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7. 11:17ㆍ한국의 글,그림,사람
1. 중인 출신 조선 최고 천부적 화가 김홍도.
경기도 화성 <용주사>.
이곳 대웅전에 특별한 불화 한 점이 있다.
1790년에 그려진 후불탱화.
그런데 탱화 속 인물들은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명암으로 되어 있다.
일반 불화와는 달리 서양 화법으로 그려 숱한 논란을 낳았던 작품.
그런데 이 불화를 그린 사람이 바로 단원 김홍도다.
그는 어떻게 서양 화법을 묘사한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게 된 것일까?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우린 그를 조선시대 최고 풍속화가로 기억한다.
벼타작
'씨름', '서당', '우물가' 등
당시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그런 그가 불화를 그렸다는 것.
그것도 서양화법으로 그렸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한국사 전(傳)>은 단원 김홍도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중인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었던 김홍도는
일개 화원에 불과했지만 양반 못지않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현재 전하는 기록만 3백 점이 넘는다.
당시 김홍도의 유명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홍도는 처음 어떻게 그림을 접하게 되었을까?
경기도 안산시.
이곳에선 건물 외벽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의 그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 2002년에 조성된 <단원 조각공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조형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또한 매년 시월이면 단원 미술제가 열린다.
안산과 김홍도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표암 강세황(1712~1791)이 쓴
<표암유고> '단원기(檀園記)'에 그 단서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김홍도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안산이다.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안산에 머물던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공부했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은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당대 최고 평론가였다.
많은 명화의 품평을 남겨, 좋은 그림을 가진 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그림을 받아가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김홍도를 지켜본 강세황은 그가 천부적 재능을 지닌 화가라 극찬했다.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못하는 게 없어 대항할 자가 없다고 평했다.
"고금의 화가들은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단원은 못하는 게 없어 그와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 강세황 <표암유고> '단원기'
2. 20대 궁중 화원에서 어용화사까지~
이후의 김홍도의 행적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건
21살때, 영조 칠순에 그린 <경현당수작도>에서다.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은 사라지고 글씨만 남았는데
'글씨 김상복(金相福), 화원(畵員) 김홍도(金弘道)'가 그렸다고 적혀 있다.
"영조 임금 등극 40주년을 기념해서 그린 궁중 기록화인데요,
정조가 세손 시절에 영조한테 간청하다시피 해서 열린 행사입니다.
행사가 끝난 다음에 그걸 기념하여 그리게 발의하고 주관한 것은 영의정이구요.
그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그림인데
21살밖에 안 되는 김홍도가 대표로 그렸다는 것은
당시 김홍도의 실력이 이미 화원계에서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그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 강관식 교수(한성대 회화과)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는
왕실에 관련된 모든 그림을 그리는 공식적인 기관이었다.
통상 서른 명 정도의 화원으로 꾸려졌는데
이들은 시험을 통해 선발된 직업 화가로
김홍도는 이미 이십 대 초반에 왕실 전용 화원으로 뽑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화원들은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상화나 일반적 회화를 포함해서.
왕실의 중요한 행사 기록화, 의궤라든지,
또 각종 문양이 있습니다 왕실의 의복이라든지, 가마라든지,
가끔씩은 임금의 특명을 받아서
지방에 가서 풍속화를 그려오기도 하고 지도를 그려오기도 합니다."
- 진준현 학예연구관(서울대 박물관)
그중 도화서 화원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김홍도는 불과 스물 아홉살에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용화사로 뽑혔다.
어진을 그리는 일은 여러 화사가 뽑히는데
김홍도는 곤룡포를 입은 왕의 몸체를 그렸다.
어용화사가 되는 것은 명예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게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터럭 하나라도 다르게 그린다면
이는 화원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불효 탓이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24년>
그렇다면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초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김홍도 - 송하맹호도
김홍도가 삼십대에 그린 <송하맹호도>를 보면
호랑이 몸에 털과 무늬를 아주 세밀하게 표현했음을 본다.
이 그림을 본 유경종은
'터럭 무늬의 호랑이가 마치 살아있는 듯해서
동네 개를 잡아먹을까 걱정이 된다'고 시를 읊었다.
"터럭 무늬 살아있는 호랑이가 되고 보니
동네 개 잡아먹어 백성 근심 아니 될까"
-유경종 '영화호(詠畵虎)'
1776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다.
등극과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건립하고
향후 국정의 중심축으로 삼고자 한다.
이때 김홍도에게 <규장각도(奎章閣圖)>를 그리게 했는데,
이후 그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정조의 명에 따라 김홍도는 궁궐 벽에 <해상군선도>를 그렸는데
그림은 전하지 않고 당시 기록만 남아있다.
"정조 임금이 <해상군선도>를 그릴 것을 명하셨는데
관모를 벗고 옷을 걷어 올린 채
비바람 몰아치듯 붓을 휘둘러 몇 시간만에 이루어 놓았다."
- 조회룡 <김홍도전>
당시 그림을 짐작케 하는 여덟폭의 병풍 그림이 남아 있다.
신선이 동자들을 데리고 잔치에 가는 것으로
거친 듯 휘몰아치는 필치가 김홍도의 기백을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대부분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사가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서른 세살 때는 중부동 강희언의 집에서
동료 화원들과 함께 민간에서 주문 받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림중의 하나가 여덟폭 병풍 속에 전한다.
여행길에 만난 시골 풍속도를 해학적으로 그린 그림인데
특히 여덟번째 그림 '훔쳐보기'편에는
젊은 여인을 훔쳐보는 양반의 모습이 재밌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을 본 강세황은
'행색이 초라하건만 무슨 염치로 아낙을 눈여겨 보냐'며 풍자했다.
"부서진 안장, 야윈 나귀에 행색이 초라하건만
무슨 흥취로 목화 따는 아낙네를 눈여겨보나"
- 강세황, '파안흥취(破鞍興趣)'
이런 풍속화로 김홍도는 삼십 대 중반에 이미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의 집 앞은 늘 그림을 얻으려는 이들로 넘쳐났다고 기록은 전한다.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그림을 구하려는 자들이 무리를 지었다.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사람들이 문을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 강세황 <표암유고> '단원기'
단원의 그림이 그 당시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엿볼 수 있다.
"김홍도가 여염집의 일상 풍속을 그렸는데
한번 보면 부녀자와 아이도 턱이 빠지게 웃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었던 일이라.
(婦孺童孩一展卷 無不解이 近古畵藝家 所末有也
부유동해일전권 무불해이 근고화예가 소말유야)"
스물 아홉 젊은 나이에 임금의 어진을 그려서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어용화사가 됐고,
삼십 대에는 세상에 풍속화로 이름을 날린 김홍도.
3. 김홍도,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왔다?
김홍도는 중인의 신분으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여러 가지 의혹도 끊이질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일본에 건너가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
일본에서 출간된 책 이영희의 <또 하나의 샤라쿠>
저자는 일본의 유명한 화가 샤라쿠가 김홍도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림의 필선이 비슷하고,
샤라쿠가 활동하던 시기 김홍도의 활동이 불분명한 점을 들었다.
그러나 김홍도와 샤라쿠의 그림은
자세히 보면 필치나 기법에서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또한 김홍도의 활동에도 아무런 공백이 없다.
"소설로는 재밌는 이야기지만, 학자들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샤라쿠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가장 일본적인 판화 화가로서
일본의 연극 배우들의 얼굴을 희화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천재적인 김홍도라 하더라도
잠깐 일 년이나 몇 개월 가서 그럴 수 있는 성격이 그림이 아닙니다."
- 진준현 학예연구관(서울대 박물관)
그런데 한때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본에 갔던 또 다른 기록이 전한다.
"김응환(金應煥)은 무신년(1788)에 금강산을 그려왔다.
이듬해 일본에 가서 몰래 지도를 그리려 했으나
부산에 이르러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홍도가 홀로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바쳤다."
- 호세창 <근역서화징> '김씨가보'
이 기록에 따르면 김홍도는 1788년 김응환과 더불어 금강산에 다녀와서 그림을 완성시키고
이듬해 1789년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왔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과연 사실일까?
당시 이들의 행적을 밟아보도록 하자.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은 김홍도와 김응환은 긴 여정에 오른다.
이들은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화폭에 담았다.
동행한 김응환은 같은 도화서의 동료 화원이자 스승으로 김홍도보다 세 살 더 많았다.
도화서 화원들은 지역을 돌며 지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는 진경산수화풍의 회화식 지도가 주를 이뤘다.
금강산을 다녀와 그린 또 다른 그림에 이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證明塔(증명탑)', 구룡연, '帶湖亭(대호정)'.
사진에 가까울 만큼 필치가 섬세하다.
당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 두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시에 있는 해운정(海雲亭).
당시 유력한 인사들이 꼭 들리는 장소였다.
강릉시립박물관에는 해운정을 다녀간 사람들의 박명록이 남아있는데
이 박명록속에 '김홍도, 김응환' 두 사람이 1778년 8월에 다녀간 기록이 있다.
"김홍도, 김응환이 무신년(1788) 8월 9일
스승 화사를 보좌하여 명승지를 돌아보고 그림을 그리러 왔다."
-해운정 박명록
이 기록은 김홍도와 김응환이 금강산을 같이 다녀왔다는
<김씨가보> 속의 기록과 년도 모두 일치한다.
강릉을 거쳐 금강산에 다녀온 두 사람은
이듬해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오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대마도 지도가 필요했던걸까?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나리(덕천가제, 11대 막부장군, 1787년)로 바뀌면서
정치적으로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보통 막부 장군이 바뀌면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왔는데
오랫동안 통신사 요청이 없었다.
정조는 내심 일본의 동태가 궁금하던 차였다.
"우리가 임란을 통해 엄청난 변고를 겪었기에
일본의 동태에 민감하게 주목하는 상황인데,
정권이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통신사 요청이 없었고,
여러 가지 정황을 수집하기 위해서
대마도에는 역관들 중심으로 자주 왕래를 했었지만,
거기에 좀더 시각적 자료를 통해서 정보수집 겸 김홍도를 보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홍선표 교수(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금강산을 다녀온 두 사람이 정조의 명에 따라 대마도를 향한 것은 이듬해였다.
이들은 대마도로 가기 위해 영남지방으로 향했는데 이때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응환은 어명에 따라 김홍도와 금강산을 그려왔다.
1789년에 다시 영남지방은 두루 다니며 명산을 그렸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
이곳에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 한 점이 있다.
<통도사 전경도>.
낙관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김홍도가 이곳을 다녀간 것만은 확실하다.
절 입구 바위에 통도사를 방문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金弘道 金應煥(김홍도 김응환)'의 이름도 나란히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은 대마도로 가기 위해 양산에서 부산으로 향한다.
당시 부산에는 왜관이 설치되어 일본인이 수시로 오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김응환은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한다.
결국 김홍도는 홀로 대마도로 향한다.
아쉽게도 김홍도가 그린 대마도 지도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들을 볼 때
김홍도가 부산을 거쳐 대마도로 간 것은 분명한 듯하다.
실제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은 지도를 비롯해 나라에서 원하는 모든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화원인 김홍도도 기록화, 풍속화, 산수화, 지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4. 정조의 특명 - 불교 성화를 그리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특히 주목할 그림 한 점이 있다.
경기도 화성 용주사.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절이다.
그런데 이 절의 일주문은 다른 절과 달리 3문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대웅전과 이어지는 천보루(天保樓)는 긴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고,
건물의 기둥은 궁궐에서나 세워지는 장대한 기둥들로 세워져 있다.
정조는 왜 이 같은 구조로 절을 지었을까?
"정조대왕이 아버지를 위해서 이곳에 사도세자의 궁궐을 지은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부처님의 힘으로 극락 왕생하기를 바라면서,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가 사후에라도 그런 지위에 올라
이런 궁궐에서 계십사 하는 효심을 담고 지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 권중서(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
사찰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특별한 그림이 한 점 있다.
용주사 후불탱화.
가로 3.5미터, 세로 4.4미터의 대형 통비단에 그린 이 불화는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위시해 있어 '삼세여래탱'이라 불린다.
그런데 다른 불화와는 달리 하단 중앙에 축원문이 써 있다.
'主上殿下壽萬歲
慈宮邸下壽萬歲
王妃殿下壽萬歲
世子邸下壽萬歲'
(주상전하수만세 자궁저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만세)
왕과 왕의 어머니, 왕비와 세자의 장수를 비는 것으로
탱화가 왕실을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후불탱화'를 그린 사람이
김홍도라고 <용주사사적기>는 전한다.
"우리 절의 여래 세화를 만든 사람은.....
삼세여래체탱(후불탱화)은 전 연풍현감 김홍도가 그렸고..."
-<용주사사적기>
화승의 전유물인 탱화를 과연 김홍도가 그렸을까?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손이나 옷선의 처리 등을 볼 때 김홍도의 필치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또한 얼굴 부분에서 일반 불화에선 사용치 않는 초상화적인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 얼굴을 기다랗게 그리는 김홍도의 화법과 일치한다.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린다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자기 얼굴이 상당히 반영됩니다.
단원은 콧날이 높고 얼굴이 길고 갸름하고 아주 청초하게 생겼습니다.
단원 그림에 나타나는 특징은 갸름하고 콧날이 높고 한결 같습니다.
또 옷자락을 그리는데 바람 맞은 것처럼 하늘하늘거리게 그리죠.
단원의 특징들이 여기 다 나타나 있습니다."
- 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김홍도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화법, 명암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등장 인물을 보니 이마와 뺨 등에 조명이 들어간 것처럼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천왕의 경우 명암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런 것은 전통 불화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기 다른 불화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후불 1790년 김홍도 / 삼장탱화 1790 화승 민관.
그래서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발견된 국가공식문서인 <수원지령등록(水原下旨抄錄)>에도
김홍도가 불화 제작을 총감독했다고 한다.
"불상 후불탱을 주관 감독한 전찰방 김홍도, 김득신, 이명기는 2월 19일부터 9월 29일까지 일했고..."
그렇다면 김홍도는 서양화법을 어떻게 알고 그렸을까?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일성록>에 실려있다.
"이성원이 아뢰기를
'김홍도와 이명기를 동지사(사절단)행에 데려가야 하는데 마땅한 직책이 없습니다.
이에 김홍도를 군관자격으로, 이명기를 추가정원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하니 윤허하셨다."
- <일성록> 정조 13년 1789년 8월.
후불 탱화를 그리기 몇달전 정조는
청으로 가는 사신 일행에 김홍도에게 별도의 직책까지 마련해 같이 보낸 것이다.
여기엔 정조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중국 북경.
당시 청의 수도 연경은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있었고
이를 주도한 것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천주교 남당>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면서
연경을 찾은 조선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 서양화법으로 그린 천주교 성화는 당연히 볼거리였고
그것은 사신을 통해 정조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자기가 총애하고 지원했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취향대로 그릴 수 있는
최고의 측근 궁중화가였던 김홍도와 이명기에게 후불 탱화를 그릴 계획을 세워놓고,
사도세자의 산소를 옮기기로 정해놓고,
바로 그 다음 달에 이 두 사람을 북경에 보내서 북경의 천주당에 있는 성화를 보고 오게 했다고 보입니다.
용주사 후불 탱화를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는 불교 성화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북경의 천주당 성화에 버금가는
우리 나름대로의 불교 성화를 그리기 위해
정조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특별히 지시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강관식 교수(한성대 회화과)
당시 조선에도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서양화법이 들어간 이형록의 '책거리 그림'이었다.
"그때에 도화서에서 서양의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畵法, 원근법)을 본떴으니
'책거리 그림'이라고 하였다. 홍도가 이 기법을 잘했다."
- 이규상 <일몽고>
정조의 오랜 준비,
그에 따라 김홍도가 익힌 서양화법,
이 모두가 준비되어 탄생한 게 '용주사 후불탱화'인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는
이 절에 봉안하게 될 후불탱화를 최고 작품으로 만들고자
미리 화원을 청에 보내서 서양화법을 익히게 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고
그리고 이 작업의 총감독을 김홍도에게 맡겼다.
김홍도는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린 이듬해에
정조의 어진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공이 인정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데
충청도 연풍지역에 현감이라는 자리를 얻는다.
5. 중인 출신 연풍현감 김홍도.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흔치 않는 벼슬직에 오른 김홍도.
화원이 아닌 행정 관료로서의 김홍도는 어떠했을까?
1791년 12월.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인 정6품 벼슬길에 오른 김홍도.
김홍도가 현감으로 오른 연풍지역은
충청도 괴산에 속하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연풍초등학교 자리에 현청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헐리고 그 중 하나인 '풍락헌'만 남아있다.
당시 이곳은 첩첩산중으로 인구가 적었다.
"당시에는 연풍면과 수안보면, 상암면 등 세 개의 면이 합쳐서 연풍현이 되었는데
소백산 밑 아주 가난한 촌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가구수는 천백 호, 인구는 약 3,200명 정도 살았습니다."
- 경석준(향토사학자)
김홍도가 부임한 그 해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했다.
이때 김홍도는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현청의 곡식을 열고 죽을 끓여 나눠먹도록 지시한다.
이러한 김홍도의 선행은 <일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연풍현감 김홍도는 재해에도 나라 곡식에 의존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 <일성록>, 정조 17년 1793년
이후에도 가뭄이 계속 되자 김홍도는 조령산 중턱에 있는 상암사라는 절을 찾았다.
이곳에서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지내면서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개인적인 소망도 빈다.
"김홍도가 기우제를 위해 암자에 올랐다가....
늙도록 아이가 없더니 이 산에서 빌어 아들을 얻었다."
- <연풍군 상암사 중수기>
그의 나이 마흔 여덟에 얻은 귀한 아들.
훗날 화원이 된 아들 김양기는 아버지의 시문을 모아 <단원유묵첩>을 만든다.
연풍에서도 김홍도는 그림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지역의 선비들과 풍유를 즐기는 한편 인근의 빼어난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한다.
연풍에서 가까운 단양 지역의 절경이 전한다.
<단원절세보첩>에는 단양 절경을 그린 '도담삼봉' '옥순봉'이 남아있다.
도담삼봉도(島潭三峰圖)
사인암도(舍人岩圖)
그런데 부임 3년째 되던 김홍도는 현감 생활에 큰 위기를 맞는다.
호서위유사(湖西慰諭使) 홍대엽이 김홍도의 실정에 대해 상소를 올린 것이다.
"김홍도는 고을의 수장인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이나 즐겨하여 원망과 비방이 자자하다."
- <일성록 (日省錄) >, 정조19년 1795년.
"그때 탄핵한 사유라는 것을 보면 사냥을 했다든지,
백성들의 중매를 섰다든지 이런 것들인데
사실 그 정도는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백성들의 중매를 섰다는 것은 그 정도로 백성들과 가까웠다는 것이고,
또 사또가 되어가지고 사냥 한두 번 안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중인 출신의 사또에 대한 사대부들의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진준현 학예연구관
홍대엽이 올린 상소 때문에 김홍도는 연풍현감에서 파직당하고
의금부로 가서 문초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믿음은 한결 같았다.
"의금부에서 미처 잡아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라는 단자교로 김홍도 등을 놓아주었다."
- <일성록 (日省錄), 정조 19년 1795년>
정조의 배려로 의금부에 압송되는 신세는 면했지만
김홍도의 현감 생활은 삼 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연풍현감 김홍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목민관으로서 김홍도는 그리 훌륭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현감 3년의 임기를 거의 다 채웠고
정조가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 걸 보면 그 죄가 크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6. 우리나라 기록화의 금자탑,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도화서 화원으로 복귀한 김홍도는
그 해 왕실 최대의 행사를 그리는 총책임을 맡게 된다.
1795년 2월.
정조는 수원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왕실의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이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이기도 했고,
그리고 정조 자신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기념할 대규모 화성 행차와 회갑연 행사 전반을 기록할 의궤청이 세워졌고
그 의궤 속에 들어가는 그림의 총책임을 김홍도가 맡았다.
행사의 모든 과정은 김홍도의 책임 아래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중 <화성원행반차도(華城幸行 班次圖)>라는 두루마리형 그림은
마치 기록 사진을 보는 듯 길이 15m가 넘는 방대한 그림 속에 당시 행사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했다.
말이 끄는 정조의 가마.
그 뒤를 따르는 호위무사와 궁녀들 모습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園幸乙卵整理儀軌 班次圖).
'원행을묘의궤도병풍'
주요 행사 모습을 8폭의 병풍 그림으로 남겼다.
노량진에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는 <주교도>.
행렬이 막 시흥 행궁에 다다른 '시흥행궁환어도' 등
'우리나라 기록화의 금자탑'이라 할만하다.
대규모의 행렬과 수많은 구경꾼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에는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당시 시대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용이 행사 기록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풍속화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궁중 풍속화이면서 구경 나온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자연스럽게, 해학적으로 그렸습니다.
따라서 정조가 꿈꿨던 왕실과 백성과의 소통을 회화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들이 정조대에 발달했었던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까지 이용해
굉장히 사실적으로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 강관식 교수
1796년 8월. 수원 화성 완공.
당시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수원 화성.
정조가 집권 후반기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건설 사업이었다.
정조는 화성 건설 사업 과정도 꼼꼼히 기록케 했다.
여기에도 김홍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단원은 정조를 위해 화성 일대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서성우렵도, 한정품국도..
이렇듯 50대의 김홍도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며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거기에는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신뢰와 지원이 있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글이 남아있다.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30년 전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후로 무릇 그림을 그리는 일은 모두 홍도에게 주관케 하였다."
- <홍재전서, 정조 24년(1800년)>
7. '정조'라는 날개를 잃은 말년, 세속을 등지고...
그러나 그 시기는 길지는 않았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마흔 아홉의 나이로 돌연 승하했다.
그의 죽음으로 규장각을 이루던 많은 개혁파들이 힘을 잃었다.
그들 속에 김홍도도 있었다.
정조라는 거대한 날개를 잃은 김홍도는 초야에 묻혀 말년을 보냈다.
그 쓸쓸한 말로에도 위로가 되어준 건 그림이었다.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듯한 이 그림에는 자신의 심정을 담은 화제가 적혀 있다.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할 때까지 벼슬 없이 시가나 읊조리련다."
그가 말년에 그린 그림을 보면 세속과 담을 쌓은 듯한 초탈함이 잘 드러나 있다.
말년의 단원은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궁핍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녹아에게.
날씨가 차가운데 집안은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
너의 선생님 댁에 보내는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겠다."
김홍도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추성부도(秋聲賦圖)'
늦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그린 비애를 느끼게 하는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 - 추성부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을 통틀어서 가장 태평성대였고 예술 활동이 활발했던 문예 부흥기였다.
김홍도는 그 변화의 시기를 기록한 화가이자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이었다.
시대의 요청에 한치의 모자람 없이 그것도 새로운 화풍을 추구한 김홍도.
그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태평한 기상과 문화를 사랑하는 자긍심이 들어있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지금 김홍도가 남긴 다양한 그림은 그 어떤 기록이나 자료보다
지난날을 보여주는 생생한 창이 되고 있다.
마상청앵도
김홍도(金弘道)의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은 갖가지 풍속 장면을 종합한 화첩이다.
이 화첩은 모두 25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을 열거하면,
「자리짜기」, 「대장간」, 「점괘」, 「노상파안」, 「씨름」, 「주막」, 「빨래터」, 「나룻배」,
고누놀이」, 「기와이기」, 「장터길」, 「활쏘기」, 「우물가」, 「그림감상」, 「서당」, 「편자박기」,
논갈이」, 「무동」, 「고기잡이」, 「신행」, 「길쌈」, 「담배썰기」, 「행상」, 「벼타작」, 「점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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