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浩書室

사령운

水西散仁 2024. 6. 19. 07:05

사령운謝靈運(385년-433년)의 증숙조曾叔祖는 사안謝安, 조부는 사현謝玄인데, 역사상 유명한 비수淝水(안휘성安徽省에 있는 강) 전투의 지휘자였는데, 동진東晋 왕조를 보위하기 위해서 북방 이민족 병탄倂呑에 큰 공을 세웠다.
사령운은 그러한 혁혁한 가세에 힘입어 순조롭게 벼슬길을 밟았다. 그는 일찍이 조부의 “강락공康樂公” 작위를 세습하여, 17,8 살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산수시山水詩를 처음으로 창조하다
사령운 때 동진東晋 왕조는 이미 숨이 곧 끊어질 듯이 간들간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동진안제東晋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은 원래 백치여서 실권은 모두 강한 병사를 보유한 대신들이 쥐고 있었다. 특히 장군 유유劉裕는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이지만,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점차로 실력을 장대하게 키웠다. 그는 황위를 찬탈하여 칭제稱帝한 환현桓玄을 박멸하는데 참여해서, 얼마 가지 않아 자기가 동진 정권을 대체할 조짐을 뚜렷이 드러냈다.
명문세가라는 좋은 기반에서 출발한 사령운은 동진 왕조가 능히 연속되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곧장 유유에게 대립對立하는 쪽으로 비집고 들어갔는데, 그의 부친의 가숙家叔 중에서 군대를 이끄는 사혼謝混과 군벌軍閥 유의劉毅가 연맹을 맺은 데였다.

의희義熙 8년(412년)에 유유는 일거에 사혼과 유의의 연맹을 격파하고, 그들을 다 죽였다. 사령운은 연대되지 않아 죽임은 당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행운인 셈이다. 그때가 그의 나이 28 살이었다.

사령운은 유유의 천하가 이미 좌정坐定된 것을 보고 더 이상은 대항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유유의 둘째아들 유의진劉義眞과 관계를 맺어 그의 모사가 되었는데, 그가 유의진에게 황위 계승권을 다투라고 부추키자, 유의진은 만약 그가 황위를 얻게 되면 사령운을 재상을 삼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유유가 죽은 뒤에 유의진은 황위 쟁탈을 투쟁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송소제宋少帝가 즉위하여 실권이 대신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사령운은 정견政見이 다른 사람을 선동하여 당권자當權者를 비방하고 중상했다. 사도司徒 서선지徐羨之 등이 그를 꺼려서 영가태수永嘉太守로 내보냈다. 사령운은 정치상에 재차 좌절을 당했다.
영가태수로 부임한 그는 마음속에 번민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찌 혁혁한 업적을 쌓는 관리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산수를 유람하고 시문詩文을 지으며 가슴속의 울분을 풀려고 했다. 나중에 태수라는 직분이 너무나 무료하다고 생각한 그는 아예 사직 상소를 쓰고 은거에 들어갔다.
족제族弟 사회謝晦, 사요謝曜 등이 서신을 써서 그를 만류했는데도, 그는 전혀 듣지 않았다. 사령운의 부친과 조부가 묻혀있는 시녕현始寧縣은 고택故宅과 별장까지 있어서, 그는 곧 회계會稽로 이사하여, 옛 가업家業을 수리하여 경영했다. 그곳은 뒤에는 산이 있고 곁에는 강이 있어, 대단히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사령운은 은사隱士 왕홍지王弘之, 공순지孔淳之 등과 하고 싶은 바를 다하며 마음껏 즐겼는데, 여기에서 일생을 지내려고 생각했다. 시 한수를 지을 때마다 도성으로 전해졌는데, 귀족과 평민들 모두가 다투어 베껴 써서, 곧 그의 명성은 사대부와 백성들 사이에 두루 퍼져 온 도성을 진동시켰다.
그는 『산거부山居賦』를 짓고, 또 스스로 주석註釋을 달아, 상세하게 산에 거하는 일을 기재했다. 사령운의 시는 대부분 산수시山水詩로, 이 작품들은 시가사詩歌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있기 이전에 동진 시단詩壇 전체는 “현언시玄言詩”가 통치 지위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약간은 생동하는 정취와 기취機趣가 있었다.
사령운의 산수시는 시단의 침울하고 침체되고 혼탁한 상태를 타파하고, 시가에 청신한 기운을 주입하여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 그가 있은 뒤로 현언시를 쓰던 사람이 크게 감소하고, 산수시를 쓰는 기풍이 크게 많아졌다.

登池上樓(등지상루)
지상루에 올라

- 謝靈運(사령운) -
潛虯媚幽姿 (잠규미유자)
飛鴻響遠音 (비홍향원음)

못에 잠긴 용은 그윽한 자태 뽐내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소리 멀리 울리는데

薄霄愧雲浮 (박소괴운부)
棲川怍淵沈 (서천작연침)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자니 구름에게 부끄럽고
시내에 머물러 있자니 규룡에게 부끄럽네

進德智所拙 (진덕지소졸)
退耕力不任 (퇴경역불임)

덕망을 펼치자니 지혜가 부족하고
물러나 밭을 갈자니 감당할 힘이 부치는데

徇祿反窮海 (순록반궁해)
臥痾對空林 (와아대공림)

봉록을 쫒다 도리어 궁벽한 바닷가로 와서
병상에 누워 빈숲을 바라보고 있도다

衾枕昧節候 (금침매절후)
褰開暫窺臨 (건개잠규림)

이부자리 속에서 시절을 알지 못하다가
걷어치우고 잠시 일어나 바깥세상을 엿본다

傾耳聆波瀾 (경이령파란)
擧目眺嶇嶔 (거목조구금)

귀를 기울여 물소리도 들어보고
눈을 들어 험준한 산줄기도 바라본다

初景革緖風 (초경혁서풍)
新陽改故陰 (신양개고음)

초봄의 햇살은 남아있는 찬바람 물리치고
새로운 볕은 오랜 음지를 따스하게 바꾸는데

池塘生春草 (지당생춘초)
園柳變鳴禽 (원류변명금)

연못가엔 푸릇푸릇 봄풀이 돋아나고
정원 버드나무에는 새 소리가 달라졌다

祁祁傷豳歌 (기기상빈가)
萋萋感楚吟 (처처감초음)

豳風(빈풍)의 칠월을 노래 부르며 상심하다가
楚辭(초사)의 초은시를 생각하며 감상에 빠져보나니

索居易永久 (삭거이영구)
離群難處心 (이군난처심)

홀로 있으매 세월이 긴 것이 쉽사리 느껴지고
무리를 떠나 있는지라 마음을 안정시키기 어렵도다

持操豈獨古 (지조기독고)
無悶徵在今 (무민징재금)
지조를 지키는 게 어찌 옛사람에게만 있으랴
번민 없는 삶의 증거가 여기에도 있도다.


歲暮(세모)-오언육구체

한 해가 저물고

​謝靈運(사령운)/육조 시대

殷憂不能寐 (은우부능매)
깊은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苦此夜難頹 (고차야난퇴)
괴로운 이 밤을 지새우기 어렵네

明月照積雪 (명월조적설)
밝은 달빛은 쌓인 눈을 비추고

朔風勁且哀 (삭풍경차애)
세찬 북풍 또한 애달프네

運往無淹物 (운왕무엄물)
가는 세월에 머무름이 없기에

年逝覺已催 (년서각이최)
해가 가니 (삶이) 촉박함을 이미 깨달았네


              석벽정사(石壁精舍)

昏旦變氣候(혼단변기후)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기후,
山水含淸暉(산수함청휘)             산과 호수에는 청신한 광휘.
淸暉能娛人(청휘능오인)             청신한 광휘, 사람을 즐겁게 한다.
遊子憺忘歸(유자담망귀)             놀러 나온 이, 돌아갈 것을 잊는다.

出谷日尙早(출곡일상조)             골을 나서니 해는 아직 이르던데,
入舟陽已微(입주양이미)             배에 오르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林壑斂暝色(림학렴명색)             수풀에는 어두움이 깔리었다.
雲霞收夕霏(운하수석비)             하늘에는 저녁놀이 걷히었다.
芰荷迭映蔚(기하질영울)             함께 빛나는 마름과 연,
蒲稗相因依(포패상인의)             서로 기대는 부들과 피.

披拂趨南徑(피불추남경)             옷자락 날리며 남쪽 길로 걸어가,
愉悅偃東扉(유열언동비)             기쁜 마음으로 동쪽 문에 눕는다.
慮澹物自輕(려담물자경)             생각이 담박하면 만물이 절로 가벼워진다.
意愜理無違(의협리무위)             마음이 만족하면 진리가 어긋나지 않는다.
寄言攝生客(기언섭생객)             섭생을 꾀하는 이에게 이르노니,
試用此道推(시용차도추)             이러한 도리를 따라 행해보시라.

齋中讀書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謝靈運
사령운


昔余遊京華 석여유경화
未嘗廢丘壑 미상폐구학
矧乃歸山川 신내귀산천
心迹雙寂寞 심적쌍적막
虛館絶諍訟 허관절쟁송
空庭來鳥雀 공정래조작
臥疾豊暇豫 와질풍가예
翰墨時間作 한묵시간작
懷抱觀古今 회포관고금
寢食展戱謔 침식전희학
旣笑沮溺苦 기소저닉고
又哂子雲閣 우신자운각
執戟亦以疲 집극역이피
耕稼豈云樂 경가기운락
萬事難并歡 만사난병환
達生幸可托 달생행가탁

도성에서 여러 곳 유람할 때도
한 번도 산림을 잊어본 적 없는데
산천경개 이름 높은 곳으로 돌아오니
마음과 발길 모두 고요하고 가벼워졌네
비어 있는 공관은 판결을 다투는 소리 끊어지고
인적 없는 마당에는 작은 새들만 드나드는데
몸 아파 얻은 휴가 한가한 날 많아서
붓 들고 그때그때 시를 짓고 글을 쓰네
전적에 파묻혀서 고금의 일을 읽고
먹고 자고 우스갯소리 주고받으며
힘들게 산 장저와 걸닉을 조롱하고
천록각에서 뛰어내린 양웅을 놀려먹네
관리가 되는 것도 힘든 일이고
농사를 짓는 것도 즐겁다 할 수 없으니
세상만사 함께 좋을 수 없을 바에야
노장老莊의 무욕에 맡겨지기 바라야겠네

▶ 齋: 사령운이 영가태수永嘉太守로 있을 때 독서하던 서재를 가리킨다.
▶ 京華: 당시의 도성 건강建康을 가리킨다. 사령운은 영가로 밀려나기 전, 도성에서 다년 동안 경관京官으로 있었다.
▶ 丘壑: 산수山水를 가리킨다. ‘廢’는 잊다.
▶ 矧: 하물며
▶ 心迹: 심성心性과 행위行爲를 가리킨다. 한유韓愈는 「寄崔二十六立之」란 시에서 ‘西城員外丞, 心迹兩屈奇(서성현승 최립지 원외는 / 심성과 종적이 모두 기이하였네)’라고 했다.
▶ 豊暇豫: 한가하고 안락한 날이 많은 것을, ‘臥疾’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 懷抱: 서재에서 전적과 함께 지내는 것을 가리킨 듯하다.
▶ 戱謔: 유머. 우스갯소리. ⟪시경詩經⋅위풍衛風⋅기오淇奧⟫에서 ‘觀兮綽兮, 猗重較兮; 善戱謔兮, 不爲虐兮(관대하고 너그럽게 / 수레 팔걸이에 기대 앞으로 가면서 / 조용조용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 농담을 해도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네)’라고 했다.
▶ 哂: 조소嘲笑. 조롱하다. 비웃다. ‘子雲閣’은 양웅揚雄이 천록각天䘵閣에서 뛰어내리다 죽을 뻔한 것을 가리킨다. ⟪삼보황도三輔黃圖⋅미앙궁未央宮⟫에서 ‘天䘵閣, 藏典籍之所(천록각은 전적들을 모아두는 곳이다).’라고 했다. ⟪한서漢書⋅양웅전揚雄傳⟫에서 ‘時雄校書天䘵閣上, 治獄使者來, 欲收雄, 雄恐不能自免, 乃從閣上自投下, 幾死(이때 양웅은 천록각에 교서랑으로 있었는데,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천록각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했다).’라고 했다.
▶ 耕稼: 농작물을 심는 것을 가리킨다.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大舜有大焉: 善與人同, 捨己從人, 樂取於人以爲善; 自耕稼陶漁以至爲帝, 無非取於人者(순임금이 위대한 것은 사람들과 장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잘 한 것인데, 자신을 버리고 장점을 가진 사람을 배워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었다. 스스로 밭을 갈고 도자기를 굽고 물고기를 잡으며 임금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어느 것 하나 남들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 執戟: 진한대秦漢代에 궁정을 지키던 시위관侍衛官을 가리킨다. 당직을 설 때 창을 들었다. 여기서는 출사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사기史記⋅골계열전滑稽列傳⋅동방삭東方朔⟫에서 ‘悉力盡忠以事聖帝數十年, 官不過侍衛, 位不過執戟, 其故何也(온 힘을 다해 충성으로 밝으신 임금님을 수십 년 동안 모시고도 관직은 고작 시위에 불과하고 지위도 집극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했다.
▶ 達生: 삶의 본질을 깨달아 세속의 정리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달생達生》에서 ‘達生之情者, 不務生之所無以爲; 達命之情者, 不務命之所無奈何(삶의 정리를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삶을 위해 애쓰지 않고, 명운에 대해 깨우친 사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라고 했다.


남조南朝 송무제宋武帝 영초永初 3년(422), 영가태수永嘉太守로 있을 때 쓴 것이다.
여릉왕廬陵王 유의진劉義眞과 내왕이 밀접했던 사령운이
개국공신 서선지徐羨之 등의 배척을 받아 조정에서 영가태수로 밀려난 뒤
정사를 보는 것에 흥미를 잃고 독서와 유람, 양생 같은 것으로만 소일하던 시기였다.


아래는 은자들의 전고가 된 고대의 은자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에 관한 내용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장저와 걸닉이 함께 밭을 갈고 있을 때,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게 했다.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장저가 자로에게 물었다. “저기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자로가 대답했다. “공구입니다.”
그러자 장저가 “노나라의 공구를 말하는 것이오?”라고 다시 물었다.
자로가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장저가 자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루를 알고 있겠구려.”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옆에 있던 걸닉에게 묻자 걸닉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되물었다.
자로는 “중유입니다.”라고 답한 뒤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라는 물음에도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천하에 혼탁한 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데, 누가 그것을 뒤바꿀 수 있단 말이오?
당신도 마음에 안 드는 위정자를 피해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는 공자 같은 사람을 따르느니
차라리 속된 세상 자체를 피하여 은거하는 우리 같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말을 마친 걸닉은 일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김을 맸다.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자로가 돌아와 들은 대로 전하자 공자가 실망한 낯빛으로 말했다.
“날짐승과 길짐승이 함께 살 수 없을진대 내가 이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 ⟪논어論語⋅미자微子⟫ 중에서

종근죽간월령계행
從斤竹澗越嶺溪行

대숲 낀 시내 따라 재를 넘고 걷다

猿鳴誠知曙 (원명성지서)
谷幽光未顯 (곡유광미현)
巖下雲方合 (암하운방합)
花上露猶泫 (화상로유현)
逶迤傍隈隩 (위이방외오)
迢遞陟陘峴 (초체척형현)
過澗旣厲急 (과간기려급)
登棧亦陵緬 (등잔역릉면)
川渚屢徑復 (천저루경부)
乘流翫回轉 (승류완회전)
苹萍泛沉深 (평평범침심)
菰蒲冒淸淺 (고포모청천)
企石悒飛泉 (기석읍비천)
攀林摘葉卷 (반림적엽권)
想見山阿人 (상견산아인)
薜蘿若在眼 (벽라약재안)
握蘭勤徒結 (악란근도결)
折麻心莫展 (절마심막전)
情用賞爲美 (정용상위미)
事昧竟誰辨 (사매경수변)
觀此遺物慮 (관차유물려)
一悟得所遣 (일오득소견)

원숭이 울음소리 날 새는 걸 알겠는데
골짜기 깊은 곳은 빛 아직 안 들었네.
낭떠러지 아래로는 구름이 모여들고
꽃 위에 맺힌 이슬은 떨어질락말락 하네.

구불구불 작은 길은 낭떠러지를 돌아들고
골짜기와 고개 너머 떨어진 길 아득하네.
시내를 건너니 물길이 솟구쳐 급히 흐르고
잔도에 오르니 넘어가야 할 길 머네.

물길은 여러 차례 구불구불 휘어지고
시내 따라 걸으면서 굽은 물길 구경하네.
무성한 물풀은 깊은 물 위를 떠다니고
창포는 얕은 물에 뿌리 내리고 자라네.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대숲에 올라서는 여린 잎을 뜯어 먹었네.
산에 사는 선인을 만나보고 싶었더니
신선들의 거처가 눈앞에 있는 듯하네.

난 뿌리 하나 들고 그만 갈까 생각하다가
도롱이풀 꺾어보니 마음 편치 못하네.
정취로야 산수 구경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선인을 못 만났으니 뉘에게 내 얘기할까.

나호혈 보면서 깊은 생각 잠겼다가
한 순간에 깨달아 모든 번뇌 풀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