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명태조(明太祖) 주원장, 수(隋) 문제(文帝). 명나라 신종(神宗) [차(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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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이야기]
명태조 주원장 주원장은 찻잎을 우려마시는 포다법(泡茶法)을 유행시키며 현대 차문화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 조선일보 DB>
몽고족(蒙古族)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漢族)인 명(明)나라를 창업한 주원장(朱元璋)은 현대 차(茶)문화의 방향을 제시한 황제다. 생존을 위해 차가 필요했던 주변국을 차의 수급조절로 통제하기 위해 민간무역을 법으로 금지했다.
차마사(茶馬司)를 설치해 차를 수출한 대가로 고원지대의 말을 수입해 군마로 사용했다. 나라의 허가 없이 차를 밀수출하면 사형시키는 엄격한 법집행으로 차의 밀거래를 막았지만 큰돈이 생기는 밀무역은 국경지대에서 암암리에 이뤄졌다.
주원장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변경지역은 법의 무풍지대였다. 명 태조 주원장의 통치기간 밀무역은 수시로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오히려 말년의 주원장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주원장은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에서 소작농으로 연명하던 주오사(朱五四)의 막내아들로 1328년 10월 21일 태어났다. 주걱턱의 시커먼 그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사춘기의 주원장은 지주의 소를 굶주린 친구들을 위해 잡아먹게 한 후 죽도록 맞고 지주의 집에서 쫓겨나면서도 의리를 지켰다. 주원장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마을 친구들의 영웅이었다.
홍건적 우두머리 중 하나인 곽자흥(郭子興)의 눈에 든 주원장은 그의 양녀 마수영(馬秀英)을 아내로 맞이했다. 첫날밤 아내의 전족(纏足)하지 않은 커다란 발을 보고 놀란 주원장에게 마수영은 “나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혼인을 했으니 당신도 내 발에 대해 흉잡지 말아 달라”고 했다.
주원장은 훗날 21명의 왕자와 14명의 공주를 여러 명의 후비로부터 얻었지만 황후는 오직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수영뿐이었다.
주원장은 화주(和州)전투에서 5000명이 채 안 되는 병사로 10만이 넘는 원나라 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중국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유명해진 그의 주변에 실력 있는 유학자들이 모여 홍건적의 우두머리가 아닌 원(元)나라에 대항하는 한족 지도자로 그를 변모시켰다.
홍건적의 사상인 불교와 거리를 두고 유교를 통해 통치논리를 습득한 그는 1368년 1월 4일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명(明)이라 하고 연호는 홍무(洪武)를 사용했다.
“배고픔이 없었다면 황제도 될 수 없었다”며 민중소통의 정치로 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황제가 되면서 반역에 대한 불안으로 개국공신과 재상 등을 의심해 무려 20만명이나 죽였다.
탐관오리(貪官汚吏)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는데, 재위기간 동안 10만명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참수했다. 이런 그도 1397년 7월에 올라온 상소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남방의 차 문화가 중국 전역에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경항대운하 덕분이다.
중국 차(茶)의 역사는 중국 문명의 시작과 동일선상에 있다. 차는 중국의 남쪽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돼 약(藥)으로 출발해 건강음료로 정착했다. 중국 전역에 차가 알려지기 전에는 북방은 술 문화가 주류였다.
남방의 차 문화가 북상해 중국 전역에 차를 공급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다.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 때에도 소규모의 수로공사는 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긴 1794㎞의 경항대운하를 만든 것은 수(隋)나라를 세운 문제(文帝·541~604)와 수나라를 망하게 한 양제(煬帝·569~618)다.
수나라는 동한(東漢)이라고도 부르는 후한(後漢·25~220년) 말기에 일어난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계기로 시작된 대륙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를 400여년 만에 종식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국가다.
수나라를 창건한 문제는 양견(楊堅)이라는 한(漢)족의 성을 딴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선비족(鮮卑族) 출신으로 원래의 성씨는 보륙여(普六茹)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문제의 부인 독고가라(獨孤伽羅)가 선비족 최고실력자 독고신(獨孤信)의 넷째 딸임을 부인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 무렵 문제는 자신이 비참하게 죽는 악몽을 꿨다. 두통과 악몽에 시달리는 문제에게 스님이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 스님의 말대로 차를 구해 달여 마신 문제는 두통이 사라지고 악몽에서도 해방됐다. 그날 이후 문제는 차를 주변에 두고 수시로 음용했다.
문제를 따라 신하들도 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차를 찾았다. 좋은 차를 문제에게 바쳐 눈에 들면 바로 벼슬길이 열렸다. 차를 경쟁하듯 구하는 열풍이 불면서 좋은 차가 생산되는 중국의 남쪽지방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길이 험하고 도적 떼가 수시로 출몰하는 육로보다 안전한 수로가 필요했다. 문제는 중국 강남의 풍부한 물자와 차를 빨리 운반할 목적으로 대운하공사를 시작했다.
584년 문제의 명을 받은 우문개(宇文愷)는 장안(長安) 남동쪽에 건설한 수나라의 수도 대흥성(大興城)에서 동관(潼關)까지 120㎞에 이르는 광통거(廣通渠)를 건설했다. 587년 우문개는 춘추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제(齊)나라 공격을 위해 만든 한구( 溝)를 보수해 재개통했다.
거듭되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들어가는 세금과 부역 동원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면서 문제는 대운하 건설을 일단 중지했다. 중국 최초로 과거제도와 균전제를 실시해 기존 상류층을 견제하며 민심을 다스렸다.
중국을 통일하고 나라도 안정시킨 문제는 598년 6월 다섯째 아들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했다. 문제는 고구려 원정 실패를 서곡으로 참담한 비극으로 접어든다.
600년 문제는 독고황후의 무리한 요구에 승복해 장남인 양용(楊勇)을 태자에서 폐하고 둘째 아들 양광(楊廣)을 태자로 책봉했다. 602년 독고황후가 서거하자 문제는 국정철학인 유교사상에 따라 장남을 다시 태자로 복권시키려 했지만 이미 양광의 수족이 된 신하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04년 문제는 양광의 심복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양용도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교살당했다.
경항대운하를 건설한 수나라 문제.
살부살형(殺父殺兄)의 패륜을 저지르며 604년 8월 21일 수나라 2대 황제에 오른 양제는 618년 4월 11일 죽임을 당할 때까지 15년에 걸친 혹독한 정치로 중국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된다.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양제가 첫 번째 한 일은 아버지의 애첩 선화부인(宣華夫人)을 범하고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문제가 백성의 어려움을 감안해 중단한 경항대운하공사를 양제는 바로 재개했다.
대운하 건설은 부녀자까지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며 4단계로 이뤄졌다. 양제는 만리장성을 능가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6년 만에 완공시켰다.
북경을 기점으로 천진(天津),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苏省)과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까지 이어주는 세계에서 가장 긴 경항대운하는 황하(黄河)와 장강(長江) 등 중국 5대 수계를 연결하며 강남 일대의 풍부한 물산들을 대량 수송하는 동시에 강남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강남의 특산물로 황실과 부유층에게 귀한 대접을 받던 차도 운하를 타고 북상했다. 차와 함께 강남의 차문화와 차도구들도 중국 전역에 확산됐다. 중국인과 차를 생활과 문화에서 불가분의 관계로 만든 계기가 수나라가 만든 경항대운하다.
대운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희생당한 사실을 무시한 양제는 아버지가 실패한 고구려 침공을 세 번이나 시도하며 농민저항과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618년 양제는 반란군도 아닌 부하장수에게 목이 졸려 죽으며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통일국가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과 무리한 대운하 공사로 38년 만에 사라지고 당(唐)나라에 중원을 내준다. 당나라는 경항대운하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 차 문화를 꽃피운다.
명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 때부터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진상하기 시작한 녹명차(鹿鳴茶)는 중국 소수민족 북()족이 사천성 공현(四川省 珙縣)의 고산지대에서 만드는 명품 녹차다.
황실공차로 지정되는 영예(榮譽)는 명예 이전에 멍에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 차밭을 엄격히 관리 감독해 최상급의 차를 황실에 바치고 나면 그때부터 그 지역의 차는 지방 토후세력이 자행하는 가렴주구의 대상이 돼 상납에 시달렸다. 농민들은 황실공차로 생기는 득보다 부담이 훨씬 컸다. 일부 농민들은 차밭을 불태워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북족을 멸족시킨 명나라 신종.
명나라 전성기에 황제가 된 제13대 신종(神宗, 1563~1620)은 1572년 7월 융경제(隆慶帝)의 뒤를 이어 10살에 즉위해 1620년까지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 신종이 사용한 연호를 따라 만력제(萬曆帝)로도 불리며 본명은 주익균(朱翊鈞)이다. 선제(先帝)의 유지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나이 어린 신종을 대신해 10년 동안 정무(政務)를 맡아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을 이뤘다.
장거정이 죽고 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환관(宦官)이 득세해 내각과 갈등이 심화됐다. 신종은 환관을 지방에 파견해 세금을 직접 거둬 국가재정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할 지하궁전 건축과 매일 벌어지는 연회 비용으로 탕진했다.
나라의 정사를 도외시했던 신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대를 출병시켰다. 신종은 ‘조선의 황제’라는 비난어린 평가와 조롱을 받았다.
후대 중국의 사학자들도 자국 영토가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닌 전쟁에 대군을 출병시켜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만든 신종을 폄하해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군주로 기록했다.
후금(後金)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요동(遼東)을 공격해오는 위기상황에서 누르하치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병부상서(兵部尙書)가 군비를 요청해도 군비부담을 거절한 신종이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사비까지 털어 조선에 두 번이나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했던 역사적 사실을 중국 역사가들은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신종은 황태자 책봉 문제로 내각과 대립하며 환관세력을 키웠다. 엄격한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이 추진했던 내정개혁을 후퇴시킨 것도 모자라 장거정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의 모욕을 준 신종은 15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조정(朝廷)을 무시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이정기라는 재상이 사직을 청했지만 신종은 반응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종의 재가 없이 고향에 내려온 이정기는 가족을 피신시키고 절에서 기거하며 5년 동안 152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신종은 답이 없었다.
사약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제풀에 지친 이정기는 결국 일찍 죽고 만다. 그제서야 신종은 죽은 이정기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두둑한 퇴직금도 하사했다 한다.
명나라 최장기 재위기간을 지낸 신종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제의 사보타주’ 주인공이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로 신종이 황제로 즉위할 무렵 북족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황실공차로 바치던 녹명차를 황실에 보내는 것을 막았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북족을 진압하기 위해 14만 대군이 투입됐다.
산악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초기진압에 실패한 명나라 진압군은 저항군과 민간인 구별 없이 북족을 학살했다. 1572년 7월부터 명나라 진압군은 초토화 작전에 나서 야습을 감행해 60여개의 촌락을 불태우며 인종청소를 벌였다. 살던 마을을 떠나 산 위로 쫓기던 북족은 조상의 관을 모신 높은 절벽 위에서 치른 전투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족의 농민저항은 멸족으로 끝났다.
녹명차(왼쪽)와 녹명차잎을 따고 있는 북족.
1956년 중국에서 실시한 민족 분류작업과정에서 북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겠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을 일단 북족으로 인정했다.
차로 말미암아 멸족된 북족의 재등장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매력적인 존재였다. 북족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절벽 아래에 조성된 북족문화유적지에서 민속공연을 하는 북족을 볼 수 있었다.
북족과 함께 사라진 녹명차도 다시 세상에 나왔다.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한국 영화 감독 협회 이사, 미국 시나리오 작가 조합 정회원, 중국 사천성 홍보대사, 차 칼럼니스트
/ ECONOMY Cho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