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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水西散仁 2018. 9. 3. 17:37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박 해 남*


Ⅰ. 서론
Ⅱ. 근대적 글쓰기로서 척독 교본의 의미
Ⅲ. 근대 척독 교본과 이전 자료와의 연관성
Ⅳ. 결론
차례


<국문초록>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척독 교본을 ‘근대적 글쓰기’의 한 예로 삼아 설명
하였다. 하지만 근대 척독 교본의 경우 대부분은 ‘언문일치’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글쓰기와는 상관성이 약하고 오히려 전근대적인 한자(또는 한문)에 기
댄 경우가 더 많았다. 겉으로 봐서는 편지의 유통을 촉진하는 등의 근대적인
성격을 가졌을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내용이나 표기 수단에 있어서 상
당 부분을 전근대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척독 교본을 근대적 글쓰기
의 증좌라고 단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일차 결
론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신찬국문가뎡간독이나 신찬국문간독의 경
우로 보자면 다른 한편에서는 분명 한글로 된 편지의 보급을 강조한 측면도 무
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척독 교본의 맥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건대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후의 출판 상황으로 보자면 한문에 기반을 둔 척독 교본이 대세였다.
또한 중세적 산물이라는 척독 교본의 경우 근대 시기에도 방각본으로 출판이


* 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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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으로 보아 척독 교본만으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물론 출판
의 형태나 내용에 있어서 일정 정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중세의
대체품 또는 극복의 결과로 근대 척독 교본이 등장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
이 또 하나의 결론이다.


【주제어】척독 교본, 근대, 근대성, 근대적 글쓰기, 척독완편, 신편척독완편, 국문구해신찬척
독, 신찬국문가뎡간독, 신찬국문간독


Ⅰ. 서론
이미 확정된 개념이나 범주를 변경하거나 그것에 대한 이견(異見)을
개진(改進)하기란 쉽지가 않다. 기존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통
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익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편리하다. 학문 연
구에 있어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고 있는 당위(當爲)의 태도이지만, 실제로 기존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
은 약간의 무모함이 필요한 일이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통념적으로 인식
되고 받아들여졌던 ‘근대(近代)’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준비되었다. 다만 거스르기 위해서는 완벽한 이론적 구도가 필
요한데 제대로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약간의 무모
함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자인(自認)한다.
지금까지 근대 또는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
로 연구 성과가 많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연구자가 미리 설정한 논지
에 부합되는 또는 근접되었다고 믿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약점이 있다. 근대의 설정과 해명에 대한 작업에서 근대성이 명시적(明示
的)으로 드러나는 자료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근대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해명이 되어야 온당한 논리성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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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될 것이다. 즉 반대논리에 대해서도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논문은 근대성을 의심할 만한 대상을 통해 근대 또는 근대성
을 되돌아보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이 자료들이 제대로 해명되어야 근대
성 논의가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근대성 논의를 위한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이 논문에서는 최근 많이
언급되고 있는 ‘근대적 글쓰기’를 중심에 두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근대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00∼1910년에 출간된 척독 교본(尺牘敎本)1)을 대
상으로 하였다. 제대로 된 근대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교본이 아니
라 당시 유통된 개별 척독을 살피는 것이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개별 척독을 모두 살핀다는 것은 현실 여건을 고려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현재 시중에는 수 없이 많은 척독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과거의 모
든 척독을 대상으로 하면서 또 주고받은 개별 상황까지 고려하여 고찰한
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인 것이다.
척독 교본의 출판이 척독과 관련된 당대의 상황을 모두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척독 교본의 생산/유통 구조를 통해 근대의 모습을 되
짚고 넘어갈 수 있는 한 요인이 된다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이런 구도를
설정하였다. 척독은 기본적으로 발신자와 수신자의 ‘거리’를 전제로 한다.
서로 떨어져 있기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척독이 필요한 것이다. 척독 교
본이 소용(所用)된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서 그만큼 떨어져 있는 상황이
많아졌고, 소식을 전해야 되는 이유도 다양해지게 되어 편지를 써야 하는
수요도 증대되는 상황을 대변하기에 척독 교본의 출판 상황을 통해 당대
사회를 엿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 편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이전에는 尺牘, 簡牘, 簡札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상으로 하고 있는 교본의 대부분이 ‘척독○○’ 또는 ‘○○척독’과 같이 명칭에
서 척독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기에 편의적으로 ‘척독’으로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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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근대적 글쓰기로서 척독 교본의 의미
지금까지 근대 척독 교본에 대해서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
다.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2), 이전에는 부분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3) 문제는 척독 교본에 대해서 부정확한 내용을 다루
거나, 자신의 논지 전개를 위해 임의적으로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근대적 글쓰기’라는 영역에서
인용된 척독 교본의 경우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근대적 글쓰기를
통해 근대의 모습을 새롭게 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근대적 글쓰기 범주에서의 척독 교본이 실제로는 어떤 양상과 의미를 가
졌는지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근대적 글쓰기”를 언급하는 논자들은 “‘근대적 글쓰기’란 ‘말하기’를
문자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장 언어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주체가 가지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의식, 그
리고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층의 형성이 연동하면서 만들어지는 사
태이다.”4)라는 유(類)의 주장을 내세운다. 만일 척독 교본을 ‘근대적 글쓰
기’의 양상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내용은 현실을 도외시한 견해라고 하지


2) 홍인숙, 「근대 척독집 연구-김우균의 척독완편(尺牘完編)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연구 19,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10; 홍인숙, 「김우균의 척독완편 서발문을 통
해 본 근대척독집 편찬과정 및 척독 인식」, 한국학연구 38,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2011; 박해남, 「근대 척독자료집 척독완편(尺牘完編)의 출판 현황과 배경」, 泮橋語
文硏究 32, 泮橋語文學會, 2012.
3) 김성수,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서간(書簡) 양식 연구(1)」, 민족문학사연구 39호, 민족
문학사연구소, 2009.
______,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서간 양식 연구(2)」, 현대소설연구 42, 한국현대소설
학회, 2009.
______, 「근대 초기의 서간과 글쓰기 교육-독본, 척독, 서간집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국근대문학연구 21, 한국근대문학회, 2010.
4) 권용선, 「머리말」, 근대적 글쓰기의 탄생과 문학의 외부, 한국학술정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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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시대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드러낸 또
하나의 ‘근대적 글쓰기’라고 평가된다.
척독 교본만을 두고 보자면 “새로운 문장 언어의 창출, 글을 쓰는 주체
가 가지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의식, 독자층의 형성”으로 요약되는 ‘근
대’적 글쓰기의 양상과 배치(背馳)되는 부분이 오히려 더 많다. 근대적 방
식에 의한 출판이 지식의 보편화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근대를 내세운
다면 모르겠지만, 척독 교본만으로 근대성을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척독 교본의 근대적인 출판이라는 상황은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기대
와는 달리 당대가 훨씬 더 복잡다단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
겠다. 근대를 논의함에 있어서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적용했던 것보다 훨
씬 강화된 기준과 세심한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부분이다.
구한말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근대 초기에는 종래의 한문투 편지나 언
간, 내간으로 일컬어지는 중세적 한글편지 대신 새로운 서간 문범이 쏟아져
나왔다. 중세를 청산하고 막 근대에 들어선 식민지 대중들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서식을 모아놓은 일종의 근대적 계몽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척독(尺牘)’으로 불리던 일군의 서간집이다. 이들은 단순한 편
지 교본뿐만 아니라 근대적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계몽적 지식의 보급
수단으로서, 각종 서식 매뉴얼 구실까지 하였다. 대표적인 척독 자료는 다
음과 같다.
증보척독(增補尺牘)(유일서관, 1910), 선문구해(選文句解) 신찬척독
(新撰尺牘)(대창서원, 1909 초판, 1913 재판), 고등척독(高等尺牘)(보
문관, 1921), 최신언문척독(最新諺文尺牘)(조선도서주식회사, 1926)5)


5) 김성수, 앞의 논문(1), 2009, 62∼63면. *여기에 인용된 자료의 서지사항에도 오류가
많다. 근대 척독교범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많은 논의들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실물을 확인하지 않고 검색이나 재인용을 통해 논의를 진행한 결과로
보인다. 증보척독(增補尺牘)의 원명은 增補最新尺牘이다. 발행소는 唯一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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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동아일보> 1921년 3월 12일 자
앞의 인용문은 최근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척독 교본-여기서
는 서간 문범-에 대해 언급한 일
례이다. 여기서 말한 대표적인
‘척독 자료’가 당대에 얼마만큼
의 대표성을 가졌는지는 차치
(且置)하더라도, 당시의 척독 교
본이 “중세를 청산하고 막 근대
에 들어선 식민지 대중들에게”
곧바로 소용될 만한 “근대적 계
몽서”였는지에 대한 엄밀한 논
증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과연 중세가 청산되면 곧바로 근대에
들어서게 되는지? 근대에 들어서면 식민지 대중은 근대적 계몽서가 필요
했던 것인지?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염원하는 근대의 모습은 어떤 것
인지? 등 일련의 의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6)


이 맞지만 초판이 1911년(明治 44)에 발간되었고, 1913년(大正 2)에 재판이 1914년(大
正 4)에 3판이 나왔다. 선문구해(選文句解) 신찬척독(新撰尺牘)은 鮮文句解新撰
尺牘의 誤記이다. 이 책은 隆熙 3년(1909)에 玄公廉이 발행한 國文句解新撰尺牘
을 강제병합된 이후인 1913년에 再刊하면서 제목을 ‘國文’대신에 ‘鮮文’으로 바꾸었다.
발행자는 동일한데 발행소가 현공렴에서 대창서원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내용은 변
함이 없고, 책 내부에는 초간본인 ‘國文句解新撰尺牘’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등
척독(高等尺牘)은 文字註解高等尺牘이 바른 표기이다(그림 1 참조). 최신언문
척독(最新諺文尺牘)은 기본적인 서지사항을 확인할 수 없었다.
6) 贅言이기는 한데 이런 부분에서 근대라는 논의가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근대는 누가 정의하는 것인가? 과연 당대의 사람들은 그 근대를 의식하며 살았던
것일까? 너무 상투적으로 근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근대를 위해 당대의 자료를
편의적으로 제시하고 미리 설정한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근대의 시작점에 대해 제대로 된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면서 제각
각의 기준에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근대 또는 근대성 논의가 올바르게
진행된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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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척독완편(1905년)의 부분
먼저 “근대 초기에는 종래
의 한문투 편지나 언간, 내간
으로 일컬어지는 중세적 한
글편지 대신 새로운 서간 문
범이 쏟아져 나왔다.”라고 한
부분부터 살펴보자. 여기에는
근대 초기에 중세적 편지 대
신 새로운 양식을 제시한 척
독 교본의 출현을 전제하고
있다. 근대 초기가 어떤 시기
를 지칭하는지는 정확히 알
기 어려우나, 새로운 척독 교
본의 시초는 1905년에 출간
된 척독완편(尺牘完編)이
다.7) 이 책은 1908년에 신찬
척독완편(新撰尺牘完編)으로, 1912년에는 김우균에 의해 증보자전척독
완편(增補字典尺牘完編)으로 제목과 형식을 바꾸면서 판(版)을 거듭하
였다. 당시 공전(空前)의 히트를 쳐서 1917년 이전까지 약 3만 질의 판매
량을 기록하여8) 당시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0년에 9판이 나왔
는데 이때까지도 조사와 어미에 해당하는 한글 토를 달았을 뿐 이 책은
여전히 한자(한문)투가 주를 이루었다.9) 이정환(李鼎煥)은 1909년 12월


7) 박해남, 앞의 논문 2장 참조.
8) 金雨均, 「文明尺牘叙言」, 文明尺牘(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으로 판권지가 소실되
어 정확한 서지사항을 알기가 어렵다. 대략 1917년 무렵에 출간된 것으로 판단된다.
청구기호:古367-176), “僕이於光武二年歲에家塾兒輩의發軔을起見야尺牘完編
을纂集經春抵冬야始克成書얏더니坊友의嗜痂바를作야印布기에至
니幾年의間에翻印이凡六度오三萬餘帙에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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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국문구해신찬척독(國文句解新撰尺牘)10)을 세상에 내놓았다. 국문
구해신찬척독은 제목 그대로 한자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조사와 어미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한글로 적었고, 어려운 한자 어구를 본문의 상단에 해
설하는[國文句解] 정도이다.
 自汝發程後風雨頻仍爲念不尠苐未知穩抵而近間客狀何似所看事
將有就緖就緖猶竣事之期耶甚鬱鬱吾一如前樣汝妻子俱善爲幸耳餘適
因轉便玆付數字而已姑不具11)
 自汝發程后로風雨頻仍야爲念不尠터니第未知穩抵而近間客狀
이何似며所看事將有就緖之期耶아甚菀甚菀이라吾一如前
樣고汝妻子도俱善니爲幸耳라餘適因轉便야玆付數
字而已오姑不具라12)
 汝가出外지幾歲에安信이甚希지라吾가汝의母氏로더브러長時
寄望야汝身體의健否와殖貨의好否를未諳心緖가不寧더니前日
來書에도甚히詳提치아니얏스니雖曰滾劇나엇지如此토록糢糊뇨後
便에備示여라秋凉이驟至니近狀이何如냐信息이稍阻면擧家
가驚疑니老父母로야곰耽憂치아니커이是卽汝의孝誠이니爾其軆
諒을至囑다家中은大小敉平니遠念치말고客地寒暑에
湏自愼重여라餘續示기를俟다13)
9) 박해남, 앞의 논문 3장 참조.
10) 필자는 개인 소장본을 참고하였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동일 판본(청구기호:古
367-245)이 소장되어 있다.
11) 金雨均 외, 尺牘完編(乾), 塔印社 외, 1905, 36면. 필자 소장본임. *앞으로 인용하는
 ~
는 원래 세로 표기인데 편의상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12) 朴晶東, 新撰尺牘完編, 同文社, 1908, 35~36면. 필자 소장본임.
13) 李鼎煥, 國文句解新撰尺牘, 玄公廉, 1909, 121면.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89


는 척독완편(1905년, <그림 2>의 □ 부분), 는 신찬척독완편
(1908년), 는 국문구해신찬척독(1909년)에서 ‘父在家寄子(書)’, 즉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내용을 각각 인용한
것이다.14) 는 에 조사와 어미를 국문으로 추가한 경우이고, 도 내
용은 다르지만 형식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이 근대에 들어선
식민지 대중
̇ ̇
에게 소용될 만한 근대적 계몽서였는지 새겨 보아야 한다. 당
대의 대중들 중에서 위의 예문을 이해할 수 있는 비중이 얼마나 되었을
지부터 의문이기 때문이다.15) 게다가 지금 예로 든 척독 교본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에 출간되었다. 근대가 진행된다고 하는
시기에도 대다수 척독 교본은 여전히 한자를 익힌 식자층을 대상으로 하
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 나온 척독 교본의 경우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양상이다. 따라서 근대라는 시기 부여를 하면서 ‘근대적 글쓰기’라는 부분
에 척독 교본을 포함시킨다면, 근대 양상과는 다른 전근대적인 모습이 우
선하는 모순이 드러난다. 그동안의 많은 연구들이 실물을 살피지 않았기
에 현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척독 교본의 내용과 함께 그것을 선택했던 독자들도 검토의 대상에 넣
어 보면 논의가 보다 풍부해진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언어 표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할 수 있는 언어 표현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조선시대에
쓰인 상당수 한글편지의 상대가 여성이었음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다(<그림 3> 참조). 반면에 근대에 접어들었다는 1920년대에도 쌍방이
모두 한문 사용자인 경우 여전히 한문 편지를 주고받았다(<그림 4> 참
조).
14) 아래에 인용하는 ~
도 마찬가지이다.
15) 참고로 193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조선국세조사보고에 의하면 당시 문맹율은
약 77.7%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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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宣祖가 貞淑翁主와 주고받은 편지(左)와 鄭澈이 그의 모친과 주고받은 편지(右)
그림 4 상해에 있던 金昌淑이 안동의 유인식에게 보낸 편지. 金星文은 김창숙의 變名임.
척독 교본이 출간된 초기가 신학문의 도입으로 인해 생긴 ‘거리’를 극
복하기 위해 편지를 써야 할 기회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편지의 한
쪽 당사자는 여전히 구학문의 자장(磁場) 속에서 생활하는 부류였다. 앞
서 인용한 경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척독 교본에 많이 등장하는 상당
수의 예문은 손윗사람과의 편지이다. 결국 편지의 상대가 구세대에 속하
는 경우 이들을 위해 불가피하게 한자로 쓴 편지가 필요하게 된다. 구세
대가 하루아침에 한글 편지의 작자 또는 독자로 전환되기는 어려웠을 것
이다. 1945년 무렵까지도 한문으로 된 척독 교본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이유이다.
앞서 근대의 글쓰기 양상을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91


는 논지를 폈다. 그런데 이 역시 일괄적으로 주장하기 어렵게 만드는 자료
가 있다. 바로 1909년 10월에 이정환이 간행한 신찬국문가뎡간독16)과
같은 해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신찬국문간독이 그것이다. 이 중 신찬국
문가뎡간독은 본문을 한글로 적었지만, 단어가 한자어인 경우 매번 오른
쪽에 한자를 부기(附記)하면서 ‘。’를 사용하여 띄어쓰기의 단위를 표시하
는 방식을 취했는데, 대략 아래와 같다.

 모





부친이。외방에。잇아달의게붓치셔식
그곳。사의말을드르니。너의학



이。일







(→즁)에。초

(→
쵸)……깃부다。근



일에간



(→)。초





(→쇼)학

급이。그림과문



(→톄)가。……을。사셔보니。잠



야。독

습 習
여라。대강。이만긋

0
……
앞서 본 국문구해신찬척독과 같은 해에 동일한 인물에 의해 간행되
었다. 그런데도 사용하고 있는 문체는 확연히 다르다. 편찬의 동기나 배
경을 알 수 있는 글이 첨부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렵지
만 당대의 일부에서는 이런 편지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찬국문간독17)은 신문 광고에서 “純國文으로著야漢文을未解
人이라도知得기容易冊이오니”(<그림 5> 참조)라고 하면서 ‘순국
문’을 강조하고 있는데, 범례에서도 “국문으로만 져술고”18)라고 하였다.
16) 필자는 개인 소장본을 참고하였는데, 이 판본이 현재까지 실물로는 唯一本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에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소장 자료를 마이크로필름
형태(청구기호:XH717-2)로 영인한 자료가 있기는 하다.
17) 이 책은 필자 소장본으로 최근까지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던 판본인데, 지금까지는 유일
본으로 판단된다. 본문이 총 56면으로, 전체 편제는 ‘가졍왕복’ ‘인쳑간왕복’ ‘사우간왕
복’ ‘사회상왕복’ ‘상로상왕복’ ‘조장 위장’의 6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 「신찬국문간독범례(凡例)」, 신찬국문간독
192 泮橋語文硏究 제36집
그림 5 ≪황성신문≫
1909년 8월 12일 자
 네가집을후로궁금□□□□량업스며
더위길에엇지득달고연야즁신상무양
며보일은모쳐에□□야보앗야두루염려
로다나별고업스나수란다일이여의면죠
흐려니와그러치못거든쇽히도라와입안일이
나힘쓰것이올흐니라편이급기로두어긋
친다(□는 판독 불가)
신찬국문가뎡간독이 한자 어구에는 한
자를 병기(倂記)하였다면 신찬국문간독은
이마저도 생략하고 국문으로만 적었다. 앞의
한자 위주의 척독 교본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당대의 일상적 언어생활에 가까운 경우라고
하겠다.
이 두 척독 교본은 국문에 충실한 예이다.
특히 근대적 글쓰기의 지향인 언문일치에 한층 가깝다는 점을 부정하기
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경향의 척독 교본이 이후에 발간된 예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 이런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세우는 데 한계로 작용한다.
상장
떠나신 지 삼 삭이 못 되었으나 평양에 계시던 일은 전생일 같삽. 만리타
국에서 수토불복이나 되시지 아니하고 기운 평안하오신지 궁금하옵기 측량
없삽나이다. 이곳의 지낸 풍상은 말씀하기 신신치 아니하오나 대강 소식이
나 알으시도록 말씀하옵나이다. (중략) 그러나 사랑께서는 몇십 년을 아니
오시더라도 이 세상에 계신 줄을 알고 있사오니 위로가 되오나, 옥련이는
만나 보려 하면 황천에 가기 전에는 못 볼 터이오니 그것이 한 되는 일이압.
말씀 무궁하오나 이만 그치옵나이다.19)
19) 이인직, 혈의 누, 문학과지성사, 2007(2009), 67면. 혈의루는 萬歲報에 1906년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93
위의 인용문은 1906년에 쓰인 이인직(李人稙)의 혈의루[血淚]에 등
장하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허구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
라도 이인직이 이 작품을 쓰면서 당대의 상황과 완전히 별개의 내용을 묘
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편지 부분은 여기
서의 두 척독 교본과 유사한 성격을 보인다. 아마도 한문 위주의 편지 소
통 방식에 대해 국문 위주의 편지 쓰기를 주도한 어떤 흐름이 있었던 것
은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1905년에 한자로
쓰인 최초의 근대 척독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척독완편이 발간된 이후라
는 점을 생각하면 척독과 관련된 당대의 상황이 상당히 복잡다단한 양상
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근대 척독 교본의 대부분이 ‘언문일치’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
적 글쓰기와는 상관성이 약하고 오히려 전근대적인 한자(또는 한문)에 기
댄 경우가 더 많았음을 살폈다. 겉으로 봐서는 편지의 유통을 촉진하는
등의 근대적인 성격을 가졌을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내용이나 표
기 수단에 있어서 상당 부분을 전근대성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척독 교본을 근대적 글쓰기의 증좌라고 단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Ⅲ. 근대 척독 교본과 이전 자료와의 연관성
근대라는 시기에 나온 척독 교본이 단절의 대상이어야 할 중세의 그것
과는 독립된 결과물인지 극복의 결과물인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져야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과 의미가 더욱 완벽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 근대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가, 1907년 3월 광학서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194 泮橋語文硏究 제36집
이전의 척독 교본과 근대 이후의 척독 교본을 함께 다룬 연구는 찾기 어
렵다. 또한 근대 이전의 척독 교본을 다룬 경우에도 대부분 간식유편(簡
式類編)(1739년)20), 한훤차록(寒暄箚錄)(18세기 초중반)21), 간독정
요(簡牘精要)(1850년) 등의 한문본22)과 언간독23), 증(징)보언간독
등의 한글본을 별개로 다루고 있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편의적으
로 한 분야만을 다룬 결과이다. 하지만 대상이 되는 척독 교본이 당시 방
각본(坊刻本)으로 출판되었고, 그 출판 목록에서 한문본과 한글본이 동
시에 등장하기에 당대의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함께 다루어
야 실상에 보다 근접할 수 있게 된다.
 爾奔走風塵父母之心豈不懷念須體父心保重身軀在外狂藥少飮美
色宜遠事完之日卽速歸來慰我懸望家中大小平安爾無掛念只此字示餘
不多及
 汝未歸家我㘦倚門想必事勢之所致而豈或慈念則少弛耶客狀近果
何必此間渾室依舊而已歸期似在何時耶不勝悶鬱玆付數字安報姑此不
一一云不具一云不旣一云不多及

는 간식유편에서, 는 간독정요에서 뽑았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척독완편의 와 비교했을 때
20) 이 책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김효경, 「18세기 간찰교본 簡式類編 연구」(장서각
9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를 참조.
21) 김효경, 「寒喧箚錄에 나타난 조선 후기의 간찰 양식」, 서지학보 27, 한국서지학회,
2003.
22) 여기에 대해서는 김효경, 「조선후기에 간행된 간찰서식집에 대한 연구」(서지학보
33, 한국서지학회, 2006)를 참조.
23) 여기에 대해서는 김봉좌, 「조선시대 방각본 언간독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2004)와 김남경, 「≪언간독≫과 ≪증보언간독≫ 비교 연구」(민족문화논총 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 2001)를 참고.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95
내용만으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척독의 내
용이 되는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굳이 나눈다면 출판의 방식이 다르다는 점 정도이다. 근대 이
전에 나온 한글본 척독 교본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길가슈고는탄탄뢰나요요험뇌나끈기일반이니엇지득달야
몸이나무고지소식이아득니쥬야로념이로다나아즉모양지며가솔
도일양이니지의념녀말고소간나마츤후즉시와문의의지야기리
즐져라지말게야라마지인편잇기두어안부나통며총요이만젹
는다
이 부분은 언간독에서 인용하였다. 앞의 한문본과는 판이(判異)하며
뒤 시기의 ,
와 비교하여도 별반 차이가 없다. 내용에 있어서 한문 교
재와 한글 교재 간에, 시대에 있어서 차별성을 확인하기는 역시나 어렵다.
이들 두 방각본은 예측 가능한 수요를 전제로 당시 가장 대중적인 방식에
의해 판매를 목적으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굳이 통시적인 입장에서 고려한다면 앞 시기 간식유편, 간독정요,
간독회수(簡牘會粹), 언간독 등이 일정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그 영향으로 근대 척독 교본이 지속적으로 나오게 된 계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24). 하지만 중세 척독 교본의 대체재로 근대 척독 교본이 형성
되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활판 인쇄의 유무 정도
로 구분될 수 있는 정도이다. 이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수요의 증가에
부합하기 위해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한 증좌(證左)로 볼 수 있겠다.
24) 앞서 언급한 한문 척독 교본 중에서 한훤차록은 영향의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이는
지방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집중적으로 수록하고 있어 다른 책들과 성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6 泮橋語文硏究 제36집
Ⅳ. 결론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근대에는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지향함으
로써 ‘근대적 글쓰기’는 중세의 산물인 한문에서 한글로 전환되었을 것으
로 추정하지만 척독 교본을 통해 본 상황은 꼭 그렇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척독 교본의 출판 양상만을 놓고 보자면 이는 한문
독자보다는 한글 독자를 더욱 염두에 두었고, 많은 ‘거리’를 만들어 내었
던 사회 변화 속에서 구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위
한 상업적 대응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당시 신문에서 행해진 현상공모, 독본에 나타난 편지의 예문, 소설에
등장하는 편지 등에서 지속적으로 한글을 중심으로 한 편지의 보급에 힘
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한자에 기반을 둔 척독 교본의 보급과
유통에 관심을 두고 있는 출판인들이 존재했음으로 보건대 이 시기 근대
의 모습이란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양상
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지금처럼 구체적인 실상을 도외시하면
서 척독 교본을 근대적 글쓰기의 도구로 접근하는 태도는 마땅히 지양(止
揚)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를 규정함에 있어서 세부적인 내용이 모두 적용될 수 있어야 그
규정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를 너무 쉽게 허용해서
는 올바른 논의점에 도달하기 어렵다. 문화를 논의함에 있어서 출판도 그
한 분야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척독 교본의 출판이 큰 비중을 차지하
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포함된 상황으로서의 출판문화가 규명되
어야 하고, 나아가 근대의 논의에 있어서도 근대적 양상으로서의 척독 교
본이 지니는 의미도 일관성 있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척독 교본
이 근대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면 근대의 문제인지 척독 교본의 문
제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근대를 설정하고 그것에 적합한 형태만으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97
로 미리 재단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는 상당한 위험하다.
이 시기가 단순히 한글화로의 지향 아래 국문본 척독 교본이 사용되었
을 것이라는 추정만으로 모든 상황을 근대적 글쓰기 양상으로 모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척독 교본에 대한 실재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특히 1910년 이후에도 한문본 척독 교본의 출판뿐만
아니라 초간독(草簡牘)25)이나 증정시체초간첩(增正時體草簡帖)26)
과 같은 전문적인 내용까지 출판된 상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27) 이는
근대출판 이전에도 언간독과 증(징)보 언간독과 같은 한글본 척독 교본이
나온 상황처럼 근대의 상황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단순
한 맥락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는 태도 수정을 요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척독 교본을 통해 안이하게 근대적 글쓰기에 접근해서는 곤란
하다. 여러 경우의 수를 다시 설정하고 이를 해명하는 철저한 과정이 필
25) ‘草簡牘’은 上․下 合本의 형태와 상․하 구분 없는 단일본의 2종이 있다. 필자가 확인
한 바로는 전자는 坊刻本(A)과 1913년에 新舊書林에서 간행된 것(B)이고, 후자는 역
시 신구서림에서 1913년 8월(C)과 1917년(D)에 각각 나온 것과 1913년 10월에 紙物書
冊舖를 발행소로 하는 판본(E)이 있다. A와 B는 내용이나 필체가 동일하나 상편과
하편을 나누는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B가 A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으
로 판단된다. D는 C의 重版으로 보인다. C, D, E의 필체는 동일하다. (C, D)는 (A,
B)의 상하 부분이 서로 바뀐 형태로 출판되었고,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老
少間往復’ 누락). 다만 두 판본의 필체가 확연히 다른 것으로 보아 내용은 참고하였지
만 출판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한 출판사에서 같은 해(판권
에 발행일도 대정2년 8월 20일로 같다)에 B와 C를 출판한 내막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26) 이 책은 永豊書館(A-5판)과 滙東書館(B-13판)에서 1913년 10월에 모두 3권으로 발
행하였다. 1914년 2월에 增正再版이 나오고 이후 계속 간행되어 1923년에 13판(B)이
나왔음을 판권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와 B는 판권지를 보면 5판까지 중간된 날짜
도 동일하다. 왜 그런 지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년 판을 거듭하고
1년에 2판이 나온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판매량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 책은 1935년에 永昌書館(C)에서 3권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모두 李柱浣이 編書寫
한 판본이다. 하지만 같은 해에 나온 A와 B는 판형과 글씨체가 약간 다르고, B와 C는
동일한 판본임을 확인하였다.
27) 물론 출간과 보급의 상관관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198 泮橋語文硏究 제36집
요하다 하겠다.
또 간식유편, 간독정요, 언간독 등과 같은 방각본 척독 교본이
이후의 근대 척독 교본에 직접적인, 또는 최소한의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고 예상하기 쉽다.28) 하지만 그 연관성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전체적으로 내용상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크게 구분될 만한 부분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논의들이 이 시기에 단선적인 흐름을 예상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복잡다단한 선들의 교직(交織)에 의해 구성되었음
을 다시금 확인하는 예라 하겠다. 근대로의 전환에 대한 적응이라는 측면
에서 새로운 지식(知識)의 확산과 정착을 위해 많은 교과서와 문법책, 사
전 등이 출간되었다.
당대 척독 교본의 출간은 그 수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
은 수가 나왔다. 그렇게 다량 출간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척독완편의 지속적인 출판과 이
를 이은 척독대방 등의 간행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따라서
‘근대적’ 글쓰기가 관념적으로 일정하게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유형화되
었다고 규정하기보다 지금으로서는 당대의 글쓰기 상황이 상당히 복잡다
단한 양상을 띠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해 보인다. 어쨌든 척독
교본을 가지고 근대적 글쓰기의 증거로 삼기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나름
의 결론이다.
28) 류준경, 「坊刻本 簡札敎本 硏究」(한문고전연구 18, 한국한문고전학회, 2009)의 논
의가 대체로 이런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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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泮橋語文硏究 제36집
Abstract
Reconsideration on the Modern Writing through the Letter
Textbooks
Park, Hae-nam
The modern letter textbook has been considered as a example of modern
writing in many researches. However, modern letter textbooks not necessarily
related with modern writing represented the identity of the written and spoken
language. It was written by chinese letters not Hangeul. Active commercial
publication of modern letter textbook mostly depended on premodern charac
teristics in respects of content and means of writing. So, it is difficult that the
modern letter textbook regards as a example of modern writing.
Around the same time, many Hangeul letter textbooks were published also.
It was so complicated situation in the course of transition from premodern to
modern. In a word, the publication of modern letter textbooks represented the
change of letter culture. It was not replacement of medieval letter textbook but
result of transfer to modern times.
【Key words】letter textbook, modernity, modern writing, publication of modern letter
textbooks
논문 투고: 2014년 1월 10일, 심사 완료: 2월 3일, 게재 확정: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