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딸깍발이

水西散仁 2018. 3. 15. 11:01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 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壯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이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映彩)가 돌아서, 무력(無力)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쳐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멜 대로 꿰맨 헌 망건(網巾)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道袍)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커녕 곁눈질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 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말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이나마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儒敎典籍)을 얼음에 박 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게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室內)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 염치(廉恥)가 있을 뿐이다. ()과 의()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배울 것이요,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도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端的)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志操),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明人)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만든 것은 어쭙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氣槪), 사육신(死六臣)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三學士)'딸깍발이'의 전형(典型)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圃隱)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閔忠正)도 그다.

 

국호(國號)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의 승낙을 얻어야 했고, 역서(曆書)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諡號)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直言)으로써 지존(至尊)에게 직소(直訴)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族屬)인 유림(儒林)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壬亂)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에 박도(迫到)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蜂起)한 의병의 두목(頭目)들도 다 이 '딸깍발이' 기백의 구현(具現)인 것은 의심 없다. 구한 말엽 단발령(斷髮令)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上書)를 올리어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라고 부르짖으며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迷惑)하기 짝이 없었지마는, 죽음도 개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 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 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적지 않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 대계(百年大計)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姑息之計)에 현명하다. 염결(廉潔)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愚昧)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剛直)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보수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 : 특별히 부르는 호칭)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나무로 만든 신. 앞뒤에 높은 굽이 달렸으며 나무를 파서 만듦]을 신고 다녔으며[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 드러남 /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음을 이르는 고사성어는 ? 각주구검(刻舟求劍) : 배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뱃전에 빠뜨린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가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고사(故事)에서,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딸깍발이라는 이름의 유래].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일본의 나막신.]'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남산골 샌님의 외양이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움을 의미함]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딸깍발이의 명칭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남산골 샌님의 궁상스러운 삶에서 그것은 작은 일부분이라는 의미].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곤궁한 상태, 또는 그 모습]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 남산골 샌님의 초라한 모습 -> ''에 해당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욕망', '영광' …… 등 비슷한 뜻을 반복한 것은 일종의 강조라고 할 수 있으며, 야유하는 태도도 담겨 있다는 점에 유의한다. / 조선 시대 양반 계급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남 / 유교적 공명주의, 입신양명 사상]),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아주 할 줄 모르는 솜씨]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 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서른 날에 아홉 끼니 밖에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집안이 매우 가난하게 지냄을 이르는 말]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壯觀)이 아니다.[반어적 표현으로, 딸깍발이는 외모나 옷차림이 옹색하고, 작가는 반어적 관점에서 딸깍발이의 외모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을 통해 딸깍발이에 대한 독자의 희극적 반응을 유도함] - 남산골 샌님의 어려운 생활상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이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 : 이성과 지혜. 또는 본능이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하는 슬기)만이 내발릴 대로[마음이나 태도를 겉으로 드러나게 하다]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映彩 : 환하게 빛나는 고운 빛깔)가 돌아서[ '개가 풀리다'는 졸리거나 술에 취해 눈의 정기가 없어지는 것을 이른다. 따라서, 눈이 오히려 반짝인다는 뜻], 무력(無力)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쳐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물건의 배가 부르지 않고 번듯하다] 버스러진[벗겨져서 해어지다]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해학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으로 외양 묘사를 통한 인물의 성격 제시, 고지식한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함] - 남산골 샌님의 초라한 겉모습

 

이러한 화상[얼굴의 속어로 어떤 사람을 마땅치 않게 여겨 낮잡아 이르는 말]이 꿰멜 대로 꿰맨 헌 망건(網巾)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갓의 밑둘레 밖으로 넓게 바닥이 된 부분 위의 우뚝 솟은 부분]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 복날)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워낙 가난하여 추울 때도 여름 옷을, 더울 때도 겨울옷을 입는 일이 종종 있다 /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 무관심].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道袍)나 중치막[소매가 넓고 길이가 길며 앞은 두 자락. 뒤는 한 자락으로 된. 옆이 터진 네 폭으로 된 웃옷, 옛날에 지체가 높으나 벼슬하지 않은 양반이 입었음/ 포의지사]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가슴]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바지·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행동이나 말이 방정맞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커녕 곁눈질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 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말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외모나 풍채는 별 볼일 없지만, 걸음걸이나 태도는 선비의 의연함을 지키려는 모습이다] - 남산골 샌님의 옷차림 -> ''에 해당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 : 헤진 옷과 부서진 갓. 곧 구차한 차림새를 말함)이나마 의관(衣冠)을 정제(整齊 : 정돈되어 한결같이 가지런함)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儒敎典籍)을 얼음에 박 밀듯이[능통하게 외우는 것 / 맹목적이고 앞뒤를 가리지 않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게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하고 많은] 날 그 실내(室內 : 아내)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淸廉介潔 :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으며, 성질이 곧음)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 염치(廉恥)가 있을 뿐이다. ()과 의()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배울 것이요, 악비(岳飛 : 중국 남송의 무장)와 문천상(文天祥 : 중국 남송의 충신)을 본받을 것이다[백이, 숙제, 악비, 문천상 등은 모두 중국 고대의 사람들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인과 의를 위하여 산 사람들의 예를 든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 : 음탕함과 사악함)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 : 돈을 꾸어 주기도 하고 꾸어 쓰기도 함)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도 없다. - 남산골 샌님의 초라한 삶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결코 전혀 없다]. 동지 설상(雪上)[동짓달 눈 위] 삼척 냉돌[사방이 석 자인 작은, 불기 없는 찬 온돌방]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남산골 샌님의 자존심을 보여 주는 예화]

 

하고 벼르더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강직함, 품위, 지조를 지키려는 선비의 정신]을 단적(端的)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겨를 태우는 불]을 안 쬔다[양반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자기 체면만은 그대로 지키려고 애를 쓴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지조(志操),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 남산골 샌님의 성격 혹은 신조

 

실상, 그들은[남산골 샌님] 가명인(假明人 : 사대주의에 젖어 중국 명나라 사람인 듯이 처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사실, 딸깍발이들은 주체성 없이 명나라를 숭상하여 명나라의 모든 것을 모방하려 했던 사대주의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를 소중화(小中華 : 작은 중국)로 만든 것은 어쭙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우리 나라 ~ 허물이 아니었다 : '소중화'란 작은 중국을 의미하는 말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죄는 어쭙지 않은 관료들에게 있는 것이지, 딸깍발이 정신을 가진 자들의 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氣槪), 사육신(死六臣)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 때 청국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주전론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가 참혹한 죽음을 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지칭한다)'딸깍발이'의 전형(典型)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圃隱 : 정몽주)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閔忠正 : 조선 말기 고종 때의 문신인 민영환의 시호. 을사 조약을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함)도 그다.

 

국호(國號)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의 승낙을 얻어야 했고[당시의 외교적 관례], 역서(曆書)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諡號 : 제왕·경상·유현 등의 공덕을 기리어 죽은 뒤에 주는 이름)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의 덕택일 것이다[샌님의 혼은 딸깍발이의 의기와 기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민족의 사회와 역사의 주체성 확립에 힘써 외세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지킨 힘의 원천이 되었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直言)으로써 지존(至尊 : 지극히 높은 지위. 제왕의 지위. 제왕)에게 직소(直訴)한 것도[샌님의 의기와 강직한 성품] 이 샌님의 족속(族屬)인 유림(儒林)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壬亂)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 : 아침 저녁, 위급한 시기나 상태가 절박함.)에 박도(迫到 : 가까이 닥쳐옴. )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蜂起)한 의병의 두목(頭目)들도 다 이 '딸깍발이' 기백의 구현(具現)[샌님의 의기와 강직한 성품]인 것은 의심 없다. 구한 말엽 단발령(斷髮令 : 1895년에 종래의 상투 풍속을 폐하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上書 : 웃어른에게 글을 올림. 또는 그 글)를 올리어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개화기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최익현이 올린 상소문에 있는 구절이다.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표출한 것으로, 효경(孝經)에 있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의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자학을 지키고 사학인 천주교를 물리치자던 정신 표출./ 샌님의 의기와 강직한 성품]라고 부르짖으며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迷惑 : 무엇에 홀려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함,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 헤맴)하기 짝이 없었지마는[단발령이 지니는 의미도 모르고 덮어놓고 반대하였으므로], 죽음도 개의하지[마음에 두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義氣) : 정의감에서 생기는 기개]야말로 본받음 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이중 부정을 통한 강조]. - 남산골 샌님의 의기와 강직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 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적지 않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남산골 샌님의 훌륭한 점 -> ''에 해당

 

현대인은 너무 약다[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인 현대인에 대한 비판 / ].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 대계(百年大計 : 먼 앞날을 내다보고 세우는 원대한 계획)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일을 엉터리로 하여 남의 눈을 속이는] 고식지계(姑息之計 : 당장 편한 것만 취하는 계책. 미봉책(彌縫策)/ 동족방뇨(凍足放尿 : ‘언 발에 오줌 누기란 뜻으로, 어떠한 사물이 한때 도움이 될 뿐, 바로 효력이 없어지고 더 나빠짐을 일컫는 말), 하석상대(下石上臺 :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괸다는 뜻으로,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둘러맞춤을 이르는 말.)에 현명하다. 염결(廉潔 : 청렴하고 결백함)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청렴하고 결백한 일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 득실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다]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愚昧 :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 현대인들에 대한 충고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剛直)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딸깍발이의 청렴 미덕에 대해서 필자는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딸깍발이 정신의 계승 -> ''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