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다산과 추사의 인간관계 / 유홍준
다산과 추사의 인간관계 / 유홍준
오늘 다산 강좌를 위해서 따로 준비한 것은 없고 제목 그대로 산책이기 때문에 두 분의 관계를 학문적이 아니고, 그동안에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을 산책삼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지성사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이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저희로서는 후학들로서는 참 복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산선생은 올해 서세 170주년이고 추사선생은 150주년입니다. 돌아가신 것으로는 20년 차이가 나고, 태어나신 것으로는 24살 차이가 납니다.
두 분이 얼마만큼 교류했는가에 대해서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만은, 추사 선생이 33살 때 다산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난 때가 57세입니다. 그 무렵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선생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완당전집』에 편지에서 제일 첫번째 편지로 실려있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은 임형택 선생님이 소개하신 그런 내용들이 옛날 경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견해 차이를 참 엄청나게 따집니다. 추사가 일일이 조목조목을 대 가지고 선생님이 틀렸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초년시절의 열정적이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했던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그 문장 자체만 보면은 추사가 다산을 존경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면밀하게 따집니다. 사실은 추사의 성격이 그런 것이 있었고, 다른 글을 보면은 그분은 거의 한 시대에 귀양살이를 하기 전에는 거의 안하무인이고 남을 사갈시 잘하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풍파를 많이 당해서 추사가 귀양살이 갈 적에 추사의 죄를 논하는 것에서, 죄는 별게 없고 안동 김씨들이 얘기한 것을 보면은 요부와 요자가, 요사스런 애비와 요사스러운 아들이 해괴한 이론을 가지고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그런 요부요자 소리가 엄청나게 나오는 것을 보고 그분의 처신이 어땠는가 하는 것을 짐작을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을 한다면 그래도 정중한 편에 속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논리를 따지는 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그 깊은 뜻은 모르겠습니다만은, 조금 전에 임형택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거였습니다.
추사가 얘기하는 실사구시는 엄연히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실사구시와 내용이 다릅니다. 그분은 그냥 훈고학적인 입장 속에서의 실사구시설을 이야기한 것이었기 때문에, 경전을 해석하는 데는 임선생님 말씀대로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도 추사와 다산의 교류에 담겨진 깊은 우리가 새겨볼 만한 것은 아시다시피 다산선생은 남인의 골수입니다. 추사는 노론의 골수입니다. 그 당색을 뛰어넘어가지고 그러한 학문적인 교류를 하고 훗날 아들들하고 친해서 두릉에 와 가지고 시를 짓고 하는 모습을 보면은 두 분 다 정치적인 당색을 넘어서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완당전집』을 쓰면서 ‘추사의 학문적 유래에서는 가정과 사우로부터 힘입은 바가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추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연경학회와의 교류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보다도 자기 집안의 아버님 유당 김노경으로부터 받은 것과 주변에 있었던 선생뻘되는 분들 다산선생같은 분들에게 받은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내용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추사선생이 다산선생을 얼마만큼 좋아했는가 하는 예는 9페이지에 추사가 다산선생에게 수선화 한 분에다 분재를 해서 보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추사가 나이 40 조금 넘었을 때 아버님이 평안감사로 가셨습니다. 추사가 굉장한 효자가 되가지고 아버지가 외직에 나가면 반드시 거기를 갑니다. 경상감사 했을 때는 대구에 갔다가 해인사 상량을 하셨고, 아버지가 고금도에 유배됐을 적에는 고금도에 가서 제가보기에는 10개월 있다가 동생하고 임무교대를 했고, 또 아버님이 귀양살이 갔을 적에 그 추사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사람이 길거리에서 꽹과리를 치면서 격쟁(擊錚)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 아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한 번도 아니고 두 차례를 길바닥에 엎어져서 호소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추사의 또 다른 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평양에 계실 적에 추사가 아버님을 만나러 갔더니, 그때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들이 갔다올 적이면은 올 때 들릴 적이면은 의주, 평양, 개성 이렇게 올 적에 거기에 의주에서부터 평안감사․개성유수에게 주는 선물을 갖다가 보따리로 싸갖고 옵니다. 우리가 옛날에 요즘은 안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해외여행 갔다오면 형님에게 줄 것 삼촌한테 줄 것 다 사오듯이 한보따리 사오는데, 그때 그 사절단이 평안감사에게 준 것이 수선화였습니다. 그것을 추사 김정희가 그 수선화를 화분에다 심어서 평양에서 두릉으로 지게에 실려서 보내게 됩니다. 그 수선화를 받고 다산선생이 쓴 시가 「수선화」라는 시고, 그 시에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그 부제가 9페이지에 있는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秋晩 金友喜香閣 寄水仙花一本 其盆高麗古器也)」입니다. 지금 여기 어딘가 발굴하면 내 이 청자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것이 발견되면 정말 국보 지정을 해야한다 그 생각을 하고, 여유당에 오기만하면 혹시 발끝에 이 청자편이 안보이나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다산선생이 그 수선화를 받고 쓴 시가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서 /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
추사가 이렇게 해서 수선화를 보냈는데 그로부터 15년 후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가서보니 지천으로 널려있는게 수선화고 그게 소나 말먹이로 쓰고 농사짓는 사람이 웬수보듯 하는 것을 보고, 하나의 사물이 땅을 만남에 따라서 이렇게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시를 쓴 게 또 추사의 「수선화」라고 하는 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장면 하나는 정말 영화 같은 장면입니다. 추사가 다산을 얼마만큼 존경했는가는 다른 여러 말 필요 없이 평양에서 아버님 뵈러갔다가 거기에서 받은 선물 수선화를 고려자기에 심어서 이 남양주 두릉으로까지 보내가지고 그걸 받아서 시를 썼다는 것에서 우리는 두 분의 인간관계를 이미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다산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쓴 제문이나 이런 것은 제가 찾은 일이 없고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온 다음에 두릉에 오게 됩니다. 두릉에 와서 학연·학유 두 형제들하고 자주 놀게 됩니다. 그리고 학연·학유 두 분이 그 당시 용산에 지금 이류정이 있는 용산에서 추사가 살고 있을 때 강상에 살고 있을 적에 거기에 학연·학유 형제들이 찾아오고 했습니다. 그것은 추사 제자였던 소치가 그것을 증언한 것이 있고 또 두 사이에서 주고받은 시들도 여러 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추사가 여기에서 시를 쓰면서 추사의 평생의 친구는 이재 권돈인이었습니다. 그때 권돈인이 퇴촌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소상헌에 앉아가지고 두릉을 바라보면서 쓴 싯구절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마지막에 풍각을 하고 난 다음에 “저 강 건너 왼쪽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곳은 가마 때는 곳인데, 오른쪽으로 사립문 열려있는 것은 내 친구의 집일 것이다”하는 얘기는 친구는 퇴촌에 있는 권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학유가 바로 세상을 떠나서 애도하는 시를 짓고는 했습니다.
11페이지에 이제 나는 ‘보정산방’이라는 현판을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산방’이라고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을 이때 쓴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박석무 선생님이 다산의 제자인 이학래에 대해 쓴 것을 보니까 ‘보정산방’이라는 글씨는 추사가 이학래에게 써준 것을 집자를 해서 현판을 만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제 책에 틀린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중에 또 고칠 것이 있습니다. ‘보정산방’ 글씨는 보이는 바와 같이 정말 추사가 쓰면은 이렇게 예쁘게 씁니다. 예쁜 것이 판단이 잘 안되시면 이렇게 생긴 것이 예쁜 걸로 알면 됩니다. 보정산방 네 글자를 쓰면서 산자를 어떻게 그만하게 씁니까. 만덕산이 좀 작아요. 산같지 않고 작은 면이 있는데. 보자를 쓰면서 가운데 보배진(珍)자를 썼죠. 추사는 마음대로 바꿔도 되요. 우리가 바꾸면 이상하고 틀리는 건데 이분이 쓰면 다 개성적인 거고 뜻이 이미지가 증폭을 하고…
추사가 갖고 있었던 이러한 면모들을 추사와 다산을 생각을 하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찍이 채제공이 추사가 쓴 7세때 쓴 ‘입춘대길’이라는 현판을 보고 아버지 김노경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 아이가 학문에만 열심히 하면 일세를 풍미하는 대학자가 될 텐데, 예술의 길로 들어가게 되면 대가는 되어도 삶은 풍파가 많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한 것이 『대동기문(大東奇聞)』에 나옵니다. 근데 그런 예언이나 신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행간에 서린 것을 읽는 건데, 왜 학문의 길을 가면은 순탄한 길로 가면서 대성을 할 텐데 예술의 길에 가서 대성을 해도 그런 풍파를 겪는가 하는 것은, 예술의 길속에서는 개성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개성이 강할 수밖에 없으니까 자기주장이 또 강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서 추사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개성으로서의 궤를 발휘해서 동양서예사에 남는 그런 대가가 되었습니다.
이 다산선생과 비교했을 적에 다산은 그분이 그림을 그린 것은 그것이 전업으로써 그린 것은 물론 아니고, 글씨를 쓴 것도 대자를 쓴 거 여러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 소자입니op다. 하지만 다산선생이 쓰신 그 작은 글씨들은 글씨 자체만 갖고 얘기를 했을 적에 저렇게 흐트러짐이 없는 글씨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특히 유배시절에 옷이 헐면은 유명한 매조도에, 부인 홍씨가 보내준 붉은 치마를 가지고 첩을 만들고 매조도를 그려서 딸에게 주는 유명한 고대에 있는 작품. 거기에 있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외에도 자신이 입었던 옷이 해지면은 그것을 빨아서 풀을 먹여가지고 첩을 만들어서 글씨를 쓴 것이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산의 강진시절에 만들어진 서첩은 대개 자기가 입었던 옷 해진 것 기워서 조각을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풀 먹인 윤기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거기에 대개 해서로 쓰는데, 해서로 쓴 그 시첩을 보면은, 글씨는 그 사람의 인품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다산의 글씨만큼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는가. 그중에 열첩으로 된 성화를 생각하면서 쓴 여덟 폭의 시첩이 있습니다. 성화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여기 알고계신 분이 혹시 있나 모르겠습니다. 영남대 정석종 교수가 그걸 논문을 썼다고 그랬는데 누군지 찾았으니 알려준다고 그랬는데, 그 다음주에 돌아가셔서 지금까지도 궁금한데, 그분이 그렇게 씁니다. 시를 7언절구를 써놓고 거기에 쓴 것 중에 ‘우리 집에서 서종면으로 가는 것이 몇 리 떨어져 있는데’ 하는 얘기가 있고, ‘소설산중 소설천회’ 해가지고 ‘소설산중에 어떤 학자가 살고 있었다’는 얘기하고. 그 다음에 ‘성화에게는 위로는 병든 노친이 있고 아래에는 병든 두 아들이 있었다’해서 그 시를 쓰고. 제가 제일 감동받은 것은 ‘성화네 집에는 국화가 종류별로 48개가 있었지’라고 하는 그 구절에 국화에 대해서 쓴 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시를 써 놓은지 26년이 되가지고 강진에 와가지고 그 성화를 생각하면서 이것이 조금 미흡한 시지만 여기에다 이 첩을 써놓는다 하고 비오는 이날 ○○는 쓰다 하고 하는 그 첩이 있습니다. 내용에서부터 자기 고향에 있었던 풍광들의 위치들을 전부 하나씩 노래를 하고 친구를 생각하면서 써왔던 그 첩같은 것을 보면은 내용도 그렇고 글씨도 그렇고 그분이 갖고 있었던 인품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절로 배어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다보면 그 사람을 자꾸 닮아가게 된다고 그러는데 저희 집사람 얘기가 추사를 공부하니까 성격이 점점 못돼진다고 그거 끝난 다음에 다산평전을 좀 한 번 써보라고, 그러면은 성격을 다스리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다산이라고 하는 인간상 속에서 갖고 있는 그 크기는 감히 따라가기가 힘든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근래에 제가 이런저런 어쩌다가 자료를 모으면은 책으로 툭툭내고 하는 일을 해봤는데, 요즘에 하는 일은 정해렴 선생님하고 우리나라 문집 속에 나와 있는 차에 관한 것들을 다 모아서 한국차문화총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전부다 하면은 이런 전집으로 7권을 기획하는 중에 다산, 추사, 초의 편을 먼저 했는데, 주로 정해렴 선생님이 워낙 치밀하신 분이니까 다 해주셔서 읽는 중에, 전 전혀 못봤는데 나온 것이 아들 정학연이 닭을 쳤어요. 닭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인데, “네가 요즘에 닭을 친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잘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닭을 치는 것은 농부가 치는 닭하고는 달라야 된다. 너는 닭의 상태가 뭘 먹으면 좋아하고 어떻게 잠을 자고 하는 것을 면밀히 연구해서 네가 치는 닭은 남의 집 닭보다 훨씬 더 살이 찌고 잘 자라고 알을 잘 낳고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닭을 치는 의미가 있다. 그렇게 관찰한 것을 글로 쓰면은 유구가 차에 관해 쓴 것이 ‘다경’이 되고 유득공이 담배에 대해서 쓴 것이 ‘연경’이 되듯이 너는 ‘계경’을 지어라.” 이런 아버지가 닭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사구시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이렇게 관념적으로 얘기하지만 그분은 삶속에 그렇게 붙어있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얘기하려면 내일까지 해도 못다하겠습니다만은, 시간이 딱 한마디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다산과 초의 그리고 아암 혜장스님, 그리고 추사가 뒤로 들어가서 정학연, 정학유, 신관호, 소치 이 사람들이 19세기에 보여주고 있었던 지성의 교류라고 하는 것이 유구를 넘어서가지고 보여줬던 모습들은, 우리 이런 각박한 시절에 참 소금 같은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인데, 이것이 소설적인 허구가 아니고 어떤 소설가가 수선화를 평양에서 고려자기에 심어가지고 두릉에 보내는 것을 상상력으로 해내겠습니까. 역사적 사실이 작가적 상상력을 뛰어넘는거죠. 그거를 사실 그대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해서 막 거짓말 써놓고 소설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그런 것을 밝혀내는 것이 또 공부하는 사람들의 실사구시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산의 차에 관해서는 저도 책에서 그렇게 썼는데요. 혜장스님을 만나 가지고 만덕산 백련사에서 차를 배우기 시작해서 차가 많은 다산으로 가서 다산과 차가 그렇게 이어지는 걸로 되어있는데, 그렇지가 않았구요. 20세 때 차에 대해 차를 마셨던 여러 가지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아버님이 화순에 계셨을 때 화순에 가서 쓴 시중에 산차나무에 대한 시가 있는데, 산다나무라고 읽고 싶습니다. 산다나무가 동백입니다. 그러니까 차하고 동백은 같은 차나무과입니다. 차나무는 하얀 꽃이 피는 동백이라고 보면 됩니다. 또 다시 얘기하면 동백이 되는 데는 차나무가 됩니다. 그런데 서울 광주 근교에 차나무 나오는 데가 딱 한군데가 있답니다. 그게 어딘가를 꼭 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거기에서 나오는 햇차를 따가지고서 마셨던 그 시를 쓴 것이 30대에 그 이야기가 나오고 중국에서 온 차를 마셨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여유당전서 다산선생이 평생 쓴 책을 다 읽은 분이 누가 있을까. 박석무 선생님은 다 읽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은 필요한 것만 골라 읽으신 것이 아닐까. 그분의 그 책을 전편을 읽어봤을 적에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들이 저에게 전달해오는 과정 속에서는 잘못 전달되었거나 빠져서 누락돼온 것이 있는데, 다산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복원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삶의 복원을 통해서 우리시대 삶의 또 다른 여유와 생각거리를 준다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또 그것은 다산 한사람이 아니고 그분의 아들들 주변의 있었던 친구와 후배들과의 관계 속에서 있을 적에 우리가 실사구시라던지 다산에 대한 ○○이 더 깊어지고 높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상 산책을 마치겠습니다.
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