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 전규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 전규태
(전 연세대 교수ᆞ시인 ᆞ문학평론가)
대학졸업 후 첫 직장이 신문사였다. 신문사 바로 옆에 있는 단골 다방에서 나는 그 가게 주인의 조카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신경쇠약 때문에 E대학 약학과를 다니다가 휴학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매일 이 다방에 나왔고, 그 때문에 자주 만나 어느새 깊은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열애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녀는 늘 “죽어도 사랑할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의 첫사랑은 실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내 직장을 트집잡고 반대하니 전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몹시 언잖아 아무 말 없이 헤어졌다. 그 후 3주일 만에 그녀의 결혼식 청첩장이 날아왔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5년쯤 지난 성탄절에 그녀로부터 행운의 열쇠가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마침 어느 잡지사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던 터인지라 이 사연을 작품화했고, 이 글을 읽어본 최승호 시인이 내 사랑이야기를 단행본으로 엮어 보자고 제의해 왔었다. 당시 그는 고려원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베스트셀러 메이커였다. 나는 기꺼이 이를 수락했고, 에세이집은 편집장이 붙여준 ?내 사랑 너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제목 탓인지 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때문에 팬 모임도 생겼고, 많은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 그 당시 팬들이 쓴 독후감 편지 모음을 최근에 다시 발견하고 밤 새워 읽었다. 그 중 여수에 살던 어느 팬의 사연은 유독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한 사람과의 13년 만의 뜻하지 않은 헤어짐으로 말미암아 심한 갈등과 방황을 하고 있었던 무렵이다. 사랑이라는 잔인할 만큼 아프고 힘든 날이었다. 마음의 고통이 심할 때 유일하게 나 자신을 위로 받을 수 있는 벗은 책을 가까이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서점에 들렀을 때 [내 사랑 너를 위하여]라는 전규태 교수의 에세이집이 눈에 띄었다. 고려원에서 나온 베스트셀러로 에세이집이었다. 상처 난 내 가슴에 치료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녀 같은 감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당신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서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됐지만 죽어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요.”라는 어느 여인에게서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인 내용을 공개하면서 저자의 사랑론이 시작되었다.
‘이름도 주소도 없는 카드였지만 보낸 이가 누구임을 나는 분명히 안다. 젊은 날 내게 적잖은 상처를 남기고 간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행운의 열쇠가 그려진 카드를 몇 번이고 읽어 보면서 새삼스레 이런 겸연쩍은 넋두리를 해봤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랑 받는다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 사람마다 제각각 성미가 다르듯이 언제고 능동적으로 사랑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있겠고, 또한 사랑 받기만을 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죽도록 사랑하고픈 연인을 만난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삶이 아닐까.’
죽어 저승에서라도 사랑해 보았으면……. 이라는 애절한 여인의 절규가 나의 가슴속까지 아프게 파고들었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사랑을 이렇게 술회했다.
“사랑으로 불타는 감정의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순수하게 한다. 사랑하는 데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라고.(중략)
나는 전박사님의 이 저서를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동안 내 우울증은 어느듯 말끔히 가시고 실연의 상처도 말끔히 아물었다. 나는 선생님께 독후감을 정중히 써 보냈다. 팬클럽에도 가입하여 팬모임이 있을 때마다 상경하여 먼 발치에서나마 선생님을 뵐 수도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관계가 최근엔 마주앉아 밤이 늦도록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영광을 누리게도 되었다.
5월의 맑은 바람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보라고 유혹을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이른 아침, 생각지도 않았는데 귀한 전화가 걸려왔다.
“박여사, 나 오늘 여수에 내려갑니다.”
하는 전 교수의 전화를 받고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여수에 세미나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기쁜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이 헝클어졌다. 어떻게 차표를 구해서 1시 20분 열차를 타겠다는 전화를 받고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걱정이 앞섰다. 이제껏 한 번도 혼자서 만나 뵌 적이 없는데……. 어쩌나……. 어떻게 하나……. 솔직히 말해서 교수님을 만나 뵙는 기쁨도 컸지만 어떻게 예우를 해야 하나 하고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만나 뵙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소주 몇 잔을 주고받다 보니 그런 걱정은 지나친 나의 기우였다. 순천에서 달려온 제자의 배려에도 불구하시고 호텔보다는 값이 싼 데에 숙소를 정하시는가 하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는 것이었다. 그런 교수님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작품으로 표현되어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교수님의 갑작스런 여수 행은 순천의 제자 선생님에게 의문의 꼬리를 남겼다. 전 교수님처럼 바쁘신 분이 여성 독자인 나의 편지 한 통으로 여수까지 달려오신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제자 선생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의문의 눈초리를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영문도 무르니 그럴 수밖에……. 교수님은 그 동안 외국 생활과 또 현재는 서울~전주 간의 혼자만의 객지 생활이 몸에 밴 듯하였다.
최근에야 카드의 비밀을 안 전주의 제자들 성화에 30년이 넘는 사연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내게도 보여주시면서 진솔한 여러 사랑 얘기를 곁들여주셨다. 나 또한 이 카드의 사연이 담긴 글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기도 하며, 또한 그 때문에 사랑의 아픔을 딛고 일어섰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선생님은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그 퇴색한 카드를 열어 보이는데, 아픔으로 간직해야 했던 사연도 이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였다.
H.S.H라는 영문 약자가 카드 맨 끝 부분에 표기되어 있었는데, 그 연인이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 듯 하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젊은 날 누구보다도 실연을 많이 당하셨다고 하셨는데, 만나 뵙고 보니 그 말씀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랑의 눈빛만 건네주기만 하였지 자신의 표현 부족으로 한 마리의 파랑새의 날개도 접을 줄 몰랐던 것 같다. 언제나 ‘옹근 사랑’만을 얘기했으니 말이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받쳐들고 오동도 다리를 함께 거닐었던 시간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후미진 다방에서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감상에 젖어 행복해 하시던 모습은 어쩌면 천진난만해 보였다.
전 교수께서 워낙 여행을 좋아하신다고 하기에 한려수도의 빼어난 절경, 백도를 함께 동행하려 했는데 날씨가 심술을 부려 첫 데이트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문득, “박여사, 나 여수에 내려갑니다.”하고 오시는 날을 기다려 백도에 꼭 갔으면 한다. 여수의 나의 다정한 벗들, 특히 남성들이 갑작스런 교수님의 출현으로 나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데 억지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겠다. 선생님이 여수에 안 오신다면 나라도 열차를 타야겠다.
이 사연을 굳이 작품화 해 보는 것은 내가 실연을 당했던, 내 첫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속성을 생각해 보게 하는 두 개의 추억담이 아울러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 팬의 간절한 소원에 못 이겨 나는 여수를 재방문 했고, 그녀의 소원대로 백도도 함께 다녀왔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내게 쇼펜하우어 말을 인용하며 그의 의지의 철학에 동조해 마지않았다. 그리고는 “그 첫 여인도 아직껏 죽을만큼 과연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을까요?”하며 가만한 미소를 띠면서,
“나도 간밤에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헤어진 후, 그녀는 서정시 같은 짧은 편지를 보내왔다. 백도의 추억이 글귀마다 알알이 박혀 있었다.
“육체의 가장 깊숙한 영역으로 쏟아지듯 내려가 황금의 다리가 놓이면서 생명의 힘이 저를 마구 흔들어댔습니다. ……춤추고 파도치는 에너지의 함몰……아무런 경계도 없이 허물어져 실체도 없이 행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백도도 나도 증발하고 말았었지요…….”
어쩌면 남녀 간의 내밀한 교섭이란 사랑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관계인가 보다. 그런 뜨거움도 언젠가는 식어버리는 사랑의 속성을 이 나이에도 잘 이해가 안 간다. 하긴 사랑만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런 걸 짐짓 알면서도 사람은 늘 사랑을 갈구하고 있으니 이 역시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인가 보다.
잊지못할 추억의 팝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