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차(茶)와 사람 ① 다성(茶聖) 육우.② 고운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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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차 마시기 좋은 이는 검소한 덕을 갖춘 사람”
차(茶)와 사람 ① 다성(茶聖) 육우
중국 파·촉 지역에서 발원한 차(茶) 문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가장 고대의 기록은 춘추시대(BC 8~BC 3세기)에 시작된다. 『안자춘추』에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이었을 때 거친 밥과 세 꼬치의 구운 고기, 계란 5개, 차 나물을 먹었을 뿐이다”고 했다. 차를 음식, 즉 나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거는 기록을 훨씬 앞선다. BC 5000년께 차가 음식 재료로 이용된 흔적은 1974년 저장(浙江)성 위야오(余姚)의 허무두(河姆渡) 유적지에서 발굴된 차나무 뿌리에서도 확인된다. 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선 다양한 유물이 발굴됐다. 특히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 인근에서 열을 지어 심어진 차나무 뿌리가 발굴돼 차의 역사를 선사시대로 끌어올렸다.
1972년 발굴된 창사(長沙)의 마왕퇴 서한 2·3호 묘에서 ‘고사(笥)’라고 쓴 목패(木牌)가 출토된 것도 의미 있다. 어떤 연구 보고서엔 중국 학자가 “고()는 가(檟,차의 별칭)의 이체(異體), 사(笥)는 대나무로 만든 상자다. BC 168년께 서한 시대에도 귀족 묘의 부장품으로 차가 쓰였음이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있다.
후한 초기 문헌 『이아(爾雅)』에도 차를 ‘도(荼)’라고 한 기록이 있다. 후한 허신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도(荼)는 고도(苦荼)인데 지금의 차(茶)다”고 말했다. 위(魏)나라 장집(張楫)이 편찬한 『광아』는 삼국시대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유행했던 음다법이 기록돼 있다.
차는 불교와도 융합됐다. 선종의 6조 혜능(638~713) 이후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속이 널리 퍼진 것으로 짐작된다. 광둥(廣東) 지역을 중심으로 선풍을 드날렸던 혜능의 제자들은 수행할 때 차를 마셨는데, 이들이 수행했던 광둥·장시(江西) 지역은 차의 주산지였다.
당나라 중기에 차는 민간까지 확산한다. 그리고 당의 문인 육우(陸羽·733~804)가 차 문화를 집대성한다. 육우는 성당(盛唐) 때 인물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시후(西湖)의 강가에 버려졌다. 그를 거둔 용개사 적공(積公)은 차를 즐기는 승려였는데 그렇게 그는 차를 처음 접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육우란 이름은 뒤에 스스로 지었다. 성인이 돼 주역 점을 쳤는데 건괘가 나와 풀어 보니 “큰 기러기가 서서히 땅에서 날아오른다”는 뜻이었다. 이때부터 이름을 육우라 스스로 지었다.
그는 24세 때 안녹산의 난(755~763)이 일어나 여러 지방을 다녀야 했다. 가는 곳마다 샘물을 맛보면서 차에 적당한 물인지를 품평했는데, 이때 그가 품평한 명천(名泉)들의 물은 아직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 천하를 주유하면서 많은 사람과 교유했는데, 특히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훙저우(洪州)에서 만난 교연(皎然)이 있다. 교연은 시승(詩僧)이라 칭송되며 안진경(顔眞卿·709~785)·황보증(皇甫曾·?~?)·유장경(劉長卿·709~780) 등과 어울렸던 당대의 문사다.
육우와 교연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육우는 교연의 수행처인 묘희사(妙喜寺)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내왕하면서 차와 시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교연이 차 밭을 가꾸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차나무의 생육과 제조 과정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들의 교유가 깊어진 어느 해 가을, 국화를 감상하며 차를 즐긴 광경은 교연의 시 ‘구일여육처사우음다(九日與陸處士羽飮茶)’에 자세히 나온다. 육우도 화답시를 지었으련만 세상엔 교연의 시만 전해진다.
9일, 산승의 암자엔
(九日山僧院)
노란 국화가 동쪽 울타리에 활짝 피었네
(東籬菊也黃)
속인들은 흔히 술에 (국화를) 띄우겠지만
(俗人多泛酒)
누가 (국화 향이) 차 향을 돕는지를 알리요
(誰借助茶香)
9월 9일은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 중구일 혹은 중양절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은 중양절에 단풍이나 국화를 감상할 줄 알았다. 바로 이런 날, 교연의 암자를 찾았던 육우는 담연(淡然)한 풍류를 즐겼다.
동쪽 울타리에 만발한 노란 국화와 산중의 암자. 차를 즐길 최상의 조건이었다. 세상 사람은 국화를 술잔에 띄워 속된 풍류를 즐기지만 이는 은근한 국화 향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 거기서 조용하고 담담한 풍류를 완상하기란 어려울 거라는 게 교연의 생각이었다. 차는 원래 품성이 그렇다. 공명(空名)에 귀 밝은 자들이 향유하기엔 너무 담담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래서 육우는 “차를 마시기에 좋은 사람은 성의 있는 행실과 검소한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육우는 단양(丹陽) 여행길에 평생의 지기가 된 황보증을 만난다. 우정은 각별했다. 한번은 육우의 명성을 들은 창저우(常州) 자사가 그의 브랜드인 양선차(陽羨茶) 만량을 왕실에 올리라고 명했다. 육우에겐 자신의 차가 처음 황실로 진상되는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그런데 황보증이 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치고 단걸음에 달려간다. 아픈 벗을 지키며 지성으로 보살피고 차를 마시게 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은 물론이다.
황보증은 막역한 벗이자 당대 최고의 문사인 안진경을 육우에게 소개한다.
황보증은 ‘송육홍점산인채다회(送陸鴻漸山人採茶回)’를 지어 깊은 산으로 차를 따러 가는 육우의 모습을 그렸는데, 차에 대한 육우의 열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뭇 산봉우리는 은자를 기다리고
(千峰待逋客)
향기로운 차, 다복하게 자라네
(香茗復叢生)
차 따는 곳이 깊은 곳임을 알고
(採摘知深處)
고요한 산, 홀로 가는 것이 부럽구나
(煙霞羨獨行)
그윽한 기약을 한 산사는 고요하고
(幽期山寺遠)
거친 밥, 맑은 물뿐이라네
(野飯石泉淸)
…
천하의 명필 안진경은 육우의 벗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안진경이 저장성 후저우(湖洲) 자사로 부임해 『운해경원(韻海鏡源)』을 편찬할 때 육우를 참여시켰고 문사들을 불러 연회할 때마다 육우를 불러 그의 차를 소개했다. 이들의 우정은 저산(杼山)의 묘희사 근처 ‘삼계정(三癸亭)’을 세울 때도 드러난다.
후인들은 이들의 우정을 기려 후저우의 삼절(三絶)로 칭송했는데 계축년, 계축월, 계축일에 완성됐다고 하여 삼계정이라고 했다.
육우는 764년 차의 이론을 정립한 『다경』을 저술해 중국의 차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해 체계를 세웠으며 차의 근원과 차 도구, 제다법, 찻그릇에 대한 참신한 기준을 제시했다. 차를 달이는 방법도 이론화하고, 정신을 맑게 하려면 차를 마셔야 한다는 음다의 준칙을 세웠다. 차의 역사를 수집했고, 차의 산지와 다도의 격식을 꼼꼼히 밝혔다. 그의 이러한 차에 대한 이론은 후대 차의 규범적인 준칙이 됐다. 오늘날 육우를 ‘다성(茶聖)’으로 칭송하는 이유다.
그가 만든 자다법(煮茶法)을 연마해 차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종전 파나 생강, 귤 등을 넣고 끓이던 것과 달리 차를 달일 때 소금을 넣어 차의 효능을 극대화했다. 그의 이런 음다법은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은 차의 몸이며 차는 물에 의해 색향기미를 드러낸다’는 만고의 진리는 육우가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다경』엔 또 ‘월주에서 나는 다완이 상품이다. 월주 다완은 차색을 돋보이게 한다’고 돼 있다. 이는 다완(차 전용 찻잔)의 중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다완의 예술미는 다탕의 완성도와 함께 꽃핀다.
또 ‘다완에 차를 따를 때 말발을 고르게 나눈다. 말발은 다탕의 아름다움이다’고 하였다. 화려하게 핀 말발은 다탕의 꽃이다. 육우는 차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차의 아름다움은 불과 물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그 이치를 알았던 차의 성인 육우는 자신이 만든 풍로에 원리를 새겼다.
‘손(巽)괘는 바람을 주재하고, 이(離)괘는 물을 주재하고, 감(坎)괘는 물을 주재한다. 바람은 불을 일으키고, 불은 물을 끓게 한다’.
차가 한반도에 언제 소개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선종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새로운 선지식을 찾아 당으로 간 구법승(求法僧)은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선종에 뜻을 둔 승려들은 장시로, 교학 승려들은 당의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으로 모였다. 신라의 구법승들은 대개 마조계의 문하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차와 다구를 가져왔지만 선종 도입 초기엔 차가 널리 퍼지지 않았다. 당시 교종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승려들 활동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7세기 전후에 들어온 차는 널리 퍼지지 못하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쓰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미미했던 차의 향기엔 불씨가 실려 신라 말 이후 차 문화는 큰 꽃을 피울 수 있게 됐다.
차 용어
-음다(飮茶): 차를 마시는 것
-자다(煮茶): 차를 달이는 법을 가리키는 당나라 용어. 시대마다 달라졌다. 송대는 팽다(烹茶), 점다(點茶), 명대는 전다(煎茶)였다. 현대엔 행다(行茶)라는 용어를 쓰는데 의미가 확장돼 차를 달일 뿐 아니라 내놓는 모든 절차를 가리킨다.
-차를 달이다: 차를 물에 넣어 우리는 것
-다탕(茶湯): 차를 우린 물
-말발(沫餑): 차의 거품
-다완(茶碗): 차 마실 때 쓰는 그릇
육두품의 비애, 감미로운 차향에 날려 보낸 최치원
차(茶)와 사람 ② 고운 최치원
당(唐)에서 이름을 날린 신라인 고운(孤雲) 최치원(857~?)은 한반도 초기 차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당 유학 시절, 그는 당시 지식인의 정신 음료였던 차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신라에 들어온 차는 처음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었다가 최치원의 시대엔 선진문물로 인식돼 귀족층으로 확산됐다. 왕실과 귀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던 차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었다.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으로선 차를 접하기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에서 돌아온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로부터 성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신라 말, 음다(飮茶) 열풍이 불었음을 의미한다. 차는 음다인(飮茶人)의 격조와 품위를 부여했다. 따라서 흥덕왕 3년(828) 당 사신 김대렴이 차 씨를 가져 온 것도 귀족 중심으로 차의 수요가 확산돼 있음을 보여준다. 흥덕왕은 지리산에 차 씨를 심어 큰 차밭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지리산이었을까.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없지만 해석의 실마리는 있다. 당에서 귀국한 후 지리산 옥천사(玉泉寺현 쌍계사)에서 수행했던 진감국사가 바로 흥덕왕의 스승이었다. 게다가 차는 불가에서 수행(修行)을 돕는 음료로 간주됐다.
이외에도 신라 유학생, 특히 당나라 관료로 진출했던 이들이 차를 즐겼다. 최치원도 차를 즐겼음이 『사신차장(謝新茶狀)』에서 확인된다. 내용은 이렇다.
“저는 오늘 중군사(中軍使) 유공초(兪公楚)가 처분할 일을 전하기에 처리했더니 차를 보내셨습니다. 생각건대 이 차는 촉(蜀)의 언덕에서 빼어난 기운을 받고 자랐으며, 수원(隋苑)에서 차 싹을 피운 것입니다. 비로소 (차를) 따는 공력을 다해 순수하고, 빼어난 맛을 갖추었으니 귀한 솥에 차를 달여, 향기로운 차를 옥잔에 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고요히 선승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가히 신선을 대접해야 할 차이거늘 뜻밖에 훌륭한 선물을 외람되게도 보내시니 매림(梅林)을 빌리지 않아도 절로 갈증이 멈추고, 훤초(萱草)를 구하지 않아도 근심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당시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고변(高騈821~887)의 종사관(서기)이었다. 유공초는 ‘황소의 난’ 평정에 나선 중군사(中軍使). 그가 부탁한 일을 잘 처리한 답례로, 최치원에게 촉의 수원에서 자란 귀한 차를 보냈다. 수원은 황실용 차밭이라 짐작된다. 그러기에 최치원은 ‘선승이나 신선을 대접하는 차를 받았다’고 했고, ‘귀한 솥에 차를 달여 옥잔에 담는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차가 갈증과 근심을 없애준다고 여겼다. 차를 마시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변화를 매 순간 관찰하여 이에 따른 즐거움을 노동(蘆仝795~835)은 『칠완다가(七碗茶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첫 잔은 입술과 목젖을 적시고
( 一碗喉吻潤)
둘째 잔은 근심을 없애주네
(兩碗破孤悶)
셋째 잔은 삭막해진 마음을 더듬어 오천 권의 문자를 떠오르게 하고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넷째 잔을 마시니 살짝 땀이 나는 듯, 일상의 불편한 일들이 모두 땀구멍 사이로 사라지네
(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盡向毛孔散)
다섯째 잔은 뼛속까지 맑게 하여
(五碗肌骨淸)
여섯째 잔을 마시니 신령한 신선과 통하네
(六碗通仙靈)
일곱째 잔은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스멀스멀 맑은 바람이 이는 것을 알겠구나
(七碗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노동의 이 시는 다시(茶詩)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후일 다시(茶詩)의 규범이 됐다. 육우의 『다경』이 차 문화를 집대성했다면 노동은 시 한편으로 세상을 평정한 셈이다. 최치원이 ‘절로 갈증이 사라지고, 훤초를 구하지 않아도 근심이 사라진다’고 한 표현의 원류는 『칠완다가』와 닿아 있는 것이다.
최치원이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있을 때 급료 지급을 요청한 『사탐청료전장(謝探請料錢狀)』엔 ‘다만 부모를 그리는 시나 읊으며, 바다 건너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본국 사신의 배가 바다를 건너간다 하니 차와 약을 사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함께 부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 말, 당의 차를 신라에 소개한 부류가 당의 관료로 진출했던 인사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차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최치원의 삶을 잠깐 풀어보자.
최치원은 사비로 당 유학을 떠났다. 가문을 건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골품제도가 엄격했던 신라에서 육두품인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12세 어린 나이에 상선을 탔다. 아버지는 ‘10년 내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가서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 힘쓰라’고 했다. 그의 비장한 각오와 노력은 『계원필경집』에 “다른 사람이 백을 (공부)하면 나는 천을 노력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 노력 덕에 유학 6년 만에 진공과에 합격해 금방(金榜 과거 합격자 명단)의 끝 자리에 이름을 걸 수 있었다. 도전은 계속됐다. 잠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라는 과거를 준비했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중도에서 포기한다. 그러다 선주의 율수현위가 됐지만 사정이 편치 않았다. 급료를 요청한 『사탐청료전장』에 ‘엄한 질책을 무릅쓰고 다시 궁한 사정을 아룁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환관의 전횡과 문벌세가의 파벌, 관리의 부패로 농민 폭동이 빈발했다. 최치원의 지위가 보장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 조정은 신라 출신 급제자를 하급관리나 변방 관리로 보냈다. 월급도 못 받고 말단 관리로 울분이 쌓인 최치원은 877년 율수현위를 사직했다.
그의 행로를 밝혀준 고변(高騈821~887)을 만난 것은 그 이듬해다. 그의 문객이 되어 관역순관(館驛巡官)과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됐으니 입신양명의 꿈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고변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라는 왕명을 받는다. 최치원은 서기로 따라가 출세작이 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다.
황소는 격문 중의 ‘세상 사람들이 죽이려 생각할 뿐만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논의한다’라는 대목을 읽다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앉았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어쨌든 황소의 난은 평정된다. 이 공으로, 최치원은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랐고, 황제에게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는다.
하지만 행운은 늘 짧고 아쉬운 것.
그는 28세에 당을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온다. 부모 봉양이 이유였지만 실제론 고변이 신선술에 빠져서였다. 만년에 더욱 오만해진 고변은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최치원은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3년 뒤 회남의 난이 일어나 고변은 피살된다.
최치원은 금의환향하지 못했다. 그래도 도통순관까지 지낸 사람이어서 신라 조정에선 한림학사 겸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 임명됐다. 당 황제가 하사한 ‘비은어대’의 권위도 힘이 됐다. 그러나 관직은 순탄치 않았다. 흉년이 계속됐고 정치적 혼란으로 국정이 문란해졌다.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가 점점 어려웠고 육두품 신분도 발목을 잡았다. 입당 유학파와 국내파의 갈등도 심했다.
그는 답답한 현실을 따스하고 감미로운 차향에 날려 보냈다. 신라 문인들은 최치원의 당 경험과 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당시 암울했던 정치적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삶을 동경했다. 이는 근거가 없는 추측이 아니다. 최치원은 풍류도(風流道)를 했기 때문에 차를 즐기며 심신을 수련했다, 신라의 화랑과 낭도들도 오래전부터 수려한 산천을 찾아다니고, 차를 마시며 수련했다.
풍류도는 한민족의 고유사상이다. 그가 『난랑비서문』에 쓴 풍류의 설명을 보면 “나라에 지극하고 오묘한 도가 있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하며, 만물을 교화한다”고 했다. 특히 유불선(儒佛仙)에 밝았던 그가 도인이 됐다는 이야기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전한다.
“곡성(谷城)은 남월(南越)의 이인(異人)이다. 일찍이 그의 집 하인에게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친구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하인이 들어가 보니 단청(丹靑)한 누각이 깨끗하고 조용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한 도인이 노승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은 고운(최치원의 호)이고, 노승은 현준(玄俊)인데, 현준은 고운의 외종형’이라고 했다. 편지를 전하고 나오는데 올 때는 9월도 안 됐는데 동구 밖은 이미 2월이 됐다.”
하인이 본 노승은 화엄에 밝았던 승려로, 최치원의 형이다. 그는 최치원에게 도교의 환반법(還反法)시해법(尸解法)을 전수했다. 도인들의 곁에는 도인의 음료인 차와 이를 달이는 동자가 있었으리라. 실제로 도가는 심신을 맑게 한다는 차의 원리를 가장 먼저 양생에 응용했다.
그러나 가야산에 은둔하기 전, 최치원은 사력을 다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회생시키려 시무책 10여 조를 올린다. 왕은 이를 수용해 그를 아찬(阿飡)에 임명했지만 귀족들이 저항했다. 결국 효공왕 2년(898)에 면직되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한다. 후인들은 그가 은거해 살던 집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했다.
최치원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정신과 향학열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한국의 인물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신선이 되어 산다는데…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차와 함께 잠시라도 머문 자리엔 장황하게 윤색(潤色)된 전설이 남아 있으니 여전히 그는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
*이(離)괘는 물을 주재하고
기사본문에 "물을 주재하고" 는 "불을 주재하고" 의 오자로 보인다. 손풍,리화, 감수,...
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 밑에서 국화(菊花)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南山)을 바라본다'라는 뜻으로, 번잡(煩雜)한 세상사(世上事)를 피(避)하여 숨어 사는 은자(隱者)의 초연(超然)한 심경(心境)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泛酒 / 범제(泛齊): 제사(祭祀)지낼 때 쓰는 앙금이 뜨는 술. 술을 담가놓으면 처음에 앙금이 허옇게 뜨는 데, 이것을 그대로 퍼서 제사(祭祀)에 썼음. 오주(五酒)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얻는 술로서 제일(第一) 맛이 없었음
1.亦作"泛酒"。
2.古代风俗。每逢三月三日,宴饮于环曲的水渠旁,浮酒杯于水上,任其飘流,停则取饮,相与为乐,谓之"泛酒"。
3.古人用于重阳或端午宴饮的酒,多以菖蒲或菊花等浸泡,因称"泛酒"。옛사람들이 중양절이나 단오의 주연에 사용하는 술로 흔히 창포나 국화등을 담갔으며 '범주'라 불렀다.
誰借助茶香 : 借助 무엇이 차의 향기에 이를 것인가 借 : 致
皇甫曾
送陸鴻漸山人採茶回
千峰待逋客,香茗復叢生。
採摘知深處,煙霞羨獨行。
幽期山寺遠,野飯石泉清。
寂寂燃燈夜,相思一磬聲。
윗글에 인용된 황보증(皇甫曾)의 시다.
아래 寂寂燃燈夜,相思一磬聲 는 빠져있다.
한시는 해석이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니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逋客은 은자(隱者)를 말하기도하나 여기서는 찻잎을 따러 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향기로운 찻잎이 다시 나는 것이 은자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의미심상한 단어가 幽期다.
幽期는 은밀한 약속(隐逸之期约)이나 남녀간의 은밀한 만남(指男女间的幽会)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野飯은 농가의 거친 음식(指粗淡的农家饭食)이나 야외에서 먹는 음식(野餐) 이라 한다
재미있는 말은 相思다. 상사는 남녀간의 정이나 그리움이다.
幽期山寺遠,野飯石泉清
寂寂燃燈夜,相思一磬聲。
이 부분을 다시 해석해보자.
은밀히 만나기로 한 산사는 멀고 들밥과 돌샘물은 담백하다
쓸쓸히 연등불 켜진 밤에 그리움은 석경소리 같구나.
그렇다면 찻잎을 따는 깊은 산속의 절근처 차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딱지를 맞은거다.
어두워져서 연등 킬 시간까지 찻잎을 따지는 않았을 것이고 은밀히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그 기다린 시간이 절에서 종치는 시간이니 어두워져 저녁예불 끝난 시간이 맞다.
그러니 종소리가 그리움처럼 울렸을 것 아닌가? 세레나데처럼^^
차 즐기고 찻잎 따는 일이 전부 고상한 일만 있겠는가. 미루어 보건데 아마 당시에 차밭에서 즐거운 일이 많이 있었나보다.
대개 찻잎은 아침에 따는데 밤 늦게까지 기다리다니...
옛부터 찬물 먹고 속차리라는 말이 있는데.
위 단어 해석의 어원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