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

2012. 6. 7. 08:37알아두면 조은글

오세창의 ’근묵’ 완역
고려말부터 대한제국까지 1천136명 서간 등 엮어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근묵’이란 근역(槿域), 즉 무궁화가 피는 우리나라의 묵적(墨蹟)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글씨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43년 나온 ’근묵’에는 오세창이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고려말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1천136명의 서간이나 시가 1편씩 실렸다.

’근묵’은 전체 글 가운데 편지가 3분의2를 차지하는데 서간을 통해 당시 의식주, 생활도구 등 일상을 파악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아내를 잃은 지인을 위로하면서 쓴 편지에서 자신이 일찍 아내를 잃어서 슬픔을 안다면서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이라며 위로한다.

정조가 친척에게 물품을 하사하면서 보낸 물목에서는 창덕궁 후원의 농장에서 담배를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근묵’은 1911년에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서울대박물관 소장)와 함께 오세창이 엮은 대표적인 글씨첩으로, ’근역서휘’가 1부, ’근묵’이 2부격이다.

’근묵’은 성균관대 박물관이 1964년 유족으로부터 양도받아 소장하고 있으며, 1981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영인본이 발간됐으나 간행 부수도 적었고 크기도 작고 해설과 주석도 없는 등 아쉬움을 샀다.

6년간의 작업을 거쳐 나온 이번 간행본은 원첩 그대로 촬영해 필묵의 질감을 최대한 살렸고, 난해한 초서의 경우 정자체로 다시 적었다. 또 각 글씨에 대한 번역과 주석도 붙여 일반 독자들도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균관대 출판부에서 전체 5권으로 내놓았으며, A3 용지 크기에 각 권당 500쪽이 넘고 무게는 무려 28㎏에 달한다.

성균관대 박물관 김대식 학예실장은 “근묵은 서예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다”면서 “오세창 선생이 빼어난 감식안으로 수집한 자료이므로 역대 인물의 필적의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는 한국 서예의 기준작”이라고 말했다.
(조선)
 

근묵.jpg


고려 말 정몽주, 길재에서부터 대한제국의 민형식, 이도영에 이르기까지 600년 조선 서예사를 집성해 보여주는 글씨첩 '근묵(槿墨)'이 한글로 완역돼 출간됐다.

'근묵'은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 1940년대에 엮은 것으로
성균관대 박물관소장돼 있다. 성균관대는 1981년, 1995년에 '근묵'을 부분적으로 영인해 출간한 적이 있지만, 전체 내용을 한글로 번역해 출간하기는 처음이다.

'근묵'이라는 제목은 '무궁화가 피는 나라(槿域)의 묵적(墨蹟)'이라는 뜻이다. 역관 출신의 언론인인 오세창은 서화에 안목이 높았는데,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고미술품을 수집할 때도 오세창의 감식안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첩 분량의 첩장본인 '근묵'에는 정도전, 성삼문, 이황, 이이, 정약용 등 조선의 대표적 문인이 포함된 1,136명의 글씨가 1편씩 담겨 있다. 국왕과 왕후부터 문무 관료와 학자, 승려와 중인 등 각 계층의 글이 망라돼 있어 조선시대 서예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균관대 출판부가 발간한 <근묵>은 A3용지 크기 5권(2,399쪽) 분량의 영인본으로, 실물과 동일한 크기와 색감의 사진을 영인한 4권과 번역문을 모아 실은 1권으로 이뤄졌다. 번역은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이 맡았고,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 주석도 함께 실었다.

'근묵'의 글들을 서체별로 분류하면 흘림체인 행서(行書)와 초서(草書)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는 글씨첩에 묶인 글이 격식을 따지지 않고 쓴 자유스러운 것임을 의미한다. 문장 종류별로도 서간 724편, 시 359편 등 사적인 글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다.

성균관대는 "오세창은 '근묵'과 함께 '근역서휘'(槿域書彙ㆍ서울대 소장)라는 비슷한 글씨첩을 남겼는데, '근역서휘'가 서예사적 가치에서는 앞선 반면 '근묵'에서는 보다 다양한 문장 형식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절반 이상이 서간문으로 이뤄진 '근묵'의 가장 큰 가치는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 성균관대는 "기존의 각종
문집에도 편지를 수록한 '서(書)'라는 항목이 있지만, 문학ㆍ학술적 가치가 적은 사적인 것은 누락돼 있었다"며 "'근묵'의 편지는 쌀 몇 말을 부탁하거나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의 물목이 세세히 적힌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성삼문의 편지(수신자 미상)에는 "보내신 두 가지 물건은 잘 받았습니다… 이곳 백필 세 자루와, 먹 두 개를 사례로 보냅니다"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조선 역대 인물들의 진적(眞蹟)이 거의 빠지지 않고 수록된 글씨첩으로서, 서예사의 흐름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크다. 또 서간 형식과 수결(手決ㆍ
현대사인)의 변모 과정 연구에도 대표적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내를 잃었을 때는 방랑이 최고"라는 추사 김정희의 편지, 창덕궁에서 담배를 재배한 사실을 기록한 정조의 편지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史實)도 풍부히 담고 있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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