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 황희~~ㅉ

2013. 1. 30. 10:01나의 이야기

오랫동안 청백리 이미지를 유지하며 별 탈 없이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의외로 '알짜배기' 탐관오리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로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이다. 그는 실상은 '알짜배기' 탐관오리였다.

이리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황희의 초상화.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관련사진보기

일반인 차림으로 황희 정승의 집을 방문한 세종대왕이 그의 청빈한 삶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일국의 정승이 집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밥상에 누런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밖에 없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말고,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황희의 모습은 정반대다.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세종실록>에는 모친상 중의 예법 위반으로 비판을 받은 황희가 세종의 만류를 무릅쓰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A), 황희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나온다(B).

여기서 A부분은 세종 당시의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고, B부분은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내용이다.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들 사이에서는 황희의 행적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일부 사관들은 황희의 비행을 폭로하고, 나머지 사관들은 "처음 들어본 이야기"라며 "설마 그랬겠냐?"며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황희의 부정부패를 기록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서 추가된 것이 B부분이다.

B부분에 따르면, 황희의 별명은 '청백리 재상'이 아니라 '황금 대사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황금 검찰총장'이었다. 그렇게 불린 것은 황금처럼 빛나게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익정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둘 다 승려인 설우로부터 금을 받았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황금 대사헌'이라 불렀다."

대사헌이 된 뒤 승려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물론 이 별명은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회자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황희를 청렴한 인물로 인식했다.

황희의 비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고 <세종실록>은 말한다. '형옥을 팔았다'는 것은 형사사건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재산을 취득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 "재산 형성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자신이 벌어들인 월급에 비해 너무 많은 재산을 보유한 경우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황희도 그런 의혹을 받았다. 노비가 재산으로 취급되던 그 시절에, 황희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노비를 거느릴 수 있을까?"라는 의혹을 받았다. 위 날짜의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가 아버지 및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는 얼마 되지 않는 데 비해, 관료가 된 이후에 보유한 노비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428년 당시, 황희는 44년째 근무한 베테랑 관료였다. 이런 장기 근무자가 많은 노비를 보유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희의 경우에는 44년간 받은 봉급을 감안한다 해도 너무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의혹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천 명이나 2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하면 '노비를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황희가 보유한 노비 숫자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 몇 십 명 정도를 보유했다면 "근무 연수에 비해 노비가 너무 많다"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천 명에 가까운 노비를 보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특경비(특정업무경비)를 갖고 재테크를 잘한 덕분에 그렇게 많은 노비를 모았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황희의 비리

조선시대 노비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황희의 비위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 편의 기사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비리 중에서 '센 것' 하나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위 날짜의 <세종실록>에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맞섰던 박포란 사람의 아내가 등장한다. 박포의 아내는 노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수노(우두머리 노비)가 이 사실을 포착하자, 박포의 아내는 수노를 죽인 뒤 시신을 연못에 버렸다. 여러 날 뒤 시신이 발견됐고 범인도 밝혀졌다.

박포의 아내는 어디론가 숨어야 했다. 사법당국이 추적하는 상황에서 그는 황희의 집 정원에 있는 토굴에 숨기로 결심했다. 범인이 설마 황희의 집에 숨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이곳에서 수년간 숨어 살다가 당국의 수사가 종결된 다음에야 다른 곳으로 떠났다.

박포의 아내를 두고 "배포가 대단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배포가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여성을 숨겨준 황희가 훨씬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황희가 그저 동정의 눈빛으로 숨겨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탐욕의 눈빛으로 그 여성을 숨겨주었다. 숨겨주는 조건으로 토굴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 같은 데서 황희의 청백리 행적을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이 쉽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은 역사학적 고증 없이 민간의 이야기에 토대를 둔 것이므로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산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세종실록>은 그가 이미지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의논하거나 자문에 응할 때에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세종대왕)에게 중후하게 보였던 것이다."

황희의 부정부패가 살아생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생전에도 비위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많았지만, 그는 세종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이나 비판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고 당부했기 때문에, 세종대왕도 그를 가벼이 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희는 정세판단 능력이 기민하고 업무수행능력이 탁월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군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 이렇게 쓸모가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태종이나 세종은 그의 결함을 가급적 덮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위공직자 검증이 더 철저해야 하는 이유

황희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세종실록>. 오른쪽 첫번째 줄은 황희를 '황금 대사헌'으로 지칭하는 부분이고, 두번째 및 세번째 줄은 황희가 간통범 및 살인범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조건으로 수년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부분이고, 네번째 줄은 황희가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

관련사진보기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용기 있는 사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황희의 비리가 실록에 기록될 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구한말까지도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실록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된 황희의 부정부패는 세상에 쉽게 알려질 수 없었다. 그래서 최악의 탐관오리인 그가 최상의 청백리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간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한 노년의 공직자가 단 며칠간의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불명예 퇴진하는 예가 종종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뻔히 알면서도 청문회에 나가는 것은 막판에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파멸을 자초하는 셈이다.

황희도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는 고도의 이미지 관리를 통해 자신의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인사청문회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탐관오리를 청백리로 떠받든 조선시대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황희처럼 겉보기에 좋아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인물일수록, 더 강도 높은 검증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종 40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6월 25일(병오) 1번째기사
황희가 박용 등의 문제로 사직을 아뢰으나 윤허하지 않자 굳이 사퇴하다


좌의정 황희가 사직(辭職)하여 아뢰기를,
“신은 성품이 본래 용우(庸愚)하고 견문이 고루(孤陋)하며, 재주가 쓸 만한 구석이 없고 행실이 빼어난 것도 없는데, 태종 전하를 만나 잘못 기용(起用)되었으나,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조그만 보필(補弼)도 없이 겨우 몽롱하다는 비난만을 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명(聖明)하신 전하를 섬기기에 이르러서는 재보(宰輔)의 지위를 승핍(承乏)1271) 하게 되었으나, 본래부터 배운 것도 없는 데다가 노쇠(老衰)까지 하여 아무런 건명(建明)1272) 함이 없으므로, 항상 복속(覆餗)의 근심을 품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죄역(罪逆)이 심중하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을 당한 지〉 1백 일도 못되어 동궁께서 명나라의 조정에 들어가 조근(朝覲)하게 되자 거상(居喪) 중인데도 신을 기용하여 모시고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신이 상주로서의 예제(禮制)를 마치게 해 달라고 두세 번 간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며, 조현(朝見)할 기일이 박두하고 굳이 사양하여도 용납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고 바야흐로 행장을 차리는데, 조정에서 조칙(詔勅)으로 조현을 정지시켜 왔으므로, 상가(喪家)로 돌아가 대소상(大小祥)과 담제(禫祭)를 마치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론(公論)에, 영화(榮華)를 탐내어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예제(禮制)를 훼손하고 풍속에 누(累)를 끼치고도 부끄러워함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하여 죄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뜬소문으로 탄핵(彈劾)을 받게 되었으나, 다행히 〈전하의〉 일월 같은 밝으심을 힘입어 무함(誣陷)과 허망(虛妄)을 변명해서 밝힐 수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풀게 되고, 그대로 계속 출사하라고 명하시니, 은혜가 지극히 우악(優渥)하십니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책임(責任)이 중대한데 품은 계책이 없다면, 곧 비방을 초래하게 되고 화를 자취(自取)하게 되는 것은 사세(事勢)의 당연한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의 평소의 행동이 이미 남에게 신임을 받기에 부족하면서도 지위가 신하로서 지극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으로 인하여 누(累)가 사헌부에 미쳤으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합니다. 신이 비록 탐욕(貪慾)스럽고 암매(暗昧)한들 어찌 장오(贓汚)의 죄명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마음 속으로 겸연쩍어서 조정의 반열에 서기가 낯이 뜨거운데, 〈일국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자리에 즐겨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할 수 없는 노쇠함을 살피시고, 신의 감당하기 어려운 중임(重任)을 가엾게 여기시사 신을 한산인(閑散人)으로 돌아가게 하여 길이 성택(聖澤)에 젖게 해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생각하기로는, 보상(輔相)은 중(重)하나니, 국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까닭이다. 인재를 얻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도다. 모책(謀策)은 일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도다. 아버님이 신임하신 바이며, 과인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로서, 정승되기를 명하였더니 진실로 온 나라의 첨시(瞻視)하는 바에 부응(副應)하였도다. 전번에 세자가 조현하러 갈 때에 때마침 경은 상중에 있는 때이었으나, 국사에 관계하는 중신에게는 기복출사(起復出仕)하게 하는 성헌(成憲)이 있는 까닭에, 억지로 애절(哀切)해 하는 정을 빼앗고, 조호(調護)의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권도(權道)에 좇아 최복을 벗는 것은 이미 옛사람이 행한 것이다. 상기를 단축하고 길복을 입은 것에 대하여 어찌 세상의 논란이 감히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로부터 〈경이〉 사직하겠다는 청이 비록 간절하였으나, 책임과 촉망이 더욱 깊었도다. 묘당(廟堂)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이면 경은 곧 시귀(蓍龜)이었고, 정사와 형벌을 의논할 때이면 경은 곧 권형(權衡)이었으니, 모든 그때그때의 시책은 다 경의 보필(輔弼)에 의지하였도다. 이제 어찌 뜬소문 때문에 갑자기 대신의 임무를 사퇴하려 하는가. 내가 이미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도, 경은 어찌 그다지도 개의(介意)하고 심려(心慮)하는가. 과인이 〈경에게〉 책임을 맡기고 성취를 요구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도다. 더군다나 경은 아직 늙어서 혼모한 나이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성만(盛滿)의 직위를 근심하는가. 쓰고 단 약[辛甘]을 조제(調劑)하는 방도(方途)로, 옳은 것을 헌의(獻議)하고 불가(不可)한 것을 중지하게 하는 충성을 마땅히 더하여 미치지 못한 것을 번갈아 가며 닦아서 길이 끝없는 〈국운을〉 보전하려는 것이 나의 바라는 바이다. 혹시나마 굳이 사양하는 일이 없이 급히 직위(職位)에 나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황희가 즉시 대궐에 나아가 굳게 사양하여 아뢰기를,
“신은 본래 어둡고 어리석으며 또 이제는 귀가 먹어서 관직에 있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뜬소문 때문에 사퇴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쇠로(衰老)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으나, 가 곧 사퇴하였다.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이었다. 김익정(金益精)과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奴婢)를 물려 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고문(顧問)에 대답하는 등과 같을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에게 무겁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 박용의 아내가 말[馬]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은 본래 허언(虛言)이 아니다.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의금부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추국한 것이고, 대원(臺員)들이 거짓 복죄(服罪)한 것이다. 임금이 옳고 그른 것을 밝게 알고 있었으므로 또한 대원들을 죄주지 않고, 혹은 좌천시키고 혹은 고쳐 임명하기도 하였다. 만약에 정말로 박천기(朴天己)가 공술하지도 아니한 말을 강제로 〈헌부에서〉 초사를 받았다면 대원의 죄가 이와 같은 것에만 그쳤을 뿐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3책 40권 25장 B면
【영인본】 3책 135면
【분류】 *인물(人物)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註 1272]건명(建明) : 정치를 밝게 일으켜 세움.☞    
世宗 40卷, 10年(1428 戊申 / 명 선덕(善德) 3年) 6月 25日(丙午) 1번째기사
황희가 박용 등의 문제로 사직을 아뢰으나 윤허하지 않자 굳이 사퇴하다


○丙午/左議政黃喜辭職曰:
臣性本庸愚, 見聞孤陋, 才非適用, 行無足採, 遭遇太宗殿下, 謬膺器使, 而未有絲毫之補, 僅免曚曨之誚。 逮事聖明, 承乏宰輔, 固無學術, 加以老衰, 無所建明, 常懷覆餗之憂, 罔知所措。 罪逆深重, 慈母見背, 未滿百日, 伏値東宮入覲帝廷, 起臣衰絰, 命以陪侍, 而臣請終喪制, 至于再三, 未蒙兪允, 朝見日逼, 不容固辭, 釋衰卽吉, 方欲治行, 勑停朝見, 請反喪次, 冀終祥禫, 亦未蒙允, 冒榮短喪, 虧毁禮制, 以累風俗, 似若無恥, 得罪公論。 今被浮言之劾, 幸賴日月之明, 辨白誣妄, 少釋群疑, 命仍出仕, 恩至渥也。 臣竊見任大責重, 而無所蘊, 則招謗取禍, 勢自當然。 自念臣之素行, 旣不足以見信於人, 而位極人臣之致耳, 且緣臣之故, 累及憲府, 不堪驚駭, 深自爲愧。 臣雖貪昧, 豈以得免贓汚之名, 自慊於心, 而靦面周行, 叨居具瞻之地哉? 伏望殿下, 察臣老耗無狀, 憐臣盛滿難居, 投閑置散, 俾臣永濡聖澤, 不勝幸甚。
不允批答曰:
予惟輔相之重, 國家所依; 人材之難, 古今所同。 惟卿經世之才, 適用之學。 謀猷足以綜萬務, 德望足以師百寮。 皇考之所信任, 寡躬之所倚毗。 爰命作相, 允副具瞻。 曩者世子朝見之時, 適卿居憂之日。 以關係之重臣, 有起復之成憲。 故勉奪哀懇之情, 以寄調護之任。 夫從權脫衰, 旣古人之所行, 短喪卽吉, 何時論之敢興! 自是辭請雖切, 責望益深, 廟堂有疑, 卿乃蓍龜, 政刑有議, 卿乃權衡。 凡厥施爲, 皆仰贊襄, 乃何以浮言之故, 遽辭大臣之任乎? 予已得其事情, 卿何介於心慮? 殊非寡人委任責成之意也。 況卿未至老耄之年, 何憂盛滿之位? 當益以調劑辛甘之道、獻可替否之忠, 交修不逮, 永保無疆, 予所望也。 毋或固辭, 亟踐乃位。
卽詣闕固辭曰: “臣本昏愚, 且今重聽, 不宜居職, 非獨爲浮言而辭也。” 上曰: “卿未至衰老, 何乃發此言也?” 乃退。 , 判江陵府君瑞之孼子也。 與金益精, 相繼爲大司憲, 皆受僧雪牛之金, 時人謂黃金大司憲。 又亂臣朴苞妻居竹山縣, 與其奴通, 幹僕知之, 妻殺幹僕, 沈于淵, 累日屍出, 莫知爲誰。 縣官檢屍推之, 妻恐得情亡入京, 匿第北園土宇中, 居數年, 乃通焉, 妻聞事寢乃還。 傳得妻父楊震奴婢只三口, 傳得於父者亦不多, 而使喚家內及散居農舍者多矣。 執政多年, 賣官鬻獄, 若其與人議事, 或對顧問之時, 則言辭溫雅, 議論皆中於理, 略無差誤, 故見重於上, 然其心術不正, 或有忤己者, 陰中傷之。 朴龍妻贈馬設宴之事, 固非虛言, 上重大臣, 故義禁府承上意而推之, 臺員誣服, 上明照是非, 故亦不罪。 臺員或左遷, 或改下, 若實以天己不供之辭, 勒令取招, 則臺員之罪, 豈止若此而已乎?
【태백산사고본】 13책 40권 25장 B면
【영인본】 3책 135면
【분류】 *인물(人物)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