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유공권(柳公權)

水西散仁 2017. 2. 1. 10:58

유공권(柳公權)

(현비탑비 玄秘塔碑)

 

 

 

자는 성현(誠懸). 경(京兆) 화원(華原:지금의 산시 성

[陝西省] 야오 현[耀縣]) 사람으로 관직은 태자소사

(太子少師)에까지 이르렀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웠고, 당시의 필법을

두루 익혔는데, 글자체가 힘이 있고 아름다워 서예 분야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주로 안진경(顔眞卿)을 본받았으며, 구양순(歐陽詢)과 설요(薛曜)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안진경의 글씨에 살이 많다면 유공권의 글씨에는 뼈가 많아서 함께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이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커 '안유'(顔柳)라고 병칭되었다. 유공권의 대표작으로는

현비탑비 玄秘塔碑〉·〈신책군비 神策軍碑〉가 있다.

필사본으로〈왕헌지송리첩발미 王獻之送梨帖跋尾〉·

〈임왕헌지낙신부 臨王獻之洛神賦〉가 세상에 전한다.

寫盡八缸水(사진팔항수)  硯染澇池黑(연염노지흑)

博取百家長(박취백가장)  始得龍鳳飛(시득용봉비)

글씨 연습에 여덟 항아리의 물을 다 쓰고 벼루 씻은 물

큰 못을 검게 물들이며 널리 명필(名筆)들의 장점을

취한다면 비로소 용과 봉황이 나는 듯한 필력을

얻을 수 있으리

만당(晩唐)의 대서예가 유공권(柳公權)이 어린 시절 집

근처 화원성(華原城)에서 발(足)로 글씨를 쓰는

자화탕(字畵湯)이라는 노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자화탕이 그에게 써주었다는 문구이다. 

"붓을 사용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됩니다"

(用筆在心 心正則筆正). 당나라 목종(穆宗) 임금이 글씨 쓰는 방법을 물었을 때

유공권이 내놓은 유명한 대답이다.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는 그의 필체를 높이 평가해 "험준함 속에 생기가 있고,

힘은 우군(右軍: 왕희지)에 버금간다(險中生態 力度右軍)고 칭찬했다. 한다

후세 사람들이 필법을 말할 때면 중당(中唐)의 대서예가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을 앞세워 '안근유골'(顔筋柳骨)이라 하였다. 

-인터넷자료

 

 

-아랫글 출처-우석서예나라

 

유공권 (柳公權)의 해서(楷書)
흔히들 서예의 세계에서는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아는 온고지신의 진리를 학문연구의 자세로

삼기도 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서예연구의 자세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연구의 자세나 진리 탐구의 자세는 붓을 잡는 한, 평생 잊지 않고 지니고

실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본적 자세이다.

이러한 서예학문 연구자세의 소홀함에서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의 서예에서 가끔 발생하는

문제이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한 온고지신, 법고창신 등의 자세를 가지고 평생 붓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어찌 보면 고통일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 많은 훈련을 해야 하고 육체적 수련도 병행하는 삶 속에서 글씨를 연마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후학을 올바로 지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올바른 서법을 지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인격을 더불어 가르쳐야하기에 더더욱 서예인의 책임은 큰 것이다.

그들의 삶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내는 것도 또한 서예인의 책임이라면 책임인 것이다.


사실 그런 자세를 지키고 살아가려면 꼭 돈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는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예 연구한답시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보니 가족 부양할 능력이 되지 못하기도

하고 학원(91~2000년도)의 운영도 하지 못하여 급기야는 막노동수준인 공공근로까지

해가면서 몇 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동분서주한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더불어 많은 인생공부를 하게 된 동기도 되어 필자의

 삶의 자세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는 과거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혹 이 지면을 보게 된다면 일일이 만날 수는 없어도 서로 도움을 주신

어르신들, 그리고 선후배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 때의 그 동료애가 지금의 필자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꼭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맘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나의 서예가의 삶에 적용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역시 유공권의 해서를 공부하게 된 가장 최초의 시기는 구성궁예천명, 안탑성교서,

안근례비 등을 공부하던 시기로 그때에 이미 여러 법첩이나 또는 계간 서화 등의 이론지를

통해서 접하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그시기에 보았던 계간지를 찾아보니 간직되어 있어서 소

개하고 있는 유공권의 해서 황영곡을 필의를 살려 써 보았다.
평소 필자가 쓰고싶어하는 글씨가 곧 탄력성 있는 글씨인데 유공권의 해서에서

약간 보이는 듯하다.


필자가 직접 "유공권의 해서 황영곡"의 글씨를 쓰면서 느끼는 것은 매우 탄력성이

강한 글씨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어느 정도의 휘어짐이 있는 상태에서도 놓으면 제자리를 회복하는 탄력성은 인간의

모든 삶에 없어서는 아니 될 근간을 이루는 소중한 것들이다.
높이 오르기 위해 장대의 탄력을 활용하듯이, 멀리 그리고 정확히 적중시키기 위해

활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기듯 하는 그 탄력...... 그것은 인간이 보다 인간답게 사는 데

꼭 필요한 어떤 융통성에 비교될 수도 있고 탄력을 활용하여 보다 나은 자신을 가꾸어

나가는데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유공권의 해서를 감상하면서 느낀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필자의 글씨 또한 이러한 고도의 탄력성을 기르는데 중점적으로

공부할 것이다.


필자는 유공권의 해서를 볼 때 구양순의 해서와 안진경의 해서에서 취한 글씨라고 생각한 다. 그러나 아래 자료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역대 서예평론가들은 여러 서예의 대가들의 작품에서

골고루 취한 해서라고 평한다. 그러나 특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에서 가장 많이

적용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동방서범3집에 의하여 유공권과 그의 서예를 살펴보면
유공권 (778~865) 은 경조(京兆) 화원(華原, 지금의 陜西省 耀縣)사람으로 자는 성현이며

당나라 후기 해서에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평가받는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2세에 사부를 지었으며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헌종의 원화 연간(806~820) 초기에 진사에 급제하여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의종(懿宗)의 일곱 황제를 거치며 약 60년 동안 중앙의

관직에 몸담고 있었다. 목종이 즉위한 후 유공권은 한림시서학사(翰林侍書學士)의 관직을

받고 황제의 측서나 왕공대신들의 현판과 비문등을 대필하는 시서의 일을 하였다.


문종 시대에 스스로 시서의 일을 사직하고 우사랑중(右司郞中), 홍문관 학사 등의 관직에

나가 있었으나 다시 문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김자광녹대부(金紫光祿大夫), 국자제주( 國子祭酒), 공부상서(工部尙書) ,

태자사전(太子사傳)등 三품과 二품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함통(咸通) 육년(865) 88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황제의 시서의 역할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안근유골(顔筋柳骨)"이라는 말이 있다. 유공권의 서예를 평가할 때 흔히들 하는 말이다.

"안체는 근육이 뛰어나고 유체는 뼈가 뛰어나다"라는 것이다.
유공권의 해서는 종요(鍾繇)와 왕희지를 근본으로 하였고 초당삼대가와 륙간지(陸柬之)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구당서에 의하면 금강경비는 종요, 왕희지,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육간지의 서풍을

겸비하여 더욱 뛰어나다고 하였고 , 또 소식은 유공권의 서예는 안진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새로운 서풍을 창조하여 한 글자에 백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빈 말이 아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참고작품에 현비탑비를 실었다. 당나라 무종시대 회창(會昌)원년 (841)에 세워진

각비로 현재 협서성 서안의 비림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내용은 배휴(裵休)의 문장이고 유공권의 해서이며 소건화(邵建和)와 소건초(邵建初)가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64세 때의 글씨로 신책군비와 함께 그의 해서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필획이 굳세고 결구가 긴밀하나 경직되고 딱딱하다는 아쉬움이 있다지만 그러나 필자는

유공권의 해서를 감상하면서 고도의 탄력 있는 글씨와 인생을 엮어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