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선비들)

이준경李浚慶

水西散仁 2018. 5. 3. 18:58

이준경

동고(東皐), 李浚慶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그러나 진정한 성리학적 도학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 중기 무렵부터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정치로 구현하려던 사림들은 연산군 시대부터 중종, 명종 대까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림들은 훈구파들을 몰아내고 정치 권력을 잡았다. 그 혼란한 과도기에 이준경(李浚慶)이 있었다. 그는 중용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조선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준경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이다. 1499년(연산군 5) 홍문관 수찬 이수정(李守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수정은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함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준경도 연좌되어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어머니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열여섯 살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李延慶)과 정암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으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파직과 유배를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승지, 형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 병조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8년(명종 13)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 20) 영의정에 이르렀다.

《명가필보》에 실린 이준경의 간찰

《명가필보》는 1926년 백두용이 한국 역사 4,000년간의 고금명가 필적 700점을 모아 6권으로 편집한 책으로 글씨체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 중요 자료로 취급된다.

사화의 환란 속에서 성리학의 도를 깨우치다

이준경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인 광주 이씨였다. 학문이 깊었고 관직에 오른 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그의 집안에 큰 화가 미쳤으니, 바로 연산군 대에 일어난 갑자사화이다. 이준경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 약사발을 들고 갔던 봉약관(奉藥官)이었다. 연산군은 1504년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이를 모두 치죄했다. 이세좌는 귀양 가는 중에 자결을 강요받았고, 이세좌의 친인척과 이준경의 아버지 이수정을 포함한 아들 4명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창졸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이준경 역시 연좌되어 여섯 살의 나이에 형 이윤경과 유모를 따라 괴산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러다가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이준경 형제는 귀양에서 풀려났다. 갈 곳이 없었던 이준경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형과 함께 외가에 얹혀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다행히 참화를 면했고, 적자인 아들도 없어서 이준경 형제가 의탁할 만했다. 외할아버지는 이들 형제의 사람됨을 보고 이준경의 어머니 신씨 부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은 봉추(鳳雛)와 기자(麒子)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니 잘 키우도록 해라.”

신씨 부인은 아들들에게 《효경》과 《대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공부를 가르칠 때마다 늘 이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옛말에 과부의 자식은 남들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남들보다 학문을 열 갑절 더 부지런히 해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마라!”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는 화를 당하고도 꿋꿋하게 버티며 아들 형제를 가르친 어머니의 덕으로 이준경은 학문을 벗하며 바르게 성장했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준경은 이연경에게 배울 때 조광조의 도학에 대해 듣고 영향을 받았다. 이로써 사림파의 일원이 된 것이다. 물론 조광조의 도학이 다른 사람의 도학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학을 신념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다른 것이었다. 이준경이 예순여덟 살에 명종에게 올린 〈병인봉사(丙寅封事)〉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하늘은 이(理)를 가지고 있어 사람이 받아서 성(性)으로 삼고, 하늘은 기(氣)를 가지고 있어 사람이 받아 형체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하늘의 이는 사람에 있어 다르지 않고 사람의 도는 모두 하늘에 근원을 둡니다. 그러나 사람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 국한되어 그 소이연(所以然)의 이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저와 나를 나누어 푸르고 푸른 하늘은 사람에게 관여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은 하늘에 간섭함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에 제멋대로 나쁜 일을 저지르며 치레만 하다가 실없이 한 것이 참으로 재변(災變)을 이루면, 일기(一氣)의 하늘도 부득불 이에 따라 변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준경, 《동고유고》 권2, 〈병인봉사〉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이준경이 조광조의 도학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준경은 열일곱 살부터 성균관에서 유학하고, 열아홉 살에 이연경을 따라 정암 조광조를 찾아갔다. 조광조는 이연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 집안의 종반(從班) 쌍벽(雙璧)은 붕새와 같고, 기린과 같아서 항상 옆에 두고 보아도 싫지 않다.”

그러나 이준경이 스물하나 되던 1519년(중종 14) 12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100여 명이 사사당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가운데는 사촌 형 이연경, 재종 형 이약수(李若水)와 이약빙(李若氷), 삼종숙 이영부(李英符)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성균관 유생으로 조광조의 처벌에 반대하다가 죽거나 귀양 간 것이다. 이준경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이들의 영위를 모시고 한없이 울었다.

기묘사화 이후 이준경은 다른 사림과 마찬가지로 과거나 벼슬을 기피했다. 잘못하면 멸문지화를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 신씨의 생각은 달랐다. 신씨는 이준경 형제를 통해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과거시험을 볼 것을 종용했고, 이준경은 1521년(중종 16)에 생원초시, 다음 해 진사복시에 합격하고, 1531년(중종 26)에 문과에 급제했다.

혼란의 정국에서 빛난 중재의 리더십

이준경이 관직에 들어선 때는 기묘사화 이후 개혁정치에 실패한 중종이 훈구 세력과 척신들에게 휘둘리며 정국이 혼미한 때였다. 시시콜콜 도학의 정치 이념을 들이대며 훈구파를 몰아세우던 사림파를 눈엣가시로 여긴 훈구파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종종 옥사를 일으켰다. 사림이었던 이준경 역시 그 와중에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견제를 받아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선대에 사화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했던 이준경은 자중하며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매진함으로써 김안로가 제거된 후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혼란한 시기를 견디며 신중하게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준경의 이러한 신중함은 혼란한 정국 속에서 중재의 미덕을 발휘하게 했다. 이준경이 1532년(중종 27)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생원 이종익(李宗翼)이 전일에 유자광(柳子光), 이행(李荇), 심정(沈貞), 이항(李沆) 등이 죄가 없다고 상소를 했다가 오히려 그 일로 자신이 죄를 받고 유배를 간 일이 있었다. 대사헌 황사우(黃士祐) 등은 이 일을 두고 강경하게 나왔다.

“이종익 같은 이는 사림에 불리하니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죄를 줄 만하나, 상소한 것으로 죄를 받는다면 좋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자칫 자신이 궁지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 목숨 하나를 살린 것이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 윤원형(尹元衡)은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형 윤원로(尹元老)를 유배 보냈다. 인종이 명종을 해치려 한 일에 참여했다는 죄목이었다.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를 유배 보낸 것도 모자라 그를 사사하려고까지 했다. 이러한 논의가 있을 때 이준경은 신중하게 견해를 제시했다.

“이와 같이 아뢰는 것 역시 지나치게 빠른데 더구나 죽이자고 할 수 있겠는가.”

이준경의 이러한 신중함은 때로 권신들과 급진적인 사림 양쪽에서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경이 절조와 행동에 하자가 없고 논의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빈번하게 옥사가 일어나던 혼란한 정국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졸기에는 그의 이러한 신중한 리더십이 잘 나타나 있다.

준경은 성심과 공도로 문무 관원을 재목에 따라 써서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이루어졌으며 인심을 진정시키고 국맥을 배양했으니, 참으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다. 다만 본조(本朝)에 사화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고는 항상 억제해 조정하려 했고, 또 혁신해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사림은 그의 이런 점을 아쉬워했는데 이에 대해 준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지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 했다.
《선조실록》 권6, 선조 5년 7월 7일, 이준경의 졸기

그의 사림으로서의 본심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면서 비로소 나타났다. 문정왕후가 죽자 척신 윤원형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해 문묘(文廟,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우리나라에는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한 18인의 명현들이 배향되어 있다)에 배향하고, 도교의 색채가 짙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용군 중종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노력

중종은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됐다. 그러나 그는 훈구 세력과 개혁정치를 꿈꾸는 사림파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국을 혼돈에 빠뜨리는 데 일조한 용군(庸君)이었다. 중종과 같은 용군은 이랬다저랬다 해 충신도 간신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종은 처음에 훈구파의 말을 듣고 기묘사화와 안처겸(安處謙) 의 난으로 사림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1534년(중종 29)에는 당시 경연청 사경(司經)으로 있던 이준경과 검토관 구수담(具壽聃)의 말을 듣고 흔들렸다. 이준경과 구수담은 안처겸의 난에 처벌된 사람 중 억울한 사람을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안처겸은 사림의 한 사람으로 현량과에 급제했다가 취소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서 향도계를 만들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안처겸을 모함해 자신들을 죽이고 새 왕을 옹립하려 했다며 잡아다 처형했다. 이때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처벌되었다. 중종은 기묘사화와 안처겸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사사하고 내친 것을 내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준경과 구수담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술을 내려 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3공을 비롯한 중신들이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이준경과 구수담이 기묘사화, 안처겸 사건의 피해자들과 인맥이 닿아 있어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이제 이 말을 들으니 수담과 준경 등이 홍문관의 의사가 아닌데도, 그들만의 사사로운 뜻으로 아뢰어 국론을 어지럽혔다.” 하면서 이준경과 구수담을 파직해 버렸다.

그래도 이준경은 중종을 바른 길로 이끌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관직에 다시 돌아와서는 중종에게 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1541년(중종 36) 4월 2일에는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부교리 이언적(李彦迪)과 교리 이황 등과 함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건의했다.

신들이 감히 전하께서 오늘날 힘 쓰셔야 할 열 가지 일을 아뢰겠으니, 전하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대저 열 가지 일이라 하는 것은 그 강(綱)이 하나이고, 그 목(目)이 아홉인데 참으로 한 강에 종사해 그 도리를 다한다면, 아홉 목이라 하는 것은 행동의 도구요, 시행하는 방편일 뿐이니, 어찌 실행하기 어렵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4월 2일

여기에서 한 가지 강은 중화(中和)이고, 아홉 가지 목은 궁금(宮禁)을 엄하게 할 것, 기강(紀綱)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가려 쓸 것, 제사(祭祀)를 삼갈 것, 백성의 고통을 돌볼 것, 교화(敎化)를 밝힐 것, 형옥(刑獄)을 삼갈 것, 사치(奢侈)를 막을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등이다. 1강은 도학을 연마하는 것이고, 9목은 현안으로 1강이 잘되면 9목은 저절로 잘된다는 의미이다. 이준경 등은 여기에 덧붙여 말했다.

“전하께서는 성학이 지극하지 못함을 아셔서 더욱 정일(精一)한 공부를 하시고, 남을 책망하지 마시고 자신을 책망하시며, 밖에서 찾지 마시고 안에서 찾으시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속이지 마시고 혼자 있을 때를 삼가시는 실제를 일삼으소서.”

이준경은 이황, 이언적과 같은 도학자들과 함께 중종에게 솔선수범해서 도학을 공부하라고 압력을 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도학을 왕의 상투 끝에 올려놓은 격이다. 중종도 “이제 이 상소를 재삼 보건대, 1강과 9목이 다 도리에 맞으니, 더욱 살펴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겠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1강 9목소는 사림의 도학정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재 등용에 공평함을 잃지 않았던 이준경

사화가 빈번한 혼돈의 시기에서도 사림이었던 이준경은 여러 왕을 거치며 조정에서 크게 쓰였다.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 자신이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재를 등용할 때도 치우침 없이 공평함을 잃지 않는 강직함과 인재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인재 등용에 대한 공평함을 드러낸 예는 1542년(중종 37) 1월 이준경이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성균관 공천(公薦)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차자를 올린 데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공천을 하는 것은 사사로운 청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 공천의 영(令)이 내린 것을 한번 듣게 되면 앞을 다투며 뛰어나와 황사(성균관)로 모여들어 마치 저자처럼 되며 공천의 대열에 끼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공천을 의논할 적에 있어서도 차분하고 겸손한 선비를 가리지 않고 단지 현재 있는 명목(名目)만 기록하는데, 윗머리에 들어 있는 사람이 자연히 공천의 첫 번째가 됩니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오직 현관(賢關, 성균관)에 의존하는 것인데, 국가에서 이런 무리들을 배양(培養)해 놓았다가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전조(銓曹)를 담당한 사람들은 또한 공천이란 명칭을 빙자해 도리어 사정(私情)을 쓰는 구습(舊習)만 부리고 있습니다. 폐단이 이토록 극도에 달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종실록》 권97, 중종 37년 1월 18일

또한 명종 대에는 권신 이기(李芑)의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준경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이기가 무인들의 뇌물을 많이 받고,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첨사(僉使), 만호(萬戶) 등의 자리가 비면 그들의 명단을 적어 정청(政廳)으로 보내어 이들을 주의(注擬)하게 했다. 그러나 이준경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이기가 앙심을 품고 이준경을 무고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1554년(명종 9) 이조 판서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찾아와 인사 문제로 부탁을 하자 “왕자가 사대부 집에 드나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며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올라왔을 때 이를 삭제해 두고두고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은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오르자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그릇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며 명단에서 지워 버렸다. 조선 시대 최고 엘리트 코스가 홍문관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실로 공평하고 절도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도 이준경은 자신의 아들들을 요직에 앉히려는 조정 중신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방계인 선조(하성군 이균)를 추대한 일은 이준경이 인물을 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 준다. 명종의 아들이 일찍 죽어 후계자가 없자 조카들 중에서 정하기로 했는데, 명종이 하성군을 총애하니 하성군을 후계로 삼게 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훗날 명종이 승하하고 하성군을 상주로 모셔올 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는데, 어떤 자가 이들을 녹공(錄功)하자고 했지만, 이준경은 말하기를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하고 재촉해 불태워 버리게 했다. 이준경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이준경은 병조 판서 시절 휘하에 있던 장수 방진(方震)이 사윗감으로 이순신(李舜臣)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추천했다고도 한다. 인재를 보는 눈이 가히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탁월한 혜안으로 붕당을 예언하다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재물을 탐하지 않던 청빈한 삶은 이준경에게 탁월한 혜안을 선물했다. 이는 특히 그가 죽기 전에 왕에게 올렸다는 유차(遺箚)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준경은 한 달이 넘도록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병세가 악화되자 의원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나의 수명이 이미 다하였다. 어찌 약을 먹어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임금에게 한 말씀 올리고 싶을 뿐이다.” 했다. 그리고 말을 받아 적게 해 왕에게 올렸다.

“흙 속에 들어가는 신 모(某)는 삼가 네 건의 일을 갖추어 유언을 올리니,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살펴 주소서.”로 시작되는 유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왕은 무엇보다 학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해야 합니다.
넷째,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넷째의 붕당에 관련한 문제 제기이다. 그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해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를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대언(高談大言)으로 붕당을 짓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執政)하게 해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해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곡 이이와 정철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했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이옵니다.”

그들은 선조에게 글을 올려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동인과 서인으로 당이 갈라지고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준경의 말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 어찌 탁월한 혜안이 아니랴. 시국관의 차이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립이 심해져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정쟁이 심해지게 마련이다. 선조 대의 초기 당쟁은 명종 대의 신·구 대립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당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이이는 동·서 분당의 와중에서 이를 보합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혼돈의 시기에는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준경은 중용과 신중함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마침내 자신의 성리학적 정치 이념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때로는 권신이나 대신들의 주장을 누르고 때로는 사림의 과격한 주장을 견제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문정왕후나 윤형원과 같은 권력자와도 타협하면서 중용의 정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또한 붕당의 폐해를 미리 간파하고 걱정한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따라 무리를 짓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또 하나의 재상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