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시간; 1810년 1월 그믐날.
장소;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 北京) 도성의 남쪽 문 중 하나인 선무문(宣武門) 앞쪽의 법원사(法源寺)
등장인물;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벤트; 담계와 추사의 상견례
연경의 겨울은 춥기만 했다.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 1810년 1월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쌀쌀했다. 자주 오지 않는 눈이지만, 그날은 차가운 북풍에 이따금 눈발도 날렸다. 시간은 오고 가고, 모든 날은 평범할 뿐이다. 하지만 1810년 1월 그믐날은 특별했다. 淸(청)의 최고 학자인 담계가 조선의 햇병아리 선비인 추사를 만나며,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연경에 온 24살의 젊디젊은 추사(秋史, 1786~1856)가 그토록 사모하던 담계(覃溪, 1733~1818)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추사는 10년 동안, 당대 최고 학자인 옹방강을 만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추사는 그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로 지었다. 옹방강(翁方綱)의 호가 담계(覃溪)인 것을 감안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를 흠모했던 담계가 그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로 지었다는 것을 알고, 추사가 얼마나 담계를 사모하는지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100개 이상의 호를 사용했던 김정희가 가장 많이 이용했던 호는 추사와 완당(阮堂)이었다. 호를 왜 추사로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옹방강의 친구였던 강덕량(江德量)의 호가 추사(秋史)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담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다.
또 추사의 자(字, 남자가 20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할 때 받는 이름)가 원춘(元春)이었다. 그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원(元)을 썼고, 이름이 정(正, 喜는 돌림자)이어서 봄을 나타내는 춘(春)을 쓴 것이다. 자와 어울리게 호를 추사로 씀으로써 역사를 나타내는 춘추(春秋)가 되도록 했다. 완당(阮堂)은 그가 존경했던 청의 완원(阮元, 1764~1849))을 의식한 것이다.
1809년 가을, 淸(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갈 것을 자원한 것도 오로지 담계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옹방강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멀고 험한 길을 달려왔건만 오매불망 그리던 담계를 만나지 못하자 추사는 안달이 났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추사는 담계가 매년 1월에는 손님을 일절 만나지 않고 불경(佛經)을 붓글씨로 써서 그믐날에 법원사(法源寺)에 직접 가서 시주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하여 새벽 5시에 법원사로 찾아갔고, 마침내 담계를 만날 수 있었다.
필담(筆談)으로 이루어진 이날 만남은 추사의 일생을 결정했다. 이날 만남을 시작으로 추사가 조선으로 되돌아오기까지 한 달여 동안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났다. 담계는 이 때 추사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보여줬다. 그가 평생 모은 소동파 관련 자료(소동파 컬렉션)를 보여준 것은 물론, 금석학과 고증학에 대한 방법론도 전수했다. 추사가 귀국하고 담계가 사망한 1818년까지 8년 이상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제로서 학문을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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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인 1844년에 그렸던 「세한도(歲寒圖)」의 아이디어도 담계가 보여준 소동파의 '언송도'라는 그림에서 나왔다. 그림은 전하지 않고 ‘고송언개전기호(古松偃蓋全敧戶; 늙은 소나무가 집에 기대 누워 있다)’는 구절만 전하는 데, 추사가 이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 세한도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추사가 그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옛정을 잊지 않고 구하기 어려운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우선(蕅船, 이상적의 호)에게 그려준 그림(문인화)이다.
추사는 외에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1816년에 처음으로 밝혔다. 1817년에는 15일 동안 경주를 여행하면서 ‘문무왕릉비’와 ‘무장사비’를 발굴했다. 이런 성과는 담계가 편지를 통해 현장을 가봐야 한다고 강조한 덕분이었다. 담계의 편지 중에 이런 글귀가 있다. “覈實在書 窮理在心 巧古證今 山海崇深(핵실재서 궁리재심 교고증금 산해숭심)”, “사실의 실제를 조사하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것은 마음에 있으며 옛것을 연구해 현재를 증거로 삼고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이다.
추사는 담계가 사망하는 1818년 이후에야 과거를 보고, 문과에 급제해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담계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닦는 것,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것이 관료로 출세하는 것보다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의 3대 거두로 평가되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성호 이익(星湖 李瀷),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淸에 한 번도 가지 않고 明(명) 시대의 서적을 통해 개혁안을 논의했던 것과 크게 다른 점이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린 19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학자다. 당시 청나라 지식인들이 추사와 교류하려고 할 정도로 그의 학문 수준은 높았다. 추사는 관료 생활을 하기 전에 금석학 분야에서 발군의 성과를 낸 뒤, 8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법(書法)을 확립했다. 또 초묵법(세한도는 초묵법으로 그려졌다)이라는 문인화 화법을 복원시켰다.
조선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선진국이었던 청나라의 최고급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적극 나섰던 추사 김정희. 그는 당대 최고 지식인인 담계를 만나고자 10년 동안 준비를 했고, 직접 만난 뒤에는 8년여 동안 편지로 학문을 교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