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화동원(書畵同源)

2012. 6. 6. 11:07詩書藝畵鑑賞

 

 

 

1.

 

글씨와 그림이 통한다는 인식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元代 조맹부이다.

 

"돌은 飛白과 같이, 나무는 주(대전大篆의 서체)와 같이, 대나무를 그릴 때는 글씨의 필법으로 해야 한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림과 글씨가 동일하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같은 元代의 묵죽화가인 가구사(柯九思)는,

 

"줄기는 전서로 그리고, 가지는 초서로, 잎은 팔분법 혹은 안진경의 별필법(왼쪽으로 친 획)으로 그리며,

나무와 바위는 절차고(전서에 있어서 비녀의 두 갈래로 갈라진 부분과 같은 표현),

옥루법(천정에 빗물이 새어 남긴 자국)으로 그려야 한다."

 

다시 말하면 대나무 잎이 바람에 뒤집어진 모습은 예서의 파책(오른족으로 기울어서 친 획)과 같이 그리며,

가지는 초서로 나긋나긋한 모습을 담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법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를 분명히 할 경우, 낙관을 할 때,

'그리다(描/畵)'는 표현 대신, '쓰다(寫/書)'를 사용한다.

 

 

 

 

송宋/황정견黃庭堅(1045-1105)/칠언시七言詩/종이,30.7 x 43.2cm .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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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pacechoi.com


 

 

 

2.

 

중국회화도 처음에는 서양회화와 마찬가지로 회화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화가의 서명마저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송대의 작품 대부분에도 화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겸손하여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회화의 완전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위틈이나 나무뿌리 같이 눈에 뜨지 않는 곳에 서명을 한 것이다.

이러항 원칙은 오늘날 유화나 수채화에서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宋代 이후에는 배경의 공백 혹은 수면을 칠하지 않고 소위 여백(留白)을 남겨두었다.

남소과 원대에 이르면 이러한 공백의 비중이 더 커졌으며,

이 공백을 메우는 시 또는 그림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글을 적어 넣게 되었다.

글은 내용이 우미하여야 하며, 서체 또한 좋아야 하며, 그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시되었다.

"치졸한 글씨를 보이기 보다는 차라리 공백으로 두는 것이 낫다."

 

唐 · 宋代의 화가들은 대부분 알아보기 어려운 곳에 서명만 했을 뿐 도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그림에 찟혀진 도장은 대체로 수장가나 소장기관에서 찍은 것이다.

 

 

 

 

 

 

 

 

 

출처 : 그 어느날 오후
글쓴이 : 알래스카 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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