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학궤범
9권 3책. 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 성현(成俔)을 비롯하여 유자광(柳子光)
·신말평(申末平) ·박곤(朴棍) ·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이다.
당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된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파손 ·소략(疏略)되고,
세종(世宗) 이후의 성악유법(聲樂遺法)이 결폐(缺廢)되는 감이 있으므로, 이 책을 지어
임금께 바친다고 하였다. 편찬자들 중에서도 성현은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맡았던 만큼
음악이 따르는 궁중의 전례(典禮)에 실제로 참여하여 음악에 정통하였으므로,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 책에는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처용가(處容歌)》, 《여민락(與民樂)》
《봉황음(鳳凰吟)》, 《북전(北殿)》, 《문덕곡(文德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의 가사가 한글로 정착되어 실렸으며, 궁중의식에서 연주하던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에 관한 여러 사항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고, 그 밖에도
악기 ·의상 ·무대장치 등의 제도, 무용의 방법, 음악이론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가사의 내용이 주가 된 책이 《악장가사(樂章歌詞)》이고, 음악의 곡조를 위주로 한 것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임에 비하여 《악학궤범》은 음악의 이론과 제도 및 법식(法式)을
주로 다루어 이 방면의 연구와 이해에 귀중한 문헌일 뿐만 아니라 고려악사(樂史)를
아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을 보면, 1책에는 권1에 악리(樂理)와 용법을 다루어 육십조(六十調) 등을 설명하였고,
권2에 아악진설도설(雅樂陣說圖說) ·속악진설도설(俗樂陣說圖說), 권3에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高麗史樂志唐樂呈才)와 고려사 악지 속악정재(高麗史樂志俗樂呈才)를 해설하였다.
2책에는 권4에 시용당악정재도설(時用唐樂呈才圖說), 권5에 시용향악정재도설(時用鄕樂呈才圖說),
권6에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을 싣고 있다. 3책에는 권7에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
권8에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 ·연화대복식도설(蓮花臺服飾圖說)
·정대업정재의물도설(定大業呈才儀物圖說)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 및
둑제소용(纛祭所用)의 궁시 ·검 ·창에 대한 설명, 권9에 관복도설(冠服圖說) ·무동관복도설
(舞童冠服圖說)과 둑복(纛服) 및 여기복식도설(女妓服飾圖說)을 수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에 있던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타버렸으나 이 책만은 되찾아 1610년(광해군 2)에
복간되고, 그 후 1655년(효종 6)과 1743년(영조 19)에 각각 중간되었다.
1933년에는 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이 책을 영인(影印) 간행하였다.
이 땅의 마지막 왕조국가인 조선은 모든 국가제도와 문물을 유가(儒家)사상에 바탕한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에 기초하여 출발한 나라였다.
인(仁)을 바탕으로 한 유가의 사상에서 예(禮)와 악(樂)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왕조의 국시(國是)는 바로 이 예악으로 집약되었다. 예악에서 예는 말 그대로
예의범절을, 악은 음악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예와 악에는 인간의 가치를 최고로 하는
귀중한 형이상(形而上)의 상징성과 의미의 세계가 담겨있다. 바로 이 상징성과 의미는 결국
예악정신의 요체가 된다.
예는 인간사회의 바른 질서를 의미한다. 하지만 질서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은 물론
모든 삼라만상 사이에도 존재한다. 질서의 존중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자연이 지켜야 할
근본 도리의 하나이다. 인간세계의 질서가 깨지면 인간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또한
그 삶은 고달파질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가 파괴된다면 삼라만상은 제 위치를 잃으면서
황폐화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질서를 상징하는 예는 예악정신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형이상의 세계였다.
악은 인간사회의 조화, 곧 화목을 의미한다. 물론 이 조화 역시 인간과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
사이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조화롭고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도 서로 조화와 화목의 세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이러한 조화와 화목의 세계가 무너지면 위에서 언급한 바의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찾아오게
된다. 따라서 화목과 조화를 상징하는 악도 예악정신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형이상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고대 유학의 세계는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음(陰)과 양(陽)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모든 생물은 음과 양의 법칙을 따른다. 음양의 법칙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밀고 당기면서 질서와 조화를 창조한다. 어느 한편이 강하여 다른 한편을
누르면 당연히 질서와 조화는 깨지고 만다. 음과 양은 서로를 존중한다.
이 둘은 누가 앞이고, 누가 뒤인지를 다투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바람직한 상생(相生)의
삼라만상 세계를 끝없이 이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예는 음이고, 악은 양이다.
위 음과 양이 지닌 위와 같은 형이상의 상징과 의미의 세계를 인간 사회로 좁혀보자.
인간사회에서 바른 예의범절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질서만이 강조되고 질서 속에
조화가 없으면 딱딱하고 서먹서먹한 세상이 된다. 즉, 조화가 질서 속에 담겨 있어야
부드러움이 녹아난 더욱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반면에 조화만 있고 질서가 없는 인간사회는 부드러우나 규율이 서지 않아 일의 앞뒤와 옳고
그름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살맛나는 바른 인간세상의
형성과 지속을 위해 질서와 조화는 종이의 양면처럼 하나가 되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한다.
바로 위와 같은 바람직한 형이상의 상징과 의미의 세계가 예악정신이 추구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예악정신이 가득 찬 이상국가의 구현을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갖가지 국가적인 의례(儀禮)와 음악이 지극히 존중되었다.
특히 음악은 소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이기 때문에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음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조선왕조 건국 이래로 음악은 국가의 정책적 관심이 집중된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많은 음악의 창제(創製)로 결실을 맺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왕은 세종이었다. 그는 많은 곡을 지으면서 대동정신(大同精神), 즉 "백성과 같이 즐기자"는
뜻이 담긴 「여민락(與民樂)」을 직접 작곡하여 이를 널리 전파했고, 박연(朴堧, 1378~1458)의
도움을 받아 여러 뛰어난 음악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에서 중시되었던 '예악'에서의 '악'은 모든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악에 담길 수 있는 음악은 특별히 선별된 음악이었다. 즉, 감정을 억제하고 꾸밈이 없는
차분한 흐름으로 이성에 호소하는 음악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담아 자유분방한
꾸밈과 흐름으로 혈맥을 뛰게 하는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예악정신을 담은 음악을 좋은 음악, 혹은 바르고 아정(雅正)한 음악으로 보아
이를 아악, 정악(正樂), 대악(大樂)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만이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음악이자 젊은이들의 교육과 국가의 이상 구현에 합당한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음악에 관한 생각은 "바른 음악은 인간을 바르게 한다"는 고대 희랍(希臘)의
에토스(Ethos)에 기초한 음악관과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은 예악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왕명에 따라 발간된 악서(樂書)이다.
조선왕조가 예악정신에 기초한 이상국가의 틀을 설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악학궤범』의
출현은 꿈도 꾸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악학궤범』 출간의 사상적 배경은 위에서
소개한 예악정신에 기초한 음악관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대표저자 성현(成俔)의
『악학궤범』 서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성현은 예악정신에 기초해서 음악의
생성(生成), 중요성, 효용성, 국가적 필요성 등을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면서
서문에서 잘 설파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이와 함께 예악정신의 입장에서 『악학궤범』
발간의 명분, 곧 철학적 당위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음악 실제를 위한 실용적인
입장에서 『악학궤범』은 왜 발간되어야 했을까?
조선의 건국 후 태조 때부터 이미 음악은 국가적 사업으로 중시되었다. 태조는 음악을 관장할
전악서(典樂署)와 아악서(雅樂署)1)를 두었고 이후 태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이
만들어졌으며 음악과 직접·간접으로 관련된 의례와 절차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정비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거의 모든 의례와 음악은 세종시대에 이르러 보다 완전하게 체계를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도 세종은 새로운 음악을 많이 만들었고, 그 무렵에는 악기제작도
아주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세종의 음악 창작은 예악정신에 기초하여 이룩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업적이었다.
음악의 창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악정신의 중요한 배경이 된 고대 중국의
『예기(禮記)』에 의하면 음악을 짓는 일은 오로지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세종은 성군(聖君)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지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국가적인 음악사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고, 이러한 과업은 세종의 아들 세조에 의해서 단절 없이 지속되었다.
조선왕조 519년간의 오랜 세월을 다스렸던 27인 왕의 행적을 다룬 '실록'에 악보가 수록된
것이 오직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인 사실에서 이 두 왕의 음악적 업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자연스럽게 증명이 된다. 그리고 이 두 왕이 추진했던 음악사업을 후대에
이어받은 임금은 성종이었다.
성현(成俔)은 『악학궤범』 서문에서 세종과 세조의 음악적 업적을 크게 찬양하면서 성종을
앞 두 왕과 견주었다. 그에 의하면 성종은 세종과 세조의 음악사업을 이을 만한 능력을
지닌 성군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악적 과업을 이어가야 하는 마당에 안타깝게도
당시 장악원(掌樂院)의 음악 관련 문헌과 악보 중에는 없어진 것이 많았고, 남아있는 것
중에도 낡은 것과 잘못된 것이 있어서 이를 다시 보완하고 손질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단순히 음악 및 음악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하여 남기는
출판사업의 하나가 아니었다. 이는 그보다 훨씬 크고 원대한 국가경영에 필요한 예악정신의
구현을 위한 실제적 방법의 하나였다. 그 까닭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예악정신의 계승과
이의 구현은 당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이어가야 할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요, 과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보존 기술을 갖추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음악은 연주 후에 곧 사라지고
마는 무형의 존재였다. 그러나 기록을 통하여 후대로 잘 전승 및 보존한다면 언제든지
원상 복원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악학궤범』은 음악의 유실(遺失)에 대비하여
발간된 문헌이었다.
1392년에 조선왕조가 건국되었고, 『악학궤범』이 발간된 해는 1493년이므로 『악학궤범』은
건국 후 100년이 조금 지나 발간된 책이다. 여기에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시의적절함이
묻어나 있다. 바로 예악정신의 음악적 실천이 한 세기를 이어왔고, 이의 지속적 계승을 위한
성종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악학궤범』 발간의 필연적인 역사적 배경의 하나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악학궤범』은 사실 성현 한사람이 지은 악서는 아니다. 당시 발간에 함께 참여한 이는
유자광(柳子光), 신말평(申末平), 박곤(朴棍), 김복근(金福根) 등이었다. 성현 외 이 4인이
『악학궤범』 발간에 큰 공헌을 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현이 지닌 음악적
재능과 경험 그리고 그의 박학함과 한문 실력에 근거해 『악학궤범』은 주로 성현에 의해서
씌어졌을 것으로 간주된다.
세종이 박연을 만나 음악에 대한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처럼 성종도 성현을 만나
『악학궤범』이라는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악학궤범』은 발간 이후 400년 이상의 오랜 세월 동안 조선왕조 최고의 국가적 음악지침서로
애용되고 활용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크게 쓰일 수 있었던 까닭은 광범위한 음악적 내용을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잘 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체제로 어떠한 내용이 『악학궤범』에 담겨 있을까?
『악학궤범』은 목판본으로서 모두 9권 3책의 체제로 되어있다. 모두 9장으로 된 내용이 3권의
책에 담겨있는 것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의 역사를 다룬 문헌이 아니어서 서술적인 문체가 아니라, 음악적 내용을
담기 위한 기술적(記述的)인 문체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성현은 여러 노래의 가사를 그대로 한글로 적었다. 당시의 사정에서 왕명에 의한
관찬(官撰)의 문헌이 한글로 그 내용의 일부를 담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된다.
이외에 성현은 악기의 크기와 색깔 및 재료 등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기록하면서 필요에
따라 그림까지 넣어서 악기의 모양을 잘 알 수 있게 기술하였고 악기의 줄 고르는 법,
기본 연주법 등도 그림과 글로 자세히 설명하였다.
무용 항목에서는 무용수의 정확한 수와 반주음악의 절차, 기본적 동작 등도 연주되는
형세대로 사실적으로 적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무용에 필요한 악기와 복식 그리고 소도구
등의 제작법까지도 기술체로 담았다.
이렇게 성현은 당시의 음악적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술적인 체제로 『악학궤범』에 담았다.
책의 편집 및 기술체제가 아무리 뛰어나도 좋은 내용이 그 책에 담기지 않았다면 그 책의
가치와 의미는 감소되고 만다. 그러면 위와 같은 편집체제와 기술적인 문체로 된
『악학궤범』에는 과연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을까?
성현은 먼저 서문에서 위에 소개한 『악학궤범』 출간의 명분과 그 배경을 먼저 밝힌 후
당시의 음악을 위한 이론으로 그 처음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 음악에 쓰이는 음의 산출법,
중국 음악의 음계와 조 이론, 한국의 음계와 조 이론, 그리고 팔음(八音)을 자세히 다루었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상징성과 의미도 함께 소개하였다. 즉, 그는 단순히 음악이론만을
담지 않고 음악사상적이고 음악미학적인 면도 함께 담아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궁중의 여러 제사와 잔치에 쓰이는 아악과 속악(俗樂)의 악기 배치법과 무용수의
배치법 그리고 제사와 잔치의 절차에 따른 음악과 무용의 용법, 실제 음악의 악보 등도
상세히 다루었다. 이렇게 주로 음악적인 문제를 다룬 후 그는 『고려사(高麗史)』의 악지(樂志)에
담긴 궁중무용과 성종 당대의 궁중무용 연주법 및 절차 그리고 그 반주음악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61종의 악기, 각종 소도구와 소품 그리고 음악가와 무용수들의 의상과 모자와 관련된 제반사항
즉, 모양·색깔·재료·제조법 등 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후반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되었다. 한마디로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모든 사항을 내용으로 담았다. 당시로서는 성현의 말처럼 과연 수록하지 않은 것이
없는 무불비재(無不備載)의 악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의 음악을 위한 본보기가 되는
책인 궤범(軌範)에 필요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된 『악학궤범』이 되었다.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는 음악 또는 음악과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음악과는 관련이 아주 적거나 전혀 관련이 없는 악기, 무용, 음악이나 무용에 사용되는
소도구와 소품, 의상이나 모자 그리고 그 제작법 등도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 게다가 책의
제목도 음악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악학궤범'이라 하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음악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과 달랐다. 그 개념의 범위가 오늘날보다 훨씬 넓어서
악(樂)·가(歌)·무(舞), 즉 노래와 기악 그리고 무용 전체를 음악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음악을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종합무대예술과 같은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밖에도 악기 등 여러 음악·무용과 관련된 주변사항까지도 음악의 범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음악'이라는 말 대신에 '악(樂)'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그래서 위와 같은
여러 사항들이 악의 개념으로 한 곳에 담겼고, 책명도 『악학궤범』이라 했던 것이다.
『악학궤범』은 조선왕조의 예악정신을 담아 집대성한 악서이지만 악전(樂典)이나
음악사전은 아니다. 말 그대로 『악학궤범』은 음악의 유실을 대비한 모범적 궤범이요,
지도서요, 안내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실을 대비한 『악학궤범』의 발간 의도는
아래와 같이 복간을 통해 몇 차례 증명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전화의 여파로 인해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절의 음악적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악기와 악보·악서가 불타 없어지고 또 많은 음악가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그 시절에도 예악적 음악은 계속 요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회복은
어려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 속에서 천행이라고나 할까? 불탄 자리에서 『악학궤범』이
건져졌다. 그래서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해에 궁중의 제사음악과 이에 수반된
무용이 어느 정도 복원되었고, 2년 뒤에는 『악학궤범』이 복각되었다.
그 후 인조시대부터 음악이 쇠퇴해지자 1655년(효종 6)에 『악학궤범』이 다시 간행·반포되었고,
이후 1743년(영조 19)에도 낡은 악기를 보수할 목적에서 왕명으로 『악학궤범』은 또
복각되었다.
음악의 유실을 대비한 성종의 『악학궤범』 발간 의도가 옳았음과 그 역사적 효용성이 이러한
사실에 의해 여실히 증명이 된 것이다.
이후 『악학궤범』은 20세기 들어서 1933년에 다시 영인본으로 복각된 뒤 1989년 국립국악원에
의해 영인된 복각본을 포함해서 모두 6회 영인되었고, 이외 1종의 등사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현재 국내에는 광해군·효종·영조 때 복간된 3종의 『악학궤범』이 전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일본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 제일 오래된 임진왜란 이전 판이 전하고 있다.
『악학궤범』은 성종을 전후로 한 음악과 오늘날의 음악 일부와의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오늘날에도 옛 음악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만큼 『악학궤범』은
우리 음악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다.
천년 하고도 수백 년을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백제의 가요 「정읍(井邑)」과 그 뒤의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완전한 한글 가사를 전하고 있는 문헌은 오직 『악학궤범』뿐이다.
이외에도 많은 국문학 및 국어학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악학궤범』은 무용, 복식, 음악과 무용 공연에 쓰이는 소품과 소도구의 연구
등에도 필수적인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악학궤범』은 우리 음악, 국어국문학 연구자들은 물론 기타 위 분야와 관련된
여러 연구자들에게 필독서의 하나가 된다.
『악학궤범』은 문화사적으로도 뛰어난 기록 문화유산의 하나다. 이 책에 인용된 여러 문헌적
정보의 정확성과 신빙성은 아주 높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왕조 예악정신의 최고 집대성의
하나인 『악학궤범』이 지닌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