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삼황 - 태호 복희씨

水西散仁 2016. 9. 5. 16:13
삼황 - 태호 복희씨 역사

 

 

삼황오제는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최초의 제왕들이다. 그들은 사실상 부족, 부락, 부락연맹의 우두머리이지, 현대적 의미의 제왕은 아니다.

삼황오제는 시대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고대의 기록에만 보일 뿐 실제 문물이 출토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전설이나 신화속의 인물로만 인정되어 왔다. 1986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요녕성(遼寧省) 서부 산악지대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년 전의 대형 제단과 여신사당, 적성총군 등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출토된 문물에 의거하여 5000여년 전에 여기에 국가의 추형을 갖춘 원시문명사회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중대한 발굴은 중화문명사를 1000여년이나 앞당기고, 삼황오제의 전설에 대해서도 일차적인 증거들을 제공해주었다. 더욱 많은 문물의 출현을 따라서 삼황오제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 전설과 신화의 베일이 하나하나 벗겨지길 기대한다.

삼황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역대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

 

1.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보삼황본기(補三皇本記)」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2.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

3. 복희(伏羲), 여와(女娲), 신농(神農) :≪풍속통의(風俗通義)≫「황패편(皇覇篇)」

4.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 :≪통감외기(通鑒外紀)≫

5.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 :≪백호통(白虎通)≫

6.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황패편(皇覇篇)」에 인용된 ≪예위(禮緯)≫「함문가(含文嘉)」

7.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여기서는 제일 마지막의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의 설에 따라, 태호(太호) 복희씨(伏羲氏),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태호 복희씨

태호 복희씨는 성씨가 풍(風)이다. 전설에 의하면 150년간 재위하였으며 진(陳, 지금의 하남성 淮陽縣)에서 죽었다고 한다. 장지는 회양성(淮陽城,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서남) 북쪽 3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고대 동이족(東夷族, 고대 중국의 동방에 있는 각 부족의 총칭)의 유명한 우두머리였으며,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秦安縣 북쪽)에서 태어나 진(陳)에서 살았다. 그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일설에는 용의 몸)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다스린 부족은 뱀이나 용을 토템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는 음양의 변화 원리에 근거하여 팔괘(八卦)를 창제하고, 8종의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부호를 사용하여 천지간의 만사만물을 개괄하였다고 한다.

그는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고 그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고기잡이와 목축을 가르쳤다. 그는 또 "슬(瑟)"이라는 악기와 <가변(駕辯)>이라는 악곡을 만들었다. 이는 그당시에 인류문화의 서광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대(漢代)의 고적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에 의하면, 후대에 태호 복희씨는 동방의 천제가 되었으며, 나무의 신 구망(句芒)이 그를 보좌하였다고 한다. 복희는 손에 컴퍼스를 들고 봄과 생명을 관장하였다. 그가 나타날 때는 대지가 다시 소생하고 만물이 생장하는 봄이 도래하였다. 고대의 중국학자들은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라는 다섯 가지 사물로써 만물의 기원과 변화를 설명하였는데, 역대 제왕들은 항상 그 중에 하나를 취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맹춘기(孟春紀)」 고유주(高誘注)에 의하면, 복희는 살아서는 목덕(木德)으로써 천하의 왕이 되었고, 죽어서는 그를 동방에서 제사지내어 목덕(木德)의 천제가 되었다고 한다. 도교에서도 그를 동방의 천제라 일컫는다.

전설상으로는 원래 태호와 복희가 별개의 인물이었는데 선진(先秦)의 사관이 편찬한 ≪세본(世本)≫에서 처음으로 그 둘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태호 복희씨가 죽은 후에 그의 자손들은 회화(淮河) 북쪽 기슭을 따라서 동으로 뻗어나가, 황하 하류를 따라서 제수(濟水) 유역 일대를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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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황 - 염제 신농씨 역사

 

 
염제 신농씨는 성씨가 강(姜)이고 열산씨(烈山氏, 일설에는 여산씨)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140년간 재위하였다. 일찍이 그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보았는데, 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중독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은 차릉(茶陵, 지금의 호남성 차릉현)에 묻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상고시대 부락의 장으로 강수(姜水, 즉 岐水, 지금의 섬서성 鳳桑縣 북쪽 岐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姜氏城을 지난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진(陳)에서 살다가 뒤에는 동으로 뻗어나가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동북)에서 살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다스린 부락은 소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그는 동으로 나아가 판천(阪泉,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 동남)에서 황제(黃帝)와 충돌하여 일전을 벌였으나 패하였다. 뒤에는 다시 황제와 연합하여 치우(蚩尤)를 물리친 후에 부락을 이끌고 황하 유역에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염제 신농씨와 황제가 맺은 부락연맹은 화하족(華夏族)의 주요한 성분을 구성하였다. 화하족은 뒤에 다시 한족(漢族)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족의 후예를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염제와 신농은 원래 별개의 인물이었는데, 후에 ≪세본≫에서 처음으로 그 둘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회남자≫「수무편(修務篇)」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자편(자鞭)이라는 붉은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약초들을 때려서, 약초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효능이 뛰어난 약초를 골라내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산서성의 성양산(成陽山)에는 신농원(神農原)이라는 작은 산(藥草山이라고도 함)이 있는데, 당시에 염제 신농씨가 회초리로써 약초를 판별하던 장소라고 한다.

그는 또 직접 온갖 풀들을 먹어보고 그것들의 효능을 밝혔다. 한번은 그가 70여종의 독초를 맛보고 그 독성을 하나하나 제거하였다고 한다.

뒤에 그는 다시 극독이 있는 단장초를 먹고 중독되어 손도 쓰보지도 못한채 장이 끊어져서 죽고 말았다. 현재 산서성 태원시(太原市)의 신부강(神釜崗)에는 신농이 약초를 맛보던 전설상의 솥(鼎)이 남아있다.

명대에 주유(周游)의 ≪개벽연석(開벽衍釋)≫ 제18회 왕주승(王主承) "석의(釋疑)"에는 당시 사천(四川) 지구에 전해오던 민간전설이 하나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지네를 먹었는데 그것이 뱃속에서 많은 벌레로 변하여 구제할 길이 없자 결국 산채로 고통속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이것도 앞서 말한 전설과 유사한데, 모두 염제 신농씨가 인류를 위해 헌신한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염제 신농씨가 죽은 후에 그의 후손들은 8대까지 560여년간 이어져오다가 유강(楡岡)에 이르러 대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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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황 - 황제 역사

 

 

황제(黃帝)는 성이 희(姬, 일설에는 公孫이라고도 함)이고, 호는 헌원씨(軒轅氏) 또는 웅씨(熊氏)이다. 약 4000여년 전 황하유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부락연맹의 장으로,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존되어 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100여세까지 살다가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100년간 재위에 있었고 111세까지 살다가 형산(荊山, 지금의 하남성 靈寶縣 문향진 남쪽, 覆釜山이라고도 함)의 남쪽에서 죽었으며, 상군(上郡) 교산(橋山, 지금의 섬서성 黃陵縣 서북의 橋山)에 묻혔다고 한다.

황제는 헌원(軒轅)의 언덕(지금의 하남성 新鄭縣 서북)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유웅(有熊, 지금의 하남성 신정현 서북)에 살면서 관명을 운(雲)이라 하였다. 그의 부락과 염제 신농씨의 부락은 원래 서북고원에서 함께 생활하던 소전씨(少典氏)의 후손들이다. 뒤에 황제는 여기에서 떨어져 나와 동으로 나아가 염제를 물리치고 염제의 부락과 합병하여 부락연맹을 결성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에 구려족(九黎族, 고대 남방의 부락명)의 우두머리 치우(蚩尤)는 성미가 사납고 흉폭하여 항상 다른 부락을 침략하곤 하였다. 마침 치우가 염제를 공격하자 염제는 그에게 패하여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염제가 탁록에서 치우와 결전을 벌였을 때, 황제는 6개의 부락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치우에게 맹공을 펼쳤다.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용맹하면서도 흉폭하였으며, 부하들도 칼, 창, 활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가 대단히 격렬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치우가 요술을 부려 콧구멍에서 짙은 안개를 뿜어냈다. 그 순간 천지가 어두컴컴해지고 광풍이 세차게 일어나 번개가 치기를 3일간, 치우의 부하들은 여세를 몰아 사납게 돌진하였다. 이에 황제의 부하들은짙은 안개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방향을 잃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즉시 풍후(風后)에게 지남차(指南車)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작은 철인을 세워두고 팔을 뻗어 남쪽을 가리키게 했다. 이에 방향을 식별할 수 있게 된 황제의 병사들은 안개를 뚫고 돌진하여 구려족을 격퇴하고 치우를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황제는 염황(炎黃) 부락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었다.

황제시기에는 매우 많은 물건들을 발명하였으니, 방직, 배, 수레, 집, 문자, 음율, 산수, 역법, 관, 그릇 등이 그것이다. 춘추후기부터 그는 중국민족의 시조로 추존되었다.

≪포박자(抱朴子)≫「극언편(極言篇)」에서는 ≪열선전(列仙傳)≫의 전설을 인용하여, 황제가 만년에 이르러 자기가 직접 죽을 날을 택했다고 하였다. 이 날에 이르러 그는 신하들과 사별한 후 교산(橋山)에 묻혔다. 얼마 후 무덤이 갑자기 무너져내렸는데 무덤속에 시신은 없고 그의 검과 신만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도 전설이 전해오는데, 황제가 100세 되었을 때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寶鼎)을 주조하였다. 보정이 완성된 후에 하늘에서 한 마리 용이 내려와 그를 맞이하자 그는 바로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많은 신하들은 그와 함께 승천하려고 필사적으로 용의 수염을 잡았다고 한다.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는 황제가 100년간 재위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황제의 무덤은 섬서, 감숙, 하남, 하북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 중에서 섬서 황릉현(黃陵縣) 북쪽 교산(橋山) 정상에 있는 황릉(黃陵)이 가장 유명하다.

≪국어(國漁)≫「晋語)」에 의하면, 황제의 자손 25명 중에서 14명은 12개의 성을 형성하였으며, 요(堯), 순(舜)과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제왕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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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제 - 소 호 역사

 

 
오제에 대해서도 역대로 그 설이 분분하여 그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5종의 설이 있다.
 
1.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당요(唐堯),우순(虞舜) :[황왕대기(皇王大紀)]
2. 황제(黃帝),전욱(颛顼),제곡(帝喾),당요(唐堯),우순(虞舜) :[세본(世本)],[사기]
                                                                                         [대대례(大戴禮)]「오제본기」
3. 태고(太皋:복희), 염제(炎帝),황제(黃帝), 소고(少皋),전욱 :[예기(禮記)],「월령(月令)」
4. 소호(少昊),전욱(颛顼),고신(高辛),당요(唐堯),우순(虞舜)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帝王世紀)]

5. 황제(黃帝),소고(少皋),제곡(帝喾),제지(帝摯),제요(帝堯):[도장(道藏)],「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 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무帝)의 말

 
여기서는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등의 설에 따라, "소호(少昊),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소호

소호는 성이 이(已, 일설에는 영<瀛-水>이라고도 함), 이름이 지(摯), 호가 금천씨(金天氏) 또는 궁상씨(窮桑氏), 청양씨(靑陽氏)이다. 전설에 의하면 100세까지 살았으며 84년간 재위했다. 엄(奄,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에서 죽고 운양산(雲陽山,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서남)에 묻혔다고 한다

소호는 전설상에서 태호 복희씨를 계승하여 일어난 고대 동이족의 장이다. 처음에는 궁상(窮桑,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동북)에 살다가 뒤에는 청양(靑陽, 지금의 안휘성 청양현)로 옮겨가서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제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기(玄器)이고 어머니는 누조(루祖, 루=女+累)이다. 그의 부락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관직명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높은 관직은 봉황(鳳凰), 형벌을 다스리는 관직은 응(鷹), 병권을 가진 관직은 취(鷲)라 하였으며, 또 농정(農正), 공정(工正)이라는 관직도 두어 농업과 수공업을 관리하게 하였다.

소호의 부락은 24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엄(奄)을 중심으로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소호지국(少昊之國)"이라 일컫는다.

≪회남자≫「시칙편(時則篇)」에 실려있는 전설에 의하면, 소호는 뒤에 아들 구망(句芒)을 태호 복희씨의 보좌관으로 남겨두고, 자기는 다른 아들 욕수(욕收, 욕=艸+辱)를 데리고 서방으로 가서 서방의 천제가 되어, 곤륜사막에서 "삼위지국(三危之國,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에 이르는 12000리의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소호는 장류산(長留山)에 살면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동쪽으로 반사되는 빛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살폈으며, 아들 욕수도 부근의 유(유=水+幼)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서차삼경(西次三經)」에서는 해가 서쪽으로 질 때 주변이 넓게 확 트이면서 저녁노을이 하늘의 반쪽을 붉게 물들이자, 소호는 그것을 원신(員神)이라 칭하였고, 욕수도 그것을 홍광(紅光)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소호가 죽은 후에 그의 자손들은 산동반도에서 강회(江淮)유역을 따라 번성하였다. 춘추시기의 담(담=炎+우부방)나라와 주(周)나라 조정의 왕족은 모두 그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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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제 - 소 호 역사

 

 
오제에 대해서도 역대로 그 설이 분분하여 그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5종의 설이 있다.
 
1.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당요(唐堯),우순(虞舜) :[황왕대기(皇王大紀)]
2. 황제(黃帝),전욱(颛顼),제곡(帝喾),당요(唐堯),우순(虞舜) :[세본(世本)],[사기]
                                                                                         [대대례(大戴禮)]「오제본기」
3. 태고(太皋:복희), 염제(炎帝),황제(黃帝), 소고(少皋),전욱 :[예기(禮記)],「월령(月令)」
4. 소호(少昊),전욱(颛顼),고신(高辛),당요(唐堯),우순(虞舜)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帝王世紀)]

5. 황제(黃帝),소고(少皋),제곡(帝喾),제지(帝摯),제요(帝堯):[도장(道藏)],「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 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무帝)의 말

 
여기서는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등의 설에 따라, "소호(少昊),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소호

소호는 성이 이(已, 일설에는 영<瀛-水>이라고도 함), 이름이 지(摯), 호가 금천씨(金天氏) 또는 궁상씨(窮桑氏), 청양씨(靑陽氏)이다. 전설에 의하면 100세까지 살았으며 84년간 재위했다. 엄(奄,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에서 죽고 운양산(雲陽山,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서남)에 묻혔다고 한다

소호는 전설상에서 태호 복희씨를 계승하여 일어난 고대 동이족의 장이다. 처음에는 궁상(窮桑,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동북)에 살다가 뒤에는 청양(靑陽, 지금의 안휘성 청양현)로 옮겨가서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제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기(玄器)이고 어머니는 누조(루祖, 루=女+累)이다. 그의 부락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관직명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높은 관직은 봉황(鳳凰), 형벌을 다스리는 관직은 응(鷹), 병권을 가진 관직은 취(鷲)라 하였으며, 또 농정(農正), 공정(工正)이라는 관직도 두어 농업과 수공업을 관리하게 하였다.

소호의 부락은 24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엄(奄)을 중심으로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소호지국(少昊之國)"이라 일컫는다.

≪회남자≫「시칙편(時則篇)」에 실려있는 전설에 의하면, 소호는 뒤에 아들 구망(句芒)을 태호 복희씨의 보좌관으로 남겨두고, 자기는 다른 아들 욕수(욕收, 욕=艸+辱)를 데리고 서방으로 가서 서방의 천제가 되어, 곤륜사막에서 "삼위지국(三危之國,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에 이르는 12000리의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소호는 장류산(長留山)에 살면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동쪽으로 반사되는 빛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살폈으며, 아들 욕수도 부근의 유(유=水+幼)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서차삼경(西次三經)」에서는 해가 서쪽으로 질 때 주변이 넓게 확 트이면서 저녁노을이 하늘의 반쪽을 붉게 물들이자, 소호는 그것을 원신(員神)이라 칭하였고, 욕수도 그것을 홍광(紅光)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소호가 죽은 후에 그의 자손들은 산동반도에서 강회(江淮)유역을 따라 번성하였다. 춘추시기의 담(담=炎+우부방)나라와 주(周)나라 조정의 왕족은 모두 그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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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제 - 전 욱 역사

 

 

전욱(颛顼) 은 성이 희(姬), 호가 고양씨(高陽氏)이다. 전설에 의하면 98세가지 살았으며 78년간 재위하였다. 동군(東郡) 복양(복陽, 복=水+僕) 돈구성(頓丘城) 밖 광양리(廣陽里,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서남)에 묻혔다. 죽은 후에는 다시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어부(魚婦)"로 화하였다고 한다.

전욱은 전설상의 염황연맹(炎黃聯盟)의 장으로, 고양(高陽, 지금의 하남성 杞縣 서쪽)에 살았다. ≪산해경≫「오장산경(五藏山經)」과 ≪국어≫「초어(楚語)」에서는 그가 황제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의 후손으로, 어머니는 촉산씨(蜀山氏)의 딸 창부(昌부, 부=人+卜)라고 하였다. 그는 약수(若水, 즉 아롱강으로 지금의 사천성 영經縣내에 있음)에서 태어나 제구(帝丘,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서남)에서 살았다.

 

그는 어릴 때 일찍이 숙부의 "소호지국(少昊之國)"을 유람하고 10세 때부터 국정을 보좌하였으며, 20세 때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에 황제에게 정복된 구려족은 여전히 그들의 무속신앙을 신봉하면서 잡신을 섬기고 있었다. 전욱은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 명령을 내려 무속신앙을 금지시키고, 구려족을 황제족의 교화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는 또 인사를 중시하고 농업을 발전시켰다.

당시 염제의 후손 공공(共工)과 전욱이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격전을 벌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오가며 싸우다가 서북쪽의 부주산(不周山)에까지 가서 싸웠다. 부주산은 적황갈색 암석층으로 조성된 산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하늘까지 닿아 있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는데, 그것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이다. 공공은 결국 패색이 짙어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세게 부주산을 들이받아 이 거대한 기둥은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에 하늘은 버팀목이 없어져 서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들이 모두 서쪽으로 운행하게 되었다. 동남쪽의 대지는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깊은 구덩이가 생겼는데, 이로부터 크고 작은 강물들의 흐름도 모두 동남쪽으로 기울어진 채 바다로 흘러갔다.

≪상서(尙書)≫「여형(呂刑)」에 의하면, 전욱은 치우 같은 자가 또 나타나 자기에게 대항할 것을 염려하였다. 신과 인간이 합심하여 위 아래에서 협공한다면 그의 통치지역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손자 대신중(大神重)과 여용력(黎用力)에 명하여 신과 인간이 상하를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있는 하늘과 땅을 벌어뜨려 멀리 떼어내도록 했다. 이때부터 하늘과 땅은 서로 통할 수 있는 길이 단절되고 신과 사람도 분리되어, 신은 이따금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으나 인간은 하늘로 오를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남정(南正)에게 명하여 천신에 대한 제사를 관장토록 하고, 북정(北正)에게 명하여 민정을 돌보게 했다. 이 전설은 당시에 인간과 신의 일을 분담함으로써 원시종교가 신권(神權)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욱은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여, 어릴 때 숙부 소호(少昊)는 그를 위해 금슬(琴瑟)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성인이 된 후에 바람에 불리는 각종 소리를 본따서 <승운지가(承雲之歌)>를 제작하여 연주하게 했다.

전욱의 무덤은 여러 곳에 있었는데, ≪사기· 오제본기집해(五帝本紀集解)≫「황람(皇覽)」에 의하면 그것은 동군(東郡) 복양 돈구성(頓丘城) 밖 광양리(廣陽里)에 있다.

≪산해경≫「대황서경(大荒西經)」에 의하면, 전욱이 죽은 후에 북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지하의 샘을 밖으로 분출시켰다. 이때 뱀이 물고기로 변하였다. 죽은 전욱은 뱀이 물고기로 변하는 순간에 물고기의 몸에 붙어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가 되었는데, 사람 모양을 한 반쪽은 이미 쓸모없게 되었고, 물고기 모양을 한 반쪽만 제 기능을 하여,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어부(魚婦)"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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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제-제곡 역사

 

 

제곡(帝喾)은 성이 희(姬), 이름은 제고(帝고, 고=人+告) 또는 준(俊-人)이라고도 하며, 호는 고신씨(高辛氏)이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까지 살았으며 70년간 재위하였다. 장지는 복양 돈구성 밖 남쪽의 대음야(臺陰野,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부근)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지금의 하남성 청풍현(淸豊縣) 서남쪽이라기도 하고, 지금의 하남성 준현(濬縣) 서쪽이라기도 한다.

제곡은 전설상의 염황연맹의 장으로 황제의 장남 현효(玄효)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소호, 아버지는 교극(교極, 교=忠+喬)이며 전욱의 가까운 친척이다. 15세 때 전욱을 보좌하여 신(辛, 현재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음)에 봉해져 족형제의 아들에 세워졌다. 그가 다스린 부락은 8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30세 때 부락의 장이 되어 박(지금의 하남성 偃師縣 서쪽, 殷 또는 尸鄕이라고도 하였음)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전욱과 왕위를 놓고 쟁탈하였다가 패한 염제의 후손 공공(共工)이 다시 왕위를 노렸다. 이에 제곡은 공공과 치열한 접전을 거쳐 그를 물리쳤다.

≪대대례(大戴禮)≫「오제덕(五帝德)」에 의하면, 제곡은 "봄과 여름에는 용을 타고 가을과 겨울에는 말을 타고 타녔으며", 봉조(鳳鳥)와 천적(天翟)을 불러와 춤을 추었다. 그는 하루종일 서로 싸우기만 하는 두 아들을 상성(商星)과 삼성(參星)으로 보내어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후에는 다시 그 둘을 두 개의 별로 변화시켜 서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각각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게 했다. 그의 아내들은 모두 태양을 집어먹을 수 있었는데, 태양을 하나 먹을 때마다 아들을 한명씩 낳았다. 아내 강원(姜원, 원=女+原)은 주족(周族)의 선조가 된 아들 기(棄, 즉 后稷)를 낳았고, 아내 간(簡)은 상족(商族)의 선조가 된 아들 설(契)을 낳았으며, 아내 경도(慶都)는 요(堯)를 낳고, 아내 상의(常儀)는 지(摯)를 낳았다.

제곡이 병으로 죽자 아들 지가 부락연맹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지는 황음무도하고 공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각 부족의 족장들에 의해 쫓겨났다. 그리하여 그의 동생 방훈(放勛, 즉 요임금)이 장으로 추대되었다.

제곡이 별을 부렸다는 전설은 그 당시에 이미 간단하나마 시간과 절기를 관찰하는 방법을 가지고 농업에 응용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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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제 - 당 요 역사

 

 

요(堯)는 성이 이기(伊耆), 이름은 방훈(放勛), 호는 도당씨(陶唐氏)이며, 제요(帝堯)라고도 하고 당요(唐堯)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유명한 성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118세까지 살았으며 98년간 재위했다고 한다.

장지는 제음성(濟陰城, 지금의 산동성 河澤縣 경내) 남쪽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만년에 순(舜)에게 왕위를 뺏기고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臨汾縣)으로 추방되었다고도 한다.

 

요는 전설상 부계 씨족사회 후기의 염황연맹(炎黃聯盟)의 장이며 제곡의 막내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봉씨(陳鋒氏)의 딸 경도(慶都)이다. 요는 13세 때 도(陶,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 南陶丘)에 봉해지고, 15세 때 다시 당(唐, 지금의 하북성 唐縣 서북)에 봉해졌다가, 16세 때 부락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어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요는 사람들에게 가장 모범적인 성군으로 인식되었으며, 생활이 검소하고 일처리가 공정하며 백성들을 잘 이해하였다. 그는 어질고 덕망있는 사람들을 초빙하여 국정을 보좌케 하였다.

그리하여 후직(后稷)은 농사(農師)를, 수(人+遂)는 공사(工師)를, 고요(皐陶)는 법관을, 기(夔)는 악관(樂官)을, 순(舜)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를, 설(契)은 군대를 담당하는 사마(司馬)를 각각 맡았다. 이리하여 천하는 태평해지고 비와 바람도 순조로와져, 백성들은 모두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또 희(羲)와 화(和)에게 명하여 천문과 절기를 관장케 하고 역법을 제정하였다. 또 항상 각 부락의 장들에게도 널리 의견을 구하였으며, 곤()에게 치수를 맡겼다. 만년에 그는 순을 후계자로 추천하려 하였는데, 장남 단주(丹朱)가 불복할까 염려되어 단주를 남쪽의 단수(丹水) 일대로 추방하고 후직에게 감독토록 명하였다.

그후 단주가 삼묘(三苗)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요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반란을 평정했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였든지 하수(河水)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요는 마침내 단주를 사로잡았으며, 단주는 요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요는 단주에게 이르기를, "나는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네 개인의 이익과 바꿀 수 없다."고 한 후, 단호하게 단주를 사형에 처하고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부락의 장을 선출할 때 취하는 이러한 방식을 역사에서는 "선양(禪讓)"이라 일컫는다.

≪상서(尙書)≫「요전(堯典)」에 의하면, 요는 대단히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登封縣 동남)에서 병으로 죽었을 때, 백성들은 그를 부모상처럼 장례를 지내고 자신들의 친부모가 돌아간 것처럼 슬퍼하였다고 한다.

≪산해경≫「해내남경(海內南經)」에서는 요가 만년에 이르러 영명함을 잃고 사사로이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순이 그에 불복하며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사기≫「오제본기」정의(正義)에서는 ≪고서죽본기년(古書竹本紀年)≫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순은 요를 감옥에 가두고 단주가 그의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하였다. ≪사통(史通)≫「의고편(疑古篇)」에서는 ≪고본죽서개년≫을 인용하여, 순이 뒤이어 "요를 평양(平陽)으로 추방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하였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얼마전 산서성 양분현(襄汾縣) 경내에서 처음으로 요순 시기의 성터를 발견했다. 이로써 중국민족의 기원은 약 천년이나 앞당겨지게 되었다. 옛성터는 산서성 임분(臨汾) 지구 양분현 도사촌(陶寺村)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이 바로 중화민족 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요도(堯都)"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전설상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삼황오제에 대한 이야기도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더 중국의 고고발굴을 지켜봐야 될 것이다.

1911년 11월 11일, 중국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서는 요궁(堯宮) 낙성식과 대규모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요의 문화와 사상을 더욱 발전 계승하기 위하여 매년 3월 29일을 요의 제사일(祭堯日)로 지정하였다. 이날에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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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제 - 우순 역사

 

 

순(舜)은 성이 요(姚), 일설에는 규(女+爲), 이름은 중화(重華)이며, 역사에서는 그를 우순(虞舜)이라 칭한다. 전설상의 유명한 성군의 한 사람으로 50년간 재위했다. 남쪽으로 순행하던 도중에 창오(蒼梧, 지금의 호남성 寧遠縣 동남)에서 10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 시신은 구억산(九억山,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 기슭에 묻혔다. 일설에는 우(禹)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창오로 추방되어 죽었다고 한다.

 

순은 유우씨(有虞氏) 부락의 장이자 염황연맹의 장이다. ≪맹자(孟子)≫「이루편」에 의하면, 그는 제풍(諸馮, 지금의 산동성 諸城縣)에서 태어나 동이족에 귀순하여 우(虞, 지금의 하남성 虞城縣 북쪽)에서 살았다.

순은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고수는 장님이었다. 순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버지 고수는 재혼하였다. 순의 계모는 남동생 상(象)과 여동생 과수(과手)를 낳았다. 고수는 어리석고 멍청하여 후처와 그녀의 자녀만 좋아하고 순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모는 속이 좁고 악랄하였으며, 남동생 상도 성격이 거칠고 흉폭하였다. 그들은 항상 순을 학대하였다.

순은 성인이 된 후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역산(歷山, 지금의 산서성 芮城 서북, 즉 中條山, 雷首山이라고도 함) 기슭에 혼자 초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순은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와 이웃이 되려고 찾아와 얼마 안되어 그곳은 사람들의 집거지가 되었다.

이때 요는 나이가 너무 많아 각 부락의 장들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자기의 후계자를 추천토록 했다. 모두들 순의 미덕을 칭송하면서 순을 추천했다. 요는 일단 순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고,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는 그에게 창고를 지어주고 양떼를 주었다.

순의 계모와 남동생 상은 그가 단번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에 고수를 설득하여 순을 죽이고 그의 재산을 탈취할 계략을 꾸몄다.

한번은 고수가 순을 불러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게 했다. 순이 지붕에 올라가자 상은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불을 질러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순은 그의 아내가 준 두 개의 삿갓을 양손에 들고 팔을 펼쳐서 새처럼 날개짓하여 땅으로 내려와서 위기를 벗어났다.

상은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새로운 계략을 꾸몄다. 하루는 고수가 또 순을 불러 우물을 치게 했다. 순이 공구를 가지고 밧줄에 몸을 묶어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자 고수와 상은 곧바로 밧줄을 끊어 버리고, 우물속으로 돌과 흙덩이를 퍼부어 우물을 메웠다. 그리고는 그들은 순의 집으로 달려가서 순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순은 안전하게 우물밖으로 빠져나왔다. 고수와 상은 크게 놀라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물러갔다. 이때 순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물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우물벽에 바싹 붙어 있다가 구멍을 뚫고 나왔던 것이다.

며칠 후 상이 순의 집으로 찾아와서 이르기를, "지난 두 번의 일은 정말 형에게 미안하게 됐소. 오늘 특별히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용서를 청하고자 하니 자리에 참석해주시오."라고 하였다. 순의 이복 여동생 과수는 부모와 상이 이처럼 악독하게 순을 해치려 하는 것을 보고 순을 매우 가련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상이 순에게 술을 먹인 다음 그를 베어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사실을 순과 순의 아내에게 몰래 일러주었다. 그러자 순의 아내는 즉시 약 한첩을 가지고 와서 순에게 그것을 먹고 그 자리에 참석토록 하였다. 술자리가 시작되자 그들은 순에게 계속 술을 권하였으나 그때마나 순은 한번에 술을 쭉 들이켰다. 술과 안주를 다 먹은 후에도 순은 아내가 준 약 덕택으로 멀쩡할 수 있었지만, 상은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만취하여 순을 빤히 쳐다보면서 어쩌지도 못하고 나갔다. 비록 이런 일이 있었지만 순은 결코 원한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여전히 옛날과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동생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요는 순이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동생을 돌보는 것을 본 후, 그가 반드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고 그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였다. 순은 왕위를 물려받은 후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뵙고 상을 유비(有鼻, 지금의 호남성 零陵縣)에 봉했다. 그후 고수와 상은 자신들을 이토록 극진히 대하는 순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개과천선하여 순과 화목하게 지냈다.

순은 왕위를 이어받길 전후하여 사방을 순행하여, "사흉(四凶)"이라 일컬어지던 곤(魚+系)과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를 제거하였다. 그는 각 부락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우(禹)에게는 치수를, 설(契)에게는 백성 관리를, 익(益)에게는 산과 연못의 관리를, 고요(皐陶)에게는 사(士)를 각각 맡곁다. 그 후 순은 우(禹)를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하였다.

순이 만년에 이르렀을 때 남방의 묘인(苗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아황과 여영을 데리고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상수(湘水)에 이르러 그는 아황과 여영을 거기에 남겨두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전진하였다. 창오(蒼梧)에 도착했을 때 순은 갑자기 병이나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으며, 구억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아황과 여영은 이 비보를 접하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상수를 따라 내려가면서도 계속 피눈물을 흘렸다. 이때 피눈물이 대나무에 뿌려져 대나무를 얼룩얼룩하게 물들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상비죽(湘妃竹)이라 일컬었다. 마침내 아황과 여영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상수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강가에 사당을 짓고 그녀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두 여인은 모두 상수의 신이 되었는데, 아황은 상군(湘君)이 되고 여영은 상부인(湘夫人)이 되었다고 한다.

 

순의 남동생 상은 그의 죽음을 접하고 먼길을 달려와 무덤 앞에서 슬피 울면서 참회를 했다. 그후 그는 큰 코끼리로 변화여 그 주위에서 논밭을 갈았다. 후세 사람들은 순의 무덤 부근에 "비정(鼻亭)을 짓고 그를 기념했다.

≪사기≫「하본기(夏本紀)」와 ≪맹자≫「만장(萬長)」에서는 순이 만년에 옛날의 영명함을 잃어 버리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들 상균(商均)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우는 여기에 불복하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순을 창오(蒼梧)로, 상균을 양성(陽城)으로 추방한 다음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하였다.

≪맹자≫「이루편」에서는 순이 명조(鳴條, 지금의 하남성 登封縣 부근)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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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夏)의 창시자 우왕(禹王) 역사

 

 

우(禹)는 성이 사(女+以), 이름이 문명(文命)이며,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순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하왕조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8년간 재위하였으며 과로로 죽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100세까지 살다가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紹興縣 경내)에 묻혔고 한다.

우는 전욱의 증손이자 곤(語+系)의 아들로 하후씨(夏后氏) 부락의 장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의 실패로 피살된 후에 순(舜)은 우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계속 치수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우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상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용을 중시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치수에 실패한 아버지의 교훈을 거울삼아 철저한 현지 조사를 거쳐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제거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직접 공사현장을 감독하면서 동분서주 한 결과 13년만에 홍수를 정복하였다. 이 13년 동안에 그는 세 번이나 자기의 집앞을 지나갔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첫 번째 집앞을 지날 때 그는 아기를 낳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내의 신음소리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우의 부하는 그에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했지만 그는 시간을 지체하다 치수를 그르치게 될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아내의 품에 안겨 그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손으로만 응답하고 그냥 지나갔다. 세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달려와 그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그는 치수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치수에 임하는 자세와 그 성과로 우는 많은 민심을 얻어 염황부락연맹의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순이 죽은 후 그는 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우의 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전해오고 있다. 즉 곤과 우 부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치수를 하여 두 사람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곤과 우의 신위를 함께 모셔두고 3대를 함께 제사지냈다. 치수 방면에서는 두 사람의 역량이나 성과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곤이 피살된 것은 우가 부락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요순(堯舜) 시대는 부계씨족사회의 말기였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요순은 보수세력의 대표이고, 곤은 신흥세력의 대표였다. 곤의 모든 행위는 씨족사회의 낡은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였으며, 특히 그는 폭력으로써 "선양(禪讓)"이라는 민주적인 제도를 위협하면서 요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기도하였다. 이에 요는 극도로 분노하여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곤을 사형에 처했다.

우는 아버지가 피살된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총명하게 처신했다. 그는 매사에 공손하고 신중하면서 순의 명령을 잘 이행하여 마침내 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순은 곧바로 왕위를 그에게 선양하였다.

우는 부락연맹의 장이 된 후에도 여전히 직무에 충실하면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였다. 그는 농사를 중시하여 관개수로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정치세력도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확대되었다. 우는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성 禹縣)에서 살았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이미 군대, 관리, 형벌, 감옥 등의 공권력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때에 이미 초기 형태의 국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수의 정복의 기념하기 위하여 우는 당시에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청동으로써 9개의 솥(鼎)을 만들고 그 위에 구주를 대표하는 기이한 동물들을 주조하여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는 만년에 이르러 각 부락 장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고요(皐陶)를 그의 후계자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요가 요절하자 다시 고요의 아들 백익(伯益)을 후계자로 삼았다.

우는 왕위에 있은 지 8년째에 각 부락의 장들을 묘산(苗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경내)으로 불러모았다. 모두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우에게 각자 예물을 바쳤다. 우는 부하에게 명령하여 예물의 수를 확실히 세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후세 사람들은 묘산을 회계산(會稽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회에서 남방의 방풍씨 부락(防風氏部落, 지금의 절강성 德淸縣)의 장이 늦게 도착하였다. 우는 크게 노해 있는데 방풍씨는 자신의 힘만 믿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지라 즉시 그를 끌어내려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 후 사형에 처했다.

집회가 끝난 후 우는 과로한 탓에 앓아눕고 말았지만 여전히 병을 무릅쓰고 업무를 처리했다. 이해 8월 회계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은 평소 검소했던 그의 생활신조에 따라 단지 3벌의 옷과 3촌(寸)의 박관(薄棺)으로 그를 장사지내고 회계산에 안장하였다.

출처 : khy500500
글쓴이 : 올드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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