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유리론(唯理論)에 대하여
***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유리론(唯理論)에 대하여 ***
노사 기정진(1798-1879)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8세때, 전남 장성으로 이거하여, 강학하였던, 한말의 철학자요, 사상가다.
그가, "퇴계", "율곡", "화담", "한주", "녹문" 등과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리어지고,
세간에, “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이라는, 철종의 감탄이 전해지듯,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한쪽 눈을 실명하고도,
영특한 머리와 굳은 의지로, 독특한 학문을 성취한, 경세가 이기도하다.
조선조, 말기 사람으로,
주자학의 리기론(理氣論)을, 리(理)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기(氣)를, 리(理)에 종속시켰다.
이것을, "유리론"(唯理論) 이라 부른다.
리(理)를, 상대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이론은,
일찍이, 퇴계 이황이, 사단칠정을, 논의하는 가운데서, 주장하였다.
이것이, "도덕론적 주리론" 이다.
이 논의에서, 이황은,
태극(太極)의 리(理)의,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하였으므로,
이러한 발상은, "종교론적 주리론" 이라 부를 수 있다.
기정진의 유리론(唯理論)도,
이러한 종교론적 주리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리(理)는, 기(氣)와는, 상대가 안될 만큼, 존귀하고,
기(氣) 보다, 앞서 존재하고 있다고 한 것이나,
혹은, 리(理)를, '천명'이나, '씨앗'에 비유하여 말한 것 등은,
모두, 그의 유리론(唯理論)을 증명하는, 언표들이다.
또, 그가, 주자학에서, 우주 만물의 보편성과, 특수성(개별성)을 나타내는,
중요 명제인, "리일분수"(理一分殊)를, 새롭게 해석하여,
"리함만수", 혹은, "리분원융"(理分圓融)을 주장한 것은,
그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퇴계의 리일분수에 대해, 부족한 이론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의 주장은,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리일분수(理一分殊)는,
리(理)는, 보편성의 원인,
기(氣)는, 특수성의 원인으로, 각각 보기 때문에,
리(理)와 기(氣)를, 지나치게, 나누어 보는 것이라 비판하고,
리(理) 속에, 이미, 특수의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리함만수" 이며, "리분원융" 이다.
이러한, 노사의 리일분수 해석은,
바로, 그의 "존리론"(尊理論)에서 연유하였다.
원래, 주자의 리기론(理氣論)은,
"유기체 우주론"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으로서,
리기론에서, 태극(太極)은, 리 중의 리, 즉, 궁극자라고 하고,
또, 태극은, 만물에 대해, 초월성과 내재성이, 같이 있다고 하는, 설명은 있으나,
태극과 리와의 관계, 또, 리와 기와의 구체적 관계 등에 대한, 설명은 미흡하다.
이러한, 이론적 공백 속에서,
노사는, "태극의 리"와, "개별 존재의 리"를, 구분하지 않고,
리를, 강조하였는데, 실은, 태극의 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유리론은, 유신론적 종교 체계가 아닌,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서, 주희의 태극론을 통하여,
종교적 경외심을,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 시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실학사상의 발전으로, 이미 전통적인 사유방식인, 성리학(주자학)이,
시대 추세와 맞지 않아, 개명적인 유학자들이, 진로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노사의 소위, 유리론이라는, 성리학적 사유는,
매우 보수적인 사상으로서,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性理學) 사유 중에서도,
리(理)를 높이는,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주장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리론(唯理論)이라고 할 때,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유리론이라 하더라도,
기(氣)를 배제한 채, 리(理)만으로, 이 세계를 설명하는 식의, 사유방식은 아니고,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라는, 성리학 기본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전제 위에서,
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을 강조하여, 유리론이라 이름한 것이다.
물론, 이 명칭에 반대하고, "철저한 존리론(尊理論)",
혹은, "리일원론화"(理一元論化)라는,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한다.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전제 위에서,
리를,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주리론의 연장선상에서,
리를, 극단적으로, 더욱, 강조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소위, 주리론과의 동이점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 위에서 벌어진,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쟁과,
그 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대표자로 하여 형성된,
"주리론(主理論)" - "주기론(主氣論)의 맥락과는, 완전히 같지 않다.
이황의 처음에, "사칠리기호발설"(四七理氣互發說)(이하 '호발설'이라 약함)의 의도는,
리(理)와 기(氣)를, 선(善)과 악(惡) 처럼 대립시켜,
입론하려는, 가치적 관점이었지만,
호발설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리(理)의 극존무대설(極尊無對說)"은,
절대적 리(태극)에 대한 경외와, 유사한 것이어서,
이것은, 존리론(尊理論)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절대자에 대한 관심"과,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기정진의 유리론도, 그러한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유리론(唯理論)을, 존리론(尊理論)이라 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이제까지 통용해 온, '유리론'과 병용하였다.
이러한, 노사의 성리설(性理說)은,
선배 학자들의 여러 성리설(性理說)을, 주해(註解)하는 가운데서, 성립되었다.
즉,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율곡 이이의, "리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비판하고,
도덕론적 측면에서는,
퇴계 이황의, "호발설"(互發說)과, 이이의 "사칠배속설(四七配屬說),
그리고, 당시 학계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등을 비판하면서,
자기의 설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그 비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성리설의 특징은 존재론 측면에서 리를 극히 강조한 점, 즉 '존리설'과 성리학의 리일분수설을 '理分圓融說'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의 배경은 성리학 속에 감추어진 '太極論'이 갖는 종교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존리론은 성리학의 종교적 절대자, 혹은 형이상학적(존재론적) 궁극자에 해당하는 '태극'의 리에 대한 종교적 경외라고 볼 수 있다. 유신론 체계가 없는 성리학에서 태극론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비교하여 말하면 형이상학적 神觀과 유사하고, 또 태극은 과정철학의 신과 위상이 비슷하다.
그 보다 약 1세기가 앞선 인물로 鹿門 任聖周(1711-1788)가 있다. 그는 소위 '唯氣論'을 주장하고, '氣一分殊'를 주장했는데, 이는 기정진과 반대로 성리학의 리기이원론의 전제 위에서 기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기의 강조는 명대 중기 整庵 羅欽順 등으로 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사조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橫渠 張載의 氣論에 가 닿는다. 이 기론은 중국 고대의 자연철학의 중요 개념이었지만, 이 기 개념이 성리학에 와서 리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체계의 하나의 중요 범주로 자리잡게 되자 '主氣論的' 시각도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성주의 유기론에 가서는 원초의 '一氣'에 이미 萬殊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氣一分殊'라고 하였다. 이때는 기의 개념에 담긴 '生意' 가 중요 모티브가 되고, 여기에 기의 원초로서 '一氣'(장재의 '太虛')를 상정하고, 그 모습을 '湛一淸虛'라고 하는 발상이 덧붙여졌다. 이때 '일기'라고 할 때 기가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의미, '充滿性'도 물론 들어 있다. 그러나 기는 실제로 이미 움직여 淸 濁 粹 駁으로 편차가 생겨 있다. 그러므로 '一氣'는 하나의 이데아로서 요청되어진 것이다. 임성주의 소위 '유기론'은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유기론이 기의 생의와 충만성에 착안하여 '기일분수'를 주장하였다는 점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유리론에서도 리를 '天命'이나 '씨앗'[종자]으로 보는 관점이 동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리 기 양 극단으로 가면 결국 공통점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이 태극, 리, 기 삼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연관 있다. 과정철학과 비교해 보아도 그 점은 명확하다. 유리론을 고찰할 때 참고해야 할 점이다.
기에 비해 리는 훨씬 관념성이 강하므로 초월성을 말하는 데는 매우 유리하다. 리와 기는 절대자의 초월과 내재를 말할 때 항상 '不相離雜'을 강조하므로 주자학 체계 에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면 유기론과 유리론은 다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한쪽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이유가 원래 주자학 속에 이미 있기 때문에 그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러나 주자학의 존재의 형이상학은 태극, 리, 기, 세 범주(개념)로 이루어지므로 유기론이나 유리론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기에 .'理分圓融說' 을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노사의 유리론에 대해서 그의 발상을 높이 평가하여 현상윤은 그를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보고 있지만, 근세 일부 학자가 연원에 치우쳐 , 이상호 최영진. 최영성등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의 리기설에 있어서는 '理氣一體觀'이며, 또 '理尊氣卑', '理主氣僕' 등의 주장을 볼 때는 '리일원론에 가까운 尊理論'이라 할 수 있다 하였고 이상곤은 노사 기정진의 리일분수설을 높게 평가하여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극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익은 기정진의 성리학이 이이 성리학을 초극한 것이라든가 호락 양론을 종합 지향했다고는 볼 수 없고, 이이 성리학과는 다른 체계라고 하였다. 또 그는 기정진이 리기이원론의 리일분수에서 '인기유분'을 '리분격단'이라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리분원융'을 주장한 데 대하여, 리 분 역시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또 만일 논리적 구분을 무시한다면 대상세계를 개념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학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기정진의 비판은 무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비판적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정진의 사상의 특징은 아직 선명하게 현대적으로 그 의미가 해석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기정진 성리설의 핵심은 존재의 형이상학에서의 '尊理的' 발상에 있다고 보고 그 의미를 종교론적 관점에서 과정철학과 비교하여 보다 심도 있게 논하고자 한다.
2. 李滉의 '主理論'과 '尊理論'
리기이원론은 朱熹(주자) 형이상학의 기본 명제이다. 이때 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형상'에 해당하는 것이고, 기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질료에 해당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말하면 리는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요, 기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이다. 이것은 존재론, 우주론에서 기본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리기의 개념(범주)이다.
그런데 이 理氣 개념이 도덕론을 논하는 상징으로 사단칠정론, 인심도심론 등에 응용되었을 때 그 개념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단칠정론에서 退溪 李滉이 四端七情理氣互發說(이하 '호발설'로 약함)을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사단은 理發, 칠정은 氣發이라고 하여 대립적으로 입론한 것이 호발설이다. 이황은 人心과 道心도 대립적이고, 本然之性-氣質之性의 관계도 또한 대립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도덕론에서 가치를 대립시킨 것이다. 여기에서 리기 두 개념은 하나의 '상징'(symbol)으로 쓰인 것이다.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칠논쟁에서 이황은 호발설을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리의 體用論과 함께 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때의 리는 리 기 상대의 리 보다 태극과 같은 절대의 리로 표현되었다. 그의 호발설의 배경에 이러한 리에 대한 특이한 발상이 있었던 것이다.
고봉 기대승과 논변을 하는 과정에서 이황은 리를 정의하기를
리는 원래 極尊無對하여 사물에 명령하지 사물에 어떤 명령을 받지 않는 것으로 기가 이길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 그는 '太極動而生陽'에 대한 해석에서 '生'지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태극에 작용성이 있는 듯이 해석했고, 리의 작용성에 대한 해명을 함에 있어 '體用論'을 응용하여, 리의 작용이 없는 것은 체의 측면이요, 能發能生의 작용은 용의 측면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기대승에게 충고하면서
고금에 학문에 차이가 나는 것은 理字가 알기 어렵기 때문인데, 그것도 올바르고 충분히 알기가 어렵다.
라고 하여 리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언표를 종합해 보면, 이 때의 리는 태극과 같이 리 중의 리, 즉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최고의 궁극자, 궁극적 원인자, 또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최고의 신과 같은 절대자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틀림없다. 이황의 호발론 배경에는 이와 같은 절대적 리에 대한 발상이 있었다. 이 절대적 리는 성리학의 '태극'인데, 주자학에서 태극도 리요, 개별 사물의 존재 원리도 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리의 의미 중첩에서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이다. 특히 창조주 인격신을 상정하지 않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 이러한 의미 중첩에서 오는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황의 이러한 리에 대한 발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주희에게 이미 그러한 사고 방식이 있었다. 주희는 자연의 질서를 '主宰'의 작용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대개 天은 하나의 至强至陽의 物인데, 자연히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러한 까닭에는 반드시 주재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그렇다고 만약 하나의 주재가 있어서 마치 세상에 동상 처럼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격신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재자'는 바로 주희가 존재의 근거, 즉 궁극자로서 '태극'을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주재'라는 것이 매우 실재성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주자가 태극을 역시 매우 실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줄리아 칭(Julia Ching)은 말하기를
유교 고전인 {시경}과 {서경}의 '上帝'에 대하여 주자가 神人同形論的 표상(즉 인격신적 표현)에 대해 주석한 것을 보면 "세계의 주재자가 하늘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그런 주재자가 없다고 해도 잘못이다."라고 했다. 주자에게 있어 天과 上帝는 지고한 주재자인 神을 지칭한다.
라고 말하였다.
주자학에서 태극은 '리의 總體(總集)' 내지 '리의 總括'로 규정되고 있다. 주희는 태극을 말하기를 "천지 인물의 萬善의 지극히 좋다[至好]는 것에 대한 명칭이다. 사람 마다, 사물 마다 하나의 태극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태극은 별도의 어떤 사물이 아니고, 음양이면 음양에, 오행이면 오행에, 만물이면 만물에 있다. 다만 하나의 理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우주의 보편적 질서(天道; 天理)는 '理的인 것'으로 규정하여, 그것을 주돈이의 '태극'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태극은 이데아 중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인 것이다. 형이상학적 궁극자를 理的인 것으로 본다는 것은 만물의 존재의 원리를 리로 규정한 이상, 그 個別理(개별 사물의 리)의 총체적 포괄자가 당연히 요구된다는 것을 말한다. 有神論(인격신론)의 神觀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神'의 역할과 동일한 발상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유신론적 체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는 중세적인 종교철학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은 형이상학과 종교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통해서 우주는 성립되고, 따라서 신은 '세계 구체화의 원리'라고 말하였다. 이는 신은 궁극적 한정이며, 신 속에서 전 우주의 총합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과정철학에서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다른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같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존의 기독교 신관의 지나친 초월성을 배제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독특한 '형이상학적 神觀'이다. 이러한 신과 이 세계와의 밀접한 관련성은 유신론 체계가 없는 동아시아에서 '無極而太極'과 태극-음양의 관계, 즉 초월-내재성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다.
주희의 우주론 속에 이미 절대적 의미의 리로서의 태극이 있었고, 이황의 호발설을 통해 표출된 절대적 리에 대한 존중은 철학적(형이상학적) 세계 해석인 리기이원론과는 다른 관점으로 절대자에 대한 경외로서 일종의 종교론(형이상학적 神觀)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尊理論'이라 할 만하다. 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높이면 이는 단순한 도덕론을 넘어서서 존재의 궁극 원인 내지 우주의 근원에 대한 종교적 성찰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볼 때 이황의 '존리론'은 강조점은 다르지만, 그의 도덕론인 '주리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황의 호발설은 도덕론이며, 존리론은 종교론이라고 할 수 있고, 양자는 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기정진의 유리론 역시 이 이황의 주리론-존리론의 연장선상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3. 奇正鎭의 '唯理論'
기정진 역시 이황의 '존리론'과 유사한 발언을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리와 기를 상대화하여 리-기라고 부른 것은 어느때 시작된 것인가? 나는 이것은 반드시 성인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리의 존귀함은 상대가 없으니, 기가 어떻게 리와 짝이 될 수 있겠는가? 그 넓음은 상대가 없으니, 기 역시 리 속의 일이며[氣亦理中事], 이 리가 유행하는 손발이어서[此理流行之手脚] 리에 본래부터 상대가 없다. 짝도 아니고 상대도 아닌데, 상대화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리에 대한 기본적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당연히 율곡 이이의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하고, 시키는 자가 없다[其機自爾, 非有使之]'라는 기의 정의, 즉 리기의 형이상학에 대해 반대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말하기를
음양동정을 겉으로만 보면 自行自止하는 것 같으나, 실제를 깊이 탐구해보면 전부 天命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천명이 그러하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所以然'이라 일컫는다. .... 이제 (율곡이)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였는데,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것은 노력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이미 자기로 말미암고 다른 것에 말미암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또 부연하여 말하기를 '시키는 자가 없다'고 하니, '스스로 그러하다'고 할 때는 그 뜻이 오히려 여유가 있었으나, '시키는 자가 없다'고 하니, 말 뜻이 확고하다....'시키는 자가 없다'라는 말에서 天命은 이미 끊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기정진의 두가지 중요한 사고 방식이 나타나 있다. 하나는 이이의 기에 대한 설명을 반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리를 '天命'으로 해석한 점이다. 천명으로서의 리, 이것은 '존리론'의 단적인 표현이다. 안종수는 이러한 기정진의 리에 대해 그가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어느 정도 인격적인 존재로 보고 있고, 리 자체의 활동성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은 또 리를 '씨앗'[種子]에 비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씨가 없이 생겨난 것은 아직 없었다. 리여! 리여! 모든 것의 씨앗이로다.
라고 하였다. 리를 종자로 보면 리가 기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기정진이 기독교의 신과 같은 창조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천명론과 아울러 보면 그 발상은 매우 유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정진은 이 천명론과 씨앗론을 바탕으로 리기 관계에서도 리의 기에 대한 '주재력'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기가 리를 따라서 발한 것은 氣發이 곧 理發이요, 기가 리를 따라 행한 것은 氣行이 바로 理行이다. 리는 스스로 조작하거나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발하고 행하는 것은 분명히 기가 하는 것인데, 이를 리발, 리행이라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의 발하고 행하는 것은 실로 리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니, 명하는 자는 주인이 되고 명령을 받는 자는 종이 된다. 종은 그 노역을 담당하고 주인이 그 공로를 차지함은 天地의 진리이다.
라고 하였다. 마지막 구절의 '종과 주인의 비유'는 가치론적 입론으로서 존재론적 리기 개념 사용과는 용례가 완전히 다르다. 기발과 기행을 말하는 것은 기정진 역시 리기이원론의 토대 위에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의 기본 생각은 리의 기에 대한 우위, 주재력을 말하고자 한 데 있었다. 여기서 기발이 리발이요, 기행이 리행이라는 언명은 성리학 원래의 리기론의 형이상학 체계와는 물론 다른 것이다.
이러한 기정진의 발상은 理氣先後 문제에서도 당연히 '理先氣後'로 나타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주자가 말하기를 "태극은 象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리는 이미 갖추어진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만일 원리적으로 말하면[在理上看] 사물이 있지 않아도 이미 사물의 리는 있다"고 하였으며, (....) 이와 같은 말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으니, 어찌 일찍이 리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不相離] 하여 리가 먼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을 폐기할 수 있겠는가? ....리가 다만 기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까닭으로 마침내 먼저 갖추어진 妙가 없어지는 것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희의 말을 인용하여 리선기후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이른바 리가 먼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허공에 매달린 리가 먼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다. (....) 추론하고 또 추론해 보아도 필경 이 리가 있고 이 기가 있는 것이다. (....) 此天地의 리가 先天地의 위에 먼저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과연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리의 先在가 實在的이라는 것을 비유를 들어 강조하였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理氣不離'를 말하기도 하였지만, 강조점은 역시 위와 같이 '리선기후'에 있었다. '리기불리'는 형이상하라는 성리학의 기본 이론에서 대략 말한 것이고, '리선기후'는 그의 유리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일견 모순되지만, 그의 유리론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 모순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성리학에서 리기 관계에 대한 언급은 많이 있으나, 리가 어떻게 기에 관계하는가 하는 데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별로 없다. 과정철학은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에의 진입(ingression)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원적 객체와 최고 궁극자 신과의 관계 등도 함께 유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성리학은 이런 설명이 좀 부족하다.
리와 기의 관계를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라고 하거나, 하나이면서 둘이라[一而二, 二而一]고 하는 정도로 그 밀접한 관계만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無極이면서 太極이다'([태극도설])라든가 '太極은 理이다'라는 명제로써 태극의 원리성을, '太極은 總天地萬物之理이다' 또는 '太極은 萬善至好이다'라는 명제로써 태극의 궁극자의 성격을 말하고, 그리고 '統體太極-各具太極' 및 '理一分殊'로써 태극의 초월-내재성의 이중구조론을 설명하고 있다.
과정철학에서 신은 이 세계와 밀접히 관계한다. 먼저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며, 또 신의 양극성(dipolarity), 즉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을 가지고 이 세계에 관여하고 있다. 원초적 본성에서 볼 때 신은 현실적 존재가 자기를 형성해 가도록 처음 동기 부여, 목적 부여를 해줌으로써 만물을 새로운 창조적 미래로 불러내는 존재론적으로 부르는 소리요 힘이다. 이것이 신이 원초적 본성에서 영원적 객체를 파악(prehension)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것이 신의 '개념적 파악'이고, '영원적 객체'에서 보면 영원적 객체의 '현실적 존재'에의 진입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이란 현실적 존재가 합생을 끝내고 다른 현실적 존재의 여건이 될 때 不死的 객체화가 된 현실적 존재들을 '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물리적 파악은 신이 현실적 존재를 자신 안에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신의 양극성이 신으로 하여금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한다. 태극의 리일분수에 이 신의 물리적 파악과 같은 설명은 없지만, 태극의 이 세계와의 '초월-내재'의 관계에서는 신의 양극성과 다름 없다.
과정철학과 비교해본 성리학의 태극론에서 최고의 리로서의 태극의 종교적 절대자의 위상을 볼 수 있고, 이러한 리에 대한 착상이 기정진의 유리론, 존리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면 그의 여러 성리학적 언표들은 이해의 여지가 많다.
4. '理一分殊'의 새로운 해석 : 理分圓融
조선 후기 기호학파에서 일어난 人物性同異論爭은 인간과 다른 사물, 즉 만유(만물)의 존재의 원리(존재성)에 있어서 보편성과 특수성(차별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논쟁인데, 크게 인간과 사물(동식물과 무생물)의 성질이 같은가 다른가를 논하였다. 어떤 종교철학에서나 마찬가지로 성리학에서도 일찍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명제가 바로 '리일분수'이다. '理一'은 보편성을, '分殊'는 특수성을 말한다.
성리학은 유기체 우주론으로서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성리학이 불교 화엄의 '法界緣起觀'에서 받은 영향으로 추측된다.. 유기체 우주론에서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이 서로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 받으므로 그 존재의 가치는 절대 평등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유는 보편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 만유는 제각각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성리학은 그 차이의 원인을 기에 돌렸다. 이때 기에 의한 분화된 각 사물의 존재 원리는 또 어떻게 되는가? 분화된 각 사물의 존재 원리를 '分殊의 理'라고 한다. 이 분수의 리와 보편성의 리, 즉 '理一의 理'와는 그러면 어떤 관계인가? 성리학은 그것이 별개의 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결국 각 존재(사물)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리일분수의 의미이다.
기정진은 각 사물의 분화의 원인이 기라고 보는 데 반대하고 보편의 리, 즉 '리일의 리'에 이미 분수의 리, 즉 분화될 원인을 함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성리학의 형이상학 체계는 리와 기로써 존재의 이데아와 질료를 각각 표시하므로 리기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리일분수를 말할 때 리를 가지고 '一'과 '분수'(多)를 나타내고, 분수의 원인은 기에 돌렸다. 왜냐하면 기는 그 속성상 자체 운동인을 갖고 있고, 그것에 의해 이미 현실적으로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의해 여러 편차(淸 濁 粹 駁)를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는 과정철학의 '현실적 존재'와 같이 가장 기초적인 사물의 기본 구성체이기 때문에 그 이상 나아가 존재의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의 기본 단위이다. 그러므로 기론자들 처럼 기의 원초적 모습을 찾아 '太虛'라든가, '담일청허한 一氣'라든가 하여 그것을 실체화하거나 초월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리 기 양자의 역할 분담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도 기의 속성에 맞지 않다.
이때 '일기'가 담일청허 하다든가 태허를 기의 원초로 초월화시키면 임성주 처럼 '氣一分殊'까지 생각할 수 있다. 리 기의 밀접한 관련을 생각하면 리일분수는 기일분수를 전제로(기반으로)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가 현실적 차이를 설명하는 기제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기일분수'는 기의 분수라는 현상에서 '氣一'을 상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일'에서는 분수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는 '제한성의 원인'이고 리와 같은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이와 주희는 리로써 보편과 특수를 나타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과정철학으로 말하면 신의 양극성으로써 신의 초월성과 이 세상과의 관계, 즉 내재성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현실적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의 기본 구성체이지만, 신(태극)과 '영원적 객체'(리)의 목적(이데아) 부여에 의하여 우주 전체 조화 아래 생성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인간의 본성에 적용하여 말하면, 보편성을 말할 때는 '本然之性'이라 하고, 기질에 의하여 제한된 개별성을 말할 때는 '氣質之性'이라 하는데, 핵심은 이 두 본성은 이름만 다르지 '실재'로 있는 두가지 종류의 본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본연지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것을 기질지성이라 하므로 결국 두 측면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두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측면에서 묘사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노사가 리를 중요시하는 존리론적, 혹은 유리론적 관점은 그의 리일분수설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리일'이라 하면 그 속에 이미 '분수'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리와 기를 나누어보지 않으려는 관점이다. 리기이원론은 리일분수에서 분수는 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을 기정진의 시각에서는 리와 기를 지나치게 나누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선현의 글 가운데 道와 器는 있어도 氣라는 것은 없는데 후학이 변설을 늘려 이기일원 또는 이기이원 등의 자기 주장을 일삼으니 근본은 理라는 강력한 경고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율곡이 성리학의 리일분수를 부연하면서 '理通氣局'이라 하였다. 이이는 리통기국설을 통하여 성리학의 리일분수설을 조리있게 설명하였지만, 역시 이 형이상학적 명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리는 원리로서 이데아이며 순선한 것이며, 태극의 리의 경우는 궁극자이며 가치의 표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기에 의해 어떻게 편차가 생기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이에 의하면 "리는 어떻게 하여 萬殊가 있게 되는가? 氣가 가지런하지 않으므로[不齊] 기를 타고 유행할 때 만수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노사는 '기에 의한 분수'는 '기에 의한 리의 분수'가 되어 결국 리에 편차가 있게 되고, 나아가 리의 본연이 훼손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神이 이 세계와 관계를 깊이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 초월성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발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理라는 것은 盈縮과 先後가 없다. 一理라 하여 많은 것이 아니고, 萬理라 하여 많은 것이 아니니, 이것을 영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물이 있다고 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요, 이 사물이 없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선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이른바 '一'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그는 인물성동이론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리일분수설의 새로운 관점을 피력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여러 학자들이 人性과 物性을 논한 것은 ..... 모두 동일한 폐단에 빠졌다. 그것은 理一과 分殊가 서로 괴리된 데 있다. .... 학자들의 학설을 살펴보면 리는 分이 없는 것이요 분은 기로 인하여 있게 된다고 하여 리일을 形氣를 떠난 곳에 한정시키고, 분수를 형기에 墮在된 이후로 국한시킨다. 이에 리는 리대로, 분은 분대로 되어[理自理, 分自分] 性과 命이 옆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분은 리일 가운데의 細條理로서 리와 분 사이에는 層節(단절)이 없다.
라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당시 학자들이 리와 분을 분리시켜 본다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인물성 논의의 폐단은 理分相離에 있다. 그것은 리는 無分之物이라 보고, 分은 기로 인하여 제한된다[因氣有限]고 한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자신의 관점은 '理分圓融'이라 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나의 주장을 따르면 理와 分이 원융하여[理分圓融] 이른 바 體用一源, 顯微無間과 부합한다. 同 가운데 異가 있고, 異 가운데 同이 있으니, 동 이를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舊論(호론과 낙론-필자)을 따르면 리와 분이 격단되어[理分隔斷] 체 용이 二本으로 되고, 顯 微가 有間하게 된다. 同은 스스로 同일 뿐이고, 異는 스스로 異일 뿐이어서 끝내 회통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체용일원, 현미무간'은 정이의 {易傳}序에 나오는 나오는 말이고, 同異論은 주희가 말한 것이다. 그는 또 '리분원융'과 같은 의미로 '理涵萬殊'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원래 리일분수는 형식논리로 보면 모순이다. 그러므로 주자도 이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평등을 논한다. 그 보증을 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한다. 이 평등은 바로 보편성을 말한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성리학의 리일분수설도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보편성을 말한다면 불교의 자비라든가 성리학의 '만물일체의 仁'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성리학의 이 명제는 만물의 차별성의 원인도 함께 논하려고 하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명제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이나 종교론에서 거론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생명복제라는 생물학(생명공학)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인체의 모든 體세포(몸 세포)는 원래는 어떤 부분의 세포이든지 생식이 가능하게 생겨나지만, 생명체의 생장에 따라 그 부분의 기능만 점점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복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면 체세포에서도 전기 충격으로 생식세포의 기능을 재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체세포에 의한 생명체 복제이며, 근간에 이런 방법으로 양의 복제가 이루어졌지만 근본적으로 陽(수컷)은 아직까지 복제하지 못하였다..
리일분수는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개별리는 보편리를 본질적으로 갖고 있으면서 개별리를 이루어 나간다. 주자는 '月印(映)萬川'이라는 비유로써 이를 설명하였다. 즉 달이 만개의 강에 비치지만, 달이 쪼개진 것이 아니고 온전한 모습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 비유를 빌릴 것도 없이 생물학적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다.
노사가 호락양론을 '리분격단'이라 비판하고 '리기불리'의 관점에서 '리분원융'을 주장하였는데, 과연 그러한 주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견 생각하면 리일분수나 리통기국이 리와 기를 이원화함으로써 체용일원의 우주의 만유의 실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리기이원론의 리일분수설이 분수의 원인을 기에 돌렸다[因氣有分] 하더라도 '理涵萬殊'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만수의 가능태를 리가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一과 分殊를 논리적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 뿐이다. 리함만수를 전제로 한 리통기국이요 리기이원론이라면 기정진의 유리론은 결국 리기이원론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우리는 사물의 진상(道)을 설명하기 위하여 체 용으로 나누어 설명한다든지, 아니면 리 로 나누어 설명하는 소위 '이분법적 설명 방식' 외에 과연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기정진이 비판한 '리분격단'이나 '인기유분'은 리기론의 논리상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렇게 보면 기정진의 리분원용설은 리일분수설의 대안이라기 보다 보충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주요 배경이 되는 것은 그의 유리론적, 존리론적 발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종수는 "라이프니츠가 동양의 리일분수설을 기독교 신학을 빌려 설명하면서 신이 처음부터 모든 것의 원인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 설명과, 기정진의 리에 대한 설명, 즉 모든 존재의 리는 최초의 태극에 포함되어 있다는 설명과 같다."고 하였는데, 기정진의 입장을 잘 표현했다고 보인다. 결론적으로 기정진의 유리론은 유신론 체계가 아닌 성리학에서 나올 수 있는 특이한 종교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어
근래 광주에서 관선회의 모임이 노사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구성원의 한계로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가 산적하므로 신진 소장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여러 학자들의 비판적 이론에 명쾌히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마치 외필을 두고 간재의 연원과 대응하고 연재의 연원과 대응하던 선배들의 문풍을 이어 받아 호남문화가 살찌워진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생각하면서 비판적 의견을 인용하여 요체를 찾고자 합니다.
대구 계명대 이동희 교수의 글에 의하면 그의 성리설의 특징은 존재론 측면에서 리를 극히 강조한 점, 즉 '尊理論'과 성리학의 리일분수설을 '理分圓融說'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의 배경은 성리학 속에 감추어진 '太極論'이 갖는 종교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존리론은 성리학의 종교적 절대자, 혹은 형이상학적(존재론적) 궁극자에 해당하는 '태극'의 리에 대한 종교적 경외라고 볼 수 있다. 유신론 체계가 없는 성리학에서 태극론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비교하여 말하면 형이상학적 神觀과 유사하고, 또 태극은 과정철학의 神과 위상이 비슷하다. 주희는 이 우주의 보편적 질서(天道; 天理)는 '理的인 것'으로 규정하여, 그것을 濂溪 周敦이 의 '태극'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태극은 善之至善, 즉 善의 순정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적 궁극자이며, 종교적으로 말하면 절대자이며 만물의 근원자이다. 다시 말하면 個別理(개별 사물의 리)의 총체적 포괄자가 태극이다. 선의 순정을 통해서 우주는 성립되고, 따라서 신은 '세계 구체화의 원리'라고 말하였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존재론의 경우 리와 기에 의해서 원리와 질료를 설명하고, 우주의 전체 조화를 위하여 태극의 리가 요청되었다. 태극은 과거의 天命이나 上帝와 같이 초월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태극-음양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내재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이 유기체 우주론의 특징이다. 어느 것이 우주의 근원인가 하는 문제에서 기나 리 어느쪽으로 극단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기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 녹문 임성주의 唯氣論이고, 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 노사 기정진의 唯理論(혹은 尊理論)이다.
리와 기는 절대자의 초월과 내재를 말할 때 항상 '不相離雜'을 강조하므로 성리학 체계에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면 유기론과 유리론은 다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존재의 형이상학은 태극, 리, 기, 이 삼자로 이루어지므로 유기론이나 유리론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유리론이 반영된 理一分殊說, 즉 '理分圓融說'은 그가 '理分隔斷'이라 비판한 리기이원론의 리일분수설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리로써 보편성, 기로써 분수의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분법적 논리 자체를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의 성리설이 이와 같이 어느 극단으로 치우친 것은 사실이지만,이러한 발상을 하게 된 배경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여기에는 종교론적 고찰이 유효하고, 그것도 성리학과 유사한 유기체 우주론을 가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의 형이상학 이론과 종교론 이론과 비교하여 유리론의 의미를 드러내었다. 그것은 성리학의 태극론이 가지고 있는 종교론적 측면을 기정진이 강조하여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이미 퇴계 이황에 의해 주리론-존리론을 통하여 우리에게 싹을 보여 준 것이다. 하여 퇴계의 학설을 존숭하는 듯 비판하였으니 노사 선생의 위정척사운동은 화서 이항로보다 앞서고 후학들도 간재보다 실천적이었으며 특히 송사와 성재의 의병활동을 통한 유학의 실천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그러한 원인 제공이 외세의 침략에 앞서 빌미를 제공한 사회 지도층의 공리공론에 경종을 울리는 깊은 성찰을 도외시하고 그들의 비판이 자기엄호를 염두에 둔 듯하여 시대적 고찰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솔직한 우견이니 많은 질정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