나타나면 우리 가문에 망신이니 그리 알아라 만일 행색이 드러나면 너하고는 초록이 되느니라」
윗 당에선 이처럼 경을 읽고 아랫 당에서는 장대장네 굿판이 벌어져서 굿을 한참 하는 판인데 그때만 해도 굿 구경이라 하면 다 좋아하던 시대라서 우발량 좌발량 보여들어서 구경을 하는데 한 사람이 썩 나서서 하는 말이
「여보 만신 노랫가락 한 마디 합시다」하면서 조롱을 하겟다.
무당이 참다 못하여 말막음으로 늙은 무당이 나와 한 마디 하겠다.
唱
「산간데 그늘이 가고 용이 가는데 수위로다.
수위가 깊건마는 모래 위에 수위로다.
마노라 영감 수위가 깊이몰라」
하고 노랫가락을 한마디 하니까
또 한 사람이
「이왕이면 젊은 만신이 나와 함 마디 하시요」하고 졸라 대니까
노들 사는 꾀새라는 만신이 나와 임시 수단을 쓰겠다.
「여러분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굿은 좋은 굿이 아니고 못된전염병 퇴해 가라는 것이니까 여러분 중에 재수가 없으면 옮아 갈까 염려올시다」하니까
슬금슬금 다들 가버리고 굿을 오붓하게 할 판이었다.
이때에 장대장 부인이 한쪽 구석에 앉았다가 별안간 신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면서 춤을 추다가 푸념을 하면서 나서겠다.
푸념을 하되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어허구자 장씨 대주야, 너의 불이 어떠한 불이시리 대추나무 옹두라지 같고 엄나무 곁가지 같은 불이 아니시리 마노라 수이에서 요것만 도와 주고 요것만 섬겨 주었느냐 괘씸하구나. 엎어 놓고 목을 베고 제쳐 놓고 배를가르랴. 아주 제길 할 것, 괘씸 하구나 장씨 대주야 어찌 하라. 정월에는 정을 앓고 이월에는 이질을 앓아 사대문 이영 바리가 밑 씻개로 모자라게 하여 주랴.
삼월에는 삼눈을 앓아 은뽕을 박아 줄 것을 십분 용서하여 땅속에서 다 걷게 하여 주마」
「터줏대감님 미련한 백성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잘못을 물리치시고 다 거두어 주옵소서」
「아주 제길할 것, 그래도 마노라 수이에서 다 거두어 주마. 그래서야 쓰겠느냐 정월에는 정든 님 만나 보고 이월에는 이한 일 보게 하고, 삼월에는 삼바리 많이 들어오게 해 주고, 사월에는 참외덩쿨 오이덩쿨 가지가지 번성하고 눈눈이 꽃이 피고 열매 많이 열게 하여 주거든 이 마노라 수이에서 한 줄 알아라 어구자 간다 쳐라」
이렇게 한참 뛰고 놀 적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하는 말이
「아마 무당인가 보다 춤도 잘 추고 푸념도 잘 한다」하고 쑤군거리겠다.
이 때 허 봉사가
「옳다, 저년이 지난번에 나를 망신 주고 간 년이 틀림 없구나」하고
경을 읽던 것은 집어치우고 무턱대고 일어나서 그 무당 소리를 본떠 이른다고 어르겠다.
「이를 테야, 이를 테야, 장대장 보며는 이르겟다」하니까
장대장 부인이 이 소리를 듣고 가슴이 털컥 내려 앉아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드니 저 장님을 또 만났구나」하고
그러나 한번 달래 보자 하고 달래겠다.
「이르지 마오, 이르지 마오, 이 굿을 하고 남은 것은 모두 다 드릴께 이르지 마오」했겠다.
장님이 듣고
「허 이년이 나를 재 묻은 떡에 미친 줄 아느냐」하고
한번 더 하겠다.
「나는 일러, 나는 일러, 장대장 보며는 이르겠다」하니
「이것이 적어서 그러는구나」하고
「이르지 마오, 이르지 마오, 이 굿이라도 다하고 남은 것과 은자보물 금자보물에 개똥밭 사흘 갈이에다 돈 천 냥을 더 얹어 줄께 장대장 보거든 이르지 마오」하니
「이년이 나를 불한당으로 아나」하고
한번 더 뛰겠다.
「나는 싫어, 나는 싫어, 아무것도 나는 싫어. 어느 제미를 붙고 발개 갈 놈이 재물에 탐을 내면 동설령 고개나 부어터 고개에 서서 식칼 자루를 꺼꾸로 하고 오고 가는 행인의 보따리를 털고 돈을 빼앗지 장대장 보며는 이르겠다」하니
이 소리를 듣고 할 수 없다 하고 또 달래 보겠다.
「사장네 아주머니, 사장네 아저씨, 이르지 마오. 이르지 마오. 이때는 어느 때요 구시월 단풍에 울밑에 국화 피고 방방곡곡에 단풍 들면 우리댁 주릿때 외방 가면 우리집이 비었으니 족자 병풍 둘러치고 원앙 금침 둘이서 베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새끼 장님을 낳더라도 원대로 해 줄께 이르지 마오 장대장 보거든 이르지마오」
허 봉사 놈이 이말 듣고 어찌도 좋은지 흥타령이 절로 난다.
「옳다 옳다, 장구만 잘 쳐라, 하구역 저문 날에 화수재로 울고 가던 송 낭자를 얻은 듯 당명황의 양귀비며, 여포의 초선이는 이에서 더할소냐. 장구만 잘 쳐라 지화자자 좋을씨구 장대장 보거든 시치미 뗌세. 지화자자 좋을씨구. 진작이나 이러할 일이지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지화자 지화자 좋을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