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찰

[스크랩] 퇴계 선생이 금계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간찰 원본) -신녕 환벽정(環碧亭) 관련

水西散仁 2017. 6. 12. 10:29

이 간찰은 퇴계 선생이 금계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다.

 

 

 

해제

 

                                              인동 장달수

 

[원문]

承寄書來, 動履淸裕, 深慰思渴. 僕之樗散, 寸無適用之材, 宿昔分願, 亦豈出於閑素? 一番謬計, 輕以病軀, 嬰此世網, 方謀脫去, 遽至重繞. 況此賢關講座, 豈可久冒以受衆賢指點耶! 少俟秋冬以往, 釋去赬肩之擔之後, 次第作焚魚事耳. 未間伊鬱, 如何堪遣? 癃字換工, 非誤也. 竹閣淸致, 著一癃字, 便覺似殺風景, 故敢改押他字. 前書欲說破此意, 忘卻不及, 恨恨. 然此自謂說己癃病之意, 則恐如此耳, 非謂兩公詩爲然也. 年凶民散, 時事邊釁, 皆非腐儒所能, 如何? 但積憂歎. 惟有仁手而官親民, 猶可少行其志, 以幸無告之人耳. 前寄帖正緣汨汨, 未假下筆. 秋涼多愛. 客中所得拙句, 草呈, 一笑.

壬子仲秋念二 滉

 

退溪先生續集卷之四에 실려 있는 <答黃仲擧>라는 제목의 편지이다. “前寄帖正緣汨汨 未假下筆客中所得拙句 草呈 一笑 壬子仲秋念二 滉이라는 내용이 문집에는 빠져 있다.

 

退溪先生續集卷之四 / 書

答黃仲擧

 

 

承寄書來。動履淸裕。深慰思渴。僕之樗散。寸無適用之材。宿昔分願。亦豈出於閒素。一番謬計。輕以病軀。嬰此世網。方謀脫去。遽至重繞。況此賢關講座。豈可久冒以受衆賢指點耶。少俟秋冬以往。釋去赬肩之擔之後。次第作焚魚事耳。未間伊鬱。如何堪遣。癃字換工。非誤也。竹閣淸致。著一癃字。便覺似殺風景。故敢改押他字。前書欲說破此意。忘卻不及。恨恨。然此自謂說己癃病之意。則恐如此耳。非謂兩公詩爲然也。年凶民散。時事邊釁。皆非腐儒所能。如何。但積憂歎。惟有仁手而官親民。猶可少行其志。以幸無告之人耳。秋涼多愛。

 

 [번역] 보내온 편지를 받고서 기체가 맑고 여유로우심을 알고 그리움으로 목마르던 마음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쓸모없는 저는 조금도 마땅히 쓸 만한 재목이 못 됩니다. 지난날의 분수와 바람이 또 어찌 한가롭고 소박한 데서 벗어나겠습니까? 한 번 생각을 잘못하여 병든 몸으로 세상의 그물에 걸렸다가 이제 벗어나려고 도모하는데 갑자기 거듭 휘둘림에 이르렀습니다. 하물며 이 성균관의 강의하는 자리는 어찌 오래 머물면서 여러 어진 이들의 지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좀 기다려 가을이나 겨울 이후에 어깨를 벌겋게 하는 무거운 짐을 벗은 뒤에 차례로 은어대를 불태우는 일을 할 것입니다.

뵙지 못한 사이에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견디며 지냅니까? ()자를 공()으로 바꾼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죽각의 맑은 운치에 하나의 융()자를 붙인 것이 문득 흥취가 없다고 느껴져서 감히 다른 글자로 고쳐 압운했습니다. 앞서 드린 편지에서 이런 의사를 다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잊어버리고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아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늙어서 수척해진 병을 스스로 말하는 뜻이라면 아마 이와 같을 따름이지만 두 분의 시가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흩어진 것과 요즘 국경의 다툼은 모두 나처럼 못난 선비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합니까? 다만 근심과 탄식만 쌓입니다. 뛰어난 솜씨로 관리가 백성을 가까이 하면 오히려 가히 얼마쯤 그 뜻을 행할 수 있으니 하소연할 곳 없는 이들에게 다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에 부친 첩은 실로 바빠서 붓을 들 겨를이 없습니다. 가을이 선선하니 많이 즐기세요.

객지에서 얻은 보잘것없는 시를 급히 써서 보내니 한번 웃으시지요.

 

1552822일 황

 

 

[발신인] 이황(李滉, 1501~1570)

 

[수신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는 치()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단어]

저산(樗散):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이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

숙석(宿昔): 그리 멀지 아니한 옛날.

정견(赬肩): 어깨에 무거운 물건을 매서 붉게 되는 것.

미간(未間): 서로 보지 못한 동안

죽각(竹閣): 금계 황준량(黃俊良)이 신녕현감으로 복직된 후, 황폐해진 비벽정(斐碧亭)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정자이다.

살풍경(殺風景): 매몰차고 흥취가 없음.

지점(指點):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임.

분어(焚魚): 은어대(銀魚袋)는 은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패식(佩飾)인데, 당나라 때 5품 이상의 관리가 궁궐에 출입하는 신표(信標)로 사용하였다. 이를 불태운다는 것은 벼슬을 버림을 의미한다.

변흔(邊釁): 국경에서 발생한 인접국 사이의 다툼, 혹은 그런 기미.

 

 

1516년 고을 현감인 이고(李考)가 지은 비벽정(斐碧亭)이 있었는데, 황폐해지자
 
1552년 퇴계 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신녕현감으로 부임해 그 자리에 죽각(竹閣)을 세웠다. 퇴계의 제영은 〈차운하여 부쳐서 황중거가 새로 지은 죽각에 제한다.〔次韻 寄題黃仲擧新構竹閣〕〉는 제목으로 《퇴계선생문집》 권2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기를 먹으나 동전 냄새 가까이하기 어려우니,
차군(此君)이 오직 집안에서 벗할 만하네.
옥처럼 서 있는 줄기는 자리를 다투는 것이 아니요,
용처럼 비등하는 대꺼풀은 하늘로 오르려 하네.
높은 바위와 차가운 시냇물은 푸른빛 모으고,
성근 창살과 빈 난간엔 맑은 바람 흩뿌리네.
사람과 경치가 모두 새로워 보기 좋으나,
옛날을 이어 시를 쓰니 변변찮음 부끄럽네.
 
肉食終難近臭銅
此君唯足友軒中
竿竿玉立非爭列
籜籜龍騰欲上空
瘦石寒溪團翠色
疎欞虛檻灑淸風
可憐人境俱新處
續舊題詩愧未工
 
《退溪先生文集 卷2 次韻寄題黃仲擧新構竹閣》 ‘차군’은 대나무를 친근하게 부르는 칭호이다. 이 정자가 임진왜란에 소실되자, 송준길의 부친인 송이창이 현감으로 있으면서 1611년에 정자를 중건하여 환벽정으로 개칭하였는데, 이에 대해 송준길이 쓴 기문 〈신녕현 환벽정 중수기(新寧縣環碧亭重修記)〉가 《동춘당집》에 실려 있다.

 

 

운장ㆍ응순과 죽각에서 취하여 시를 읊다가 취중에 서로 차운하다〔與雲長應順醉吟竹閣 次韻醉中〕  -금계 황준량

 

화산에 풍광이 좋아 / 花山好風煙
호방한 선비들이 냇가 정자로 왔나니 / 豪士來溪亭
냇가 정자엔 물과 대나무 해맑아 / 溪亭明水竹
마치 백옥경에 나온 듯하네 / 幻出白玉京
풍류가 구루령과 같아 / 風流句漏令
속세에 대한 마음은 추호처럼 가볍네 / 世念秋毫輕
관청 일 한가할 때 좋은 날 즐기며 / 官閒樂勝日
대나무 대하여 유하주 기울이니 / 對竹流霞傾
맑은 담론은 옥가루 뿌리는 듯하고 / 淸談灑玉屑
고아한 시는 금석 소리를 울리네 / 雅韻飛金聲
선계 호리병 속은 길이 굽지 않고 / 壺中路非枉
취향에는 문이 협소하지 않네 / 醉鄕門不局
백년 인생에 오늘 같은 저녁 있으니 / 百年有今夕
너나 하며 서로 형해를 잊으리 / 爾汝相忘形
청산에 이미 낙조가 비치고 / 靑山已落照
늙은 매미는 더욱 맑게 울어대는데 / 老蟬鳴更淸
호방한 노래 소리 구름 밖으로 울리고 / 浩歌雲外響
마른 피리 소리는 바람 앞에서 비끼네 / 枯笛風前橫
아득히 드넓은 가을 하늘 펼쳐지고 / 眇眇秋天濶
가뭇가뭇 고운 달이 밝아왔네 / 迢迢華月明
달이 져서 붉은 등불 밝히니 / 月落續虹燈
파신이 불야성에 놀라네 / 波臣驚火城
밤 깊어 이슬이 옷을 적시는데 / 夜深露霑衣
손님들 흩어지자 첫닭이 우네 / 客散鷄初鳴
이 마음 알아줄 이 고금에 몇 명일까 / 賞識幾今古
저 시내와 산은 응당 정이 있으리 / 溪山應有情
이번 유람이 묵은 자취 되지 않아 / 玆遊未陳迹
좋은 선비들 응당 이름을 남기리 / 好士應留名

 

[주-D001] 운장(雲長) : 
이원승(李元承, 1518~1572)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운장, 호는 청암(靑巖)이다. 농암 이현보의 손자이고 황준량의 처남으로서, 이황의 문인이다.
[주-D002] 죽각(竹閣) : 
영천 신녕(新寧)에 있던 정자이다. 지금은 환벽정(環碧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 그 자리에는 1516년(중종11) 이고(李考)가 세운 비벽정(斐碧亭)이 있었는데, 비벽정이 황폐해지자 1552년(명종7) 신녕 현감이 된 황준량이 그 자리에 죽각(竹閣)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죽각이 소실되자 1611년(광해군3) 현감 송이창(宋爾昌)이 정자를 중건하고는 환벽정으로 고쳐 불렀다.
[주-D003] 화산(花山) : 
영천 신녕에 있는 산 이름이다. 《대동여지도》에는 화산(華山), 《산경표》에는 화산(花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대 지형도에는 화산(華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신녕면의 고려 때 이름이 화산(花山)이었고, 지금도 중앙선 북영천역과 신녕역 사이에 화산역이 있다. 신녕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볼 수 있다.
[주-D004] 백옥경(白玉京) : 
옥황상제가 산다고 하는 하늘 위의 서울이다.
[주-D005] 구루 령(句漏令) : 
중국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신선술과 양생술에 심취하여 구루(句漏)라는 작은 고을에 좋은 단사(丹砂)가 난다는 말을 듣고 구루령으로 가기를 자원하였다고 한다.
[주-D006] 유하주(流霞酒) : 
신선이 마신다는 좋은 술이다.
[주-D007] 취향(醉鄕) : 
술에 취했을 때 온갖 걱정을 잊는 별천지의 경계이다. 당(唐)나라 왕적(王績)의 〈취향기(醉鄕記)〉에 보인다.
[주-D008] 너나 …… 잊으리 : 
노소를 무시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두보(杜甫)가 친구 정건(鄭虔)에게 준 〈취시가(醉時歌)〉에 “형체는 잊고서 너니 나니 하는 사이, 통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나의 스승일세.〔忘形到爾汝痛飮眞吾師〕”라는 표현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주-D009] 파신(波臣) : 
《장자》 〈외물(外物)〉에 나오는 상상의 물고기 이름이다.

 

신령의 신죽각 시에 차운하다〔次新寧新竹閣韻〕 -황금계 

일찍이 화산 관장동을 맡아 / 華山曾忝綰章銅
십년 만에 하나의 꿈속으로 돌아왔네 / 十載歸來一夢中
자옥 대숲은 응당 오랜 것 같은데 / 朿玉篁林應似舊
윤파 초가는 벌써 헛일이 되었네 / 淪波草閣已成空
신군의 솜씨 시험하니 시계 넓혔고 / 神君試手恢詩界
빈 난간 시내에 비껴있어 산골바람 끌어오네 / 虛檻橫溪引澗風
마주하여 웃는 균헌 속되지 않음을 알겠는데 / 對笑筠軒知不俗
멀리서 거친 시구 던지니 공교롭지 않아 부끄럽네 / 遠投荒句愧非工

 

[주-D001] 화산(華山) 관장동(綰章銅) : 
화산은 신녕(新寧)의 고호로, 이 안무사(李安撫使)의 관향(貫鄕)을 말한 것인데,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자세하지 않다.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주-D002] 마주하여 …… 알겠는데 : 
소식(蘇軾)이 대나무를 사랑하여 〈녹균헌(綠筠軒)〉 시를 지었는데 “밥에 고기가 없는 것은 괜찮으나, 사는 곳에 대가 없어서는 안 되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파리하게 할 뿐이나,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사람의 파리함은 살찌울 수 있지만, 선비의 속됨을 고칠 수가 없다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여기서도 신죽각이므로 인용하였다. 《蘇東坡詩集 卷9》
 
 

 

동춘당 송준길이 지은 아버지 송이창의 년보

 

경술(1610) 만력 38년 광해 2년
○ 부군의 나이 50세였다.
○ 12월 정해 - 16일 - 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다.

 

신해(1611) 만력 39년 광해 3년
○ 부군의 나이 51세였다.
○ 죽각(竹閣)을 보수하고서 퇴계(退溪) 이 선생의 시를 써서 걸었다. - 과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새로 죽각을 짓자, 퇴계 선생이 그를 위해 칠언율시 1수를 써서 문미(門楣)에 걸었는데, 병화를 겪은 나머지 모두 없어지고 남은 게 없었다. 그 뒤에 죽각을 다시 세웠으나 시가 없으니 듣는 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부군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죽각을 보수해 단청(丹靑)을 입히고 다시 그 시를 써서 걸었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김 상공(金相公), 승지(承旨) 이민성(李民宬) 등 여러 명사들이 차례로 죽통(竹筒 편지나 시를 넣는 통)을 전해 부군의 뒤를 이어 화답해 부군의 업적을 드러내었다. -

 

 

신녕현(新寧縣) 환벽정(環碧亭) 중수기(重修記) 신해년(1671, 현종12)

 

동춘당 송준길 

 

만력(萬曆) 신해(1611) 연간(年間)에 선군자(先君子)께서 화산 현감(花山縣監)으로 나아가셨는데, 그때 예닐곱 살이던 나도 따라갔다. 그 당시 내가 철이 없었으나, 기억하건대 그곳 객관(客館) 서쪽에 대숲을 지나 바위 위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물이 졸졸 뜰을 따라 흘러 그윽하고 시원한 경치가 거의 인간 세상이 아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환벽정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이 고을 원이 되었을 적에 이 정자를 비로소 창건하였고,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께서 근체 칠언 율시(近體七言律詩) 한 편을 지어 이 정자를 읊으셨는데, 그 시가 지금 문집(文集) 속에 실려 있다. 황공(黃公)이 이 시를 받았다면 반드시 판각(板刻)해 이 정자에 걸고서 당시의 훌륭한 볼거리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자와 시가 모두 없어졌다.
그러므로 선군자께서는 ‘정자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선생의 유적(留迹)은 더욱 없어지게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공무(公務)를 보시는 여가에 옛터에다가 그 정자를 다시 세우고서,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들을 더 많이 심고, 그 시를 문집에서 찾아 내어 정사(淨寫)해 새겨서 다시 문 위에 걸었다.
정자가 완성되자,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김 상공(金相公)과 치천(稚川 윤방(尹昉)) 윤 상공(尹相公)이 마침 사명(使命)을 받들고 지나다가 이곳에 들러서는 경치를 감상하는 데 마음이 팔려 차마 떠나지 못하면서, 각각 오언 율시(五言律詩) 한 편씩을 남겨 기념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명사(名士)들의 시통(詩筒)에 주고받은 시가 매우 많았으니, 실로 일로(一路)의 명승(名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흐르자 점점 황폐해져 사람들이 이 정자가 있는 줄도 모른 지가 또 여러 해였다. 그런데 숭정(崇禎) 무신년(1668)에 함평(咸平) 이후 재길(李侯材吉)이 이 고을 원으로 와서 이 정자가 황폐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중수(重修)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찾아와서 그 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정자의 현판(懸板)을 쓰고 중수기(重修記)도 지어 그간의 사정을 기록하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이 졸렬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었지만 차마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으므로 숙연(肅然)한 용모로 재배하고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대체로 고을에 정관(亭館)을 세우는 것은 단지 외관(外觀)의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령(守令)이 정신을 수양하고 기운을 보양(保養)하여 다스림을 내는 근원(根源)을 맑게 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근본을 북돋우고자 해서이니, 이는 옛사람도 누누이 말한 바이다. 우리 퇴도(退陶) 선생은 진실로 백세(百世)의 스승이므로 선생의 한 마디 말씀이나 한 글자도 학자들이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보물로 여겨 소중히 간직하는데, 더구나 올바른 성정(性情)에서 나온 시(詩)이겠는가. 선군자께서는 바로 율곡(栗谷)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퇴도에 대한 존모(尊慕)를 전해 받았으니, 금계(錦溪)의 뒤를 이어 이 정자를 중건하고 퇴도의 시를 판각해 거신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이후(李侯)가 또 그 뒤를 이어 중수하였다.
아, 이 정자는 폐기(廢棄)할 수 있어도 이 시는 없어지게 할 수 없으니, 앞으로 이 고을 수령으로 오는 자들은 더욱 삼가고 경계하여 계속 수리해서 퇴락(頹落)되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또 고을 학자들에게 한갓 그 시만을 욀 것이 아니라 또 그 글을 읽고 그 도를 찾아서 강습(講習)해 행하도록 고무(鼓舞)한다면 풍속을 교화하는 데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어려서 부모를 여읜 내가 옛날 화산(花山)에서 놀던 때를 묵묵히 생각건대 금년이 마침 60주년(周年)이므로 한번 이 정자에 가서 어려서 놀던 곳을 두루 살피며 그 꽃과 나무들을 감상하고, 그곳의 부로(父老)들에게 물어 선군자의 유적(遺迹)을 찾고 싶은 마음 항상 간절하다. 그러나 이제 늙고 병들어 고향에서 칩거(蟄居)하는 신세이다 보니 부질없이 〈육아(蓼莪)〉의 감회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후(李侯)의 요청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감모(感慕)의 마음이 일어 슬피 흐느끼면서, 이 글을 써서 앞으로 올 수령과 이 고을의 사우(士友)들에게 보이노라.
선군자의 휘(諱)는 이창(爾昌)이고 자는 복여(福汝)이며 성은 송씨(宋氏)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아가셨다가 계축년(1613)에 그만두고 돌아오셨는데, 고인(故人)의 인애(仁愛)한 유풍(遺風)이 지금까지 백성들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

 

新寧縣環碧亭重修記 辛亥

萬曆辛亥間。先君子出宰花山縣。余年方六七歲。隨往焉。時未省事。而尙記其客館之西偏有小亭。披篁架巖。水㶁㶁循除鳴。幽閑蕭灑。殆非人境。卽所謂環碧亭者也。蓋黃錦溪俊良宰是縣。始刱斯亭。退陶先生作近體七言一律以詠之。今載於文集中。想黃公得此詩。必刊而揭之。以爲一時聳觀之地。而亭與詩皆無在者。先君子以爲亭固不可無。而先生留迹。尤不可泯沒。治事之暇。乃就舊基。重建其亭。益樹以佳花異木。出其詩於集中。精寫以刻。更揭於楣間。亭旣成。仙源金相公,稚川尹相公適奉使以過。留連愛賞。不忍別去。各留五言一律以記之。厥後諸名勝遞筒。酬唱甚多。實一路之勝觀也。歲月旣久。寢成蕪廢。人不知有斯亭。又有年矣。崇禎戊申。咸平李侯材吉宰其地。爲之感慨興懷。重加修葺。間嘗造余以諗之。旣令余寫其亭額。又使作記以識之。余文拙不敢當。而亦有所不忍終辭者。謹肅容再拜。作而言曰。夫邑之有亭館。非直爲觀美。將以頤其神養其精。以淸出治之源。以培興化之本。蓋古人累言之矣。況我退陶先生。誠百世之宗師。其片言隻字。學者猶且珍愛而寶藏之。況言之精者。出於性情之正者耶。先君子卽栗谷先生之門人。尊慕退陶。實有所受。其踵錦溪而修其亭揭其詩者。誠非偶然。而李侯又繼而新之。噫。斯亭可廢而斯詩不可泯也。願後之爲宰。更加敬飭。續而修之。俾無隳壞。且鼓舞邑之學子。不徒誦其詩。又將讀其書尋其道。講習而服行之。其有補於風化。夫豈淺鮮矣乎。余孤露之餘。默思花山舊遊。甲子適一周矣。常願一至斯亭。周觀童子時所遊。玩其花木。問其舊老。以尋先君子之遺迹。一心炯炯。而今老且病。屛蟄桑梓。徒深蓼莪之懷。茲因李侯之請。不覺感慕悽咽。聊書此以示異時之來宰者與其邑之士友。先君子諱爾昌。字福汝。姓宋氏。恩津人。辛亥宰其縣。癸丑罷歸。遺愛至今在民云。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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