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1820~1898)
세도정치 안동 김씨는 세도를 이어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왕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왕족은 역모의 협의를 뒤집어씌워 멀리 귀양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이 택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건달이나 미치광이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야심이 없는 척 시정의 건달 행세를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의심을 피한 이하응은 역시 안동 김씨에 눌려 원한을 품고 있던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풍양 조씨(헌종의 어머니)와 은밀히 밀약하여 헌종에 이어 철종도 후사 없이 죽자, 1863년 자신의 둘째 아들(고종)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하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서 정책 결정권을 쥐고 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건달 행세를 하면서 깨달은 당시의 문제점을 개혁정책을 통해 해결해 나가면서 세도정치에 눌린 왕권을 회복하며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아 후세에 보수 국수주의자라는 평과 아울러 개혁주의자라는 양면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고종이 장성하여 왕권을 행사하면서 1873년 10년만에 실권한 대원군은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이후 아들이 권좌에 있는 왕위를 탈환하기 위하여 임오군란, 동학농민전쟁,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갑오경장, 아관파천 등 격변기 역사적인 사건마다 왕권 탈환을 꾀하였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아관파천 사건 3년 후인 1898년 78세로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김정미의 인물한국사 흥선대원군에서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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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에 정치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풍운아 석파 이하응이 예술적으로 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그가 30세때 안동 김씨 세력의 눈을 피하여 미친 척 시정을 떠돌 때 안동 김씨를 더욱 안심시킬 마음으로 추사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기 시작한 서화(書畵)였다.
경주 김씨인 추사도 안동 김씨들에게 견제를 받아 9년간이나 제주도에 귀향을 갔다 돌아온 터라석파와 은연중에 마음이 맞았을 것이다.
석파는 추사의 서맥을 이을 만큼 글씨도 잘 썼지만 특히 난초그림에 있어서는 스승을 뛰어넘어 단군갑자 이래 우리나라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난초그림의 대가가 되었다.
*이하응의 묵란도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추사와 석파(石坡: 대원군 이하응의 호)의 교류는 계속 되어 추사의 가르침은 난초뿐만 아니라 글씨에까지 미치게 되니 석파는 추사 서파(書派)의 빼놓을 수 없는 후계자라 할 수 있다.
지리산에 남긴 석파의 글씨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경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서화를 위안처로 삼았던 대원군이 어찌 지리산 자락에 한점 남기지 않았겠나.
중산리 들어가는 입구의 남사마을에 있는 [元正舊廬(원정구려)]이다.
[원정구려]란 산청삼매로서 원정매로 유명한 고려 후기 문신인 원정공 하즙(元正公 河楫)의 옛집이란 뜻이다.
*[元正舊廬(원정구려)] 편액
이 글씨는 대원군 시절에 직접 방문하여 쓴 글은 아니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운 무관 하겸락(河兼洛:1825~1904)게 치하하면서 써 준 것이라 한다.
남사마을 하씨 고택은 한때는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으로 명망 높았던 가옥이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에 의해 방화되어 지금은 남루한 [원정구려] 한채 뿐이지만, 집 뒤 밭에 있는 600년 된 감나무와 집 앞 뜰에 있는 700년 된 원정매와 더불어 마루에 달린 대원군의 [元正舊廬]편액이 명문가의 깊은 지조를 지키고 있다.
화엄사에도 대원군의 글씨가 효대의 사사자삼층석탑 바로 옆에 있는 탑전에 걸려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2012년 탑전에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후 폐쇄해 버렸는지 문이 굳게 잠겨 있고 인적이 없어 편액을 볼 수가 없다.
편액에 대하여 종무소에 물어 보아도 알지도 못하니 지금 짓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완공되면 전시하기를 바랄 뿐이다..
가까스로 사진을 구하긴 했는데 상태가 억망이지만 대원군이 추사체로 쓴 자취만은 그윽하다.
*[世尊舍利塔(세존사리탑)] (<김일두>님의 논문에서 빌려옴.)
이 편액과 관련하여 대원군이 추사체로 쓰게 된 일화가 있다고 <김일두>님의 박사 논문 [한국사찰의 편액에 관한 연구]에서 아래와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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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는 추사보다 34세나 연하일 뿐더러 추사에게 난초그림을 배웠는데, 추사는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찬사까지 하여준 일이 있었다. 석파가 화엄사에 들렀을 때 추사가 [華藏(화장)]이란 편액을 석파 서체로 써놓고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사살을 안 석파는 “그러면 나는 추사체로 써야지.” 하면서 [세존사리탑] 편액을 추사체로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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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보제루에 걸린 [華藏]
(그러나 기록도 없고 글맛도 그렇고 관지도 없어 이 편액을 추사가 썼다는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석파와 추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편액 한점이 고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대원군이 집권한 뒤에도 계속 살았던 운현궁(雲峴宮)의 노안당에 걸려 있는 [老安堂(노안당)] 편액이다.
*[老安堂(노안당)] 편액 (추사글씨를 집자)
편액을 보면, 좌측 관지에 書爲 石坡先生 老玩(서위 석파선생 노완)이라 적혀 있는데, 석파선생을 위하여 노완(늙은 완당으로 추사가 노년에 사용한 호)이 쓰다. 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편액이 걸린 운현궁의 노안당은 대원군이 1863년 집권한 이후 1864년도에 건립하여는데 추사는 그 보다 8년 전인 1856년에 사망했으니 추사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추사를 그리워한 석파가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기존에 있는 글씨를 짜집기)하여 만든 것이다.
아마도, 석파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어느 날 추사의 옛집이 있는 과천을 지나게 되자 [과천도중(果川途中)]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노완 고선생(老玩 古先生)을 깊이 사모하노라”라는 시구를 맺으면서 선생을 회상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무렵인 것 같다.
석파 이하응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남긴 대표작을 꼽는다면 석파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비명이라 할 수 있다.
유교사회에서 돌아가신 선친의 묘비만큼 심혈을 기울여 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연군 묘비. 무어라 입을 열 수 없는 또한 입을 다물 수 없는 단정한 예서체로 석파의 걸작이다.
남연군묘에 얽힌 이야기는 석파가 집권하기 전 미친 척 떠돌아다니면서도 얼마나 강렬한 집권 욕망을 품고 있었는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데 간략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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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 이하응이 젊었을 때 한량 비슷하게 꺼들거리며 추사 김정희의 주변의 예인들과 어울려 난초나 치면서 보낸 것은, 자신의 야망이 안동 김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고등의 위장술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흥선군 주위에 또한 여러 한량이 모여들었는데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물론 후자를 택했다.
그런데 황제가 나올 자리란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유서 깊은 거찰 가야사의 대웅전 앞 석탑자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흥선군은 전 재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불질러 버리고 스님들을 쫓아낸 뒤 석탑을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이천에 있던 선친의 묘를 이장하였다.
매장을 마치고 난 후 흥선군은 나중에 누가 손댈까 걱정되어 철 수만 근을 녹여 부었고 그 위에 강회를 비벼서 다졌다고 한다.
상해에 근거지를 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보복 내지는 협상을 이끌기 위하여 그 당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선친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실패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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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에 가면 전국에서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찾아와서 묘 주변을 둘러보는 일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남연군의 묘가 명당인지는 묘에서 둘러보아서는 볼 수 없다.
남연군묘를 둘러싸고 있는 옥녀봉에 올라 내려다 보면 주산에서 뻗은 지맥이 꿈틀거리며 묘자리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무릎을 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묘 자리는 명당이 아니다. 이하응의 후세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온다는 예언은 그의 아들 고종(高宗)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후 그 다음 대에 손자 순종(純宗)이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으니 맞는다고 할 수 있는데,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치욕적인 하야를 하게 되었으니 어찌 명당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서울 화계사에 있는 대원군의 글씨
묘자리 풍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남연군묘에 얽힌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지관이라는 정만인(鄭萬仁)이 이하응이 서울 화계사에 들렀을 때 만난 걸승인 만인(萬印)이었다. (최완수의 [명찰순례]에서)
화계사 승려 만인(萬印)이 명당자리를 일러주어 결국 집권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화계사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게 되고 당연히 그의 글씨도 여러 점 남겼다.
*[華溪寺(화계사)] 보화루 앞에 있다. 추사의 제자답게 추사체를 구사한 걸작이다.
*[鶴棲樓(학서루)] 대원군의 글씨 중에서도 백미로 꼽아야 할 명품이다. (<최완수>님 평)
이 좋은 글씨를 보화루 안쪽 구석에 걸어놓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찾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구석에 걸어 놓아 정면으로 볼 수도 없게 해 놓았다.
*[冥府殿(명부전)] 좌측 관지에 [石坡(석파)]와 [大院君章(대원군장)]의 낙관이 찍혀 있는데, 화계사에 있는 대원군 글씨에 모두 같이 찍혀 있다.
*[法海道化(법해도화)] 학서루와 옆에 달려 있다.
이외에도 [祝聖壽千萬(축성수천만)]이 있다고 하나 찾지 못했다.
화계사에 가면 이와 같이 대원군의 글씨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대부분 추사체라 바로 알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추사체이긴 하나 대원군 글씨가 아닌 것이 있는데 위당 신헌(威堂 申櫶)이 쓴 보화루다.
*위당의 [寶華樓(보화루)]
석파의 화계사 편액과 나란히 걸려 있는 해서체의 화계사도 위당의 글씨이다.
위당이 추사체로 편액을 써 놓은 이유는 위당이 대원군과 함께 추사의 제자로서 추사체의 서맥을이었기 때문이다.
추사의 제자 중에서 일반인이 편액을 통해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글씨가 대원군과 위당의 글씨이다.
이와 같은 인연이 작용하여 대원군은 집권 후 위당을 매우 신임하여 위당이 관직에 승승장구하게 된다.
화계사에는 석파가 집권 이후 마음껏 권세를 누릴 때라 글씨도 추사체로 거리낌 없이 시원시원하게 써 놓았는데 위당의 글씨와 함께 추사서문의 글맛에 푹 빠질 수 있다.
서울 흥천사에 있는 대원군 글씨
대원군이 집권하고 실각한 후에도 주로 서울에 머물렀기에 서울에 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화계사 못지 않게 대원군의 글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돈암동에 있는 조그만 사찰 흥천사이다.
*[興天寺(흥천사)] 해서체
*[玉井樓(옥정루)] 추사체의 서미를 풍기는 예서체
*[西禪室(서선실)] 추사체의 서미를 풍기는 예서체
이상의 글씨에는 화계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관지에 [石坡(석파)]와 [大院君章(대원군장)]의 낙관이 있다.
*[興天寺(흥천사)]
관지가 없어 누구 글씨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글씨체로 보아 대원군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남양주 흥국사에 있는 대원군의 글씨
지금은 경기도이지만 한양과 가까운 북한산 자락 일대가 조선시대에는 왕가의 원찰들이 많아 왕족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서울 상계동에서 덕능고개를 넘어가면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 흥국사가 있다.
*[興國寺(흥국사)]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블로그에서 빌려옴.)
관지의 도서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대원군의 글씨 중에서 백미로 꼽히는 예서체다.
그러나, 지금 진행하고 있는 중창이 끝나는 2015년에나 볼 수 있다.
*[靈山殿(영산전)] 행서체
*[獨聖殿(독성전)]
흥국사에 대원군의 글씨가 많은 이유는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그의 아버지 덕흥군이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능은 능이 아니고 묘라 불렀는데, 효성스런 선조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리 끝에 당시 궁중의 땔감을 덕흥군의 묘가 있는 흥국사 근처에서 구입하는 것을 알고 덕릉에서 가져왔다면 값을 넉넉하게 쳐 주고 덕흥군의 묘에서 가져왔다면 사지 못하게 하여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덕흥군의 묘를 덕릉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아들 고종에서 권한을 빼았긴 흥선대원군이 선조의 효성이 부러웠는지 선배 대원군이 되는 덕흥대원군의 원찰인 흥국사에 각별하여 많은 글씨를 남겼던 것이다.
궁궐에 남아 있는 대원군의 글씨
대원군이 집권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써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대부분 편액은 그 당시 관리들이 쓰게 했다.
다만, 창덕궁 낙선재의 정문에 고색창연한 대원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창덕궁 낙선재의 [長樂門(장락문)]
석파의 글씨도 도배된 통도사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본존불을 모신 금당의 사방으로 편액을 달아 놓은 곳이 해인사 대적광전과 통도사 대웅전이다.
해인사는 일주문부터 시작하여 대적광전 사방으로 거의 해강 김규진의 글씨가 도배되어 있다면, 통도사에도 역시 일주문부터 대웅전 사방으로 석파 이하응의 글씨로 도배되어 있다.
*통도사 일주문의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장중한 해서체
대원군 편액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관지에 [大院君章] [石坡] 낙관이 있다.
*대웅전의 [金剛戒壇(금강계단)] 석파의 득의작으로 꼽히는 해서체
*대웅전 측면 [大方廣殿(대방광전)] 헤서체
*[圓通房(원통방)] 石坡의 관지가 뚜렷한 예서체
지방에 있는 석파의 글씨
격랑의 시대를 살아간 대원군이기에 집권 후에는 거의 한양에 머물고 있어 그의 글씨는 서울과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집권 전에 그가 미친 척 떠돌아 다니면서 명문가 고택이나 작은 사찰에 머물면서 신세 진 대가로 글씨를 남겨두었거나 혹은 집권 이후 옛날의 고마움으로 써 주었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종가안 경주 양동마을의 무첨당(無忝堂)에 걸려 있는 [左海琴書(좌해금서)]
대원군이 쓴 추사체의 걸작으로 꼽힌다.
**25 *경북 봉화에 있는 만산고택(晩山古宅)에 걸려 있는 [만산(晩山)]
*경기 안성 운수암에 있는 [雲水庵(운수암)]
*인천 영종도 용궁사에 있는 [龍宮寺(용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