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일본 아리랑`엔까`는 방아타령, 농부가 정읍곡 모방

水西散仁 2013. 2. 18. 10:13
일본 아리랑'엔까'는 방아타령, 농부가  정읍곡 모방

 

일본가요의 시조 고가마사오는 와세다 대학 호남단장 김낙기 정읍학우 

와세다 대학 교가 응원가 동창회가 추모가곡으로 2012년도 불러

 

 

 

     키타소리로  쿵닥쿵닥,  방아타령 반주곡에  농부가소리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히트곡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淚溜息)> '쿵닥'방아소리가 '뽕짝' 일본어로

'뽕짝가요'라고 또  일본가요를  '고가(古賀)부시'라고 부른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1923년 동경 호남유학생단 김낙기는  1906 태인 의병장  김기술 손자로서  김성수 김병로의 추천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배우고  고향의 동생 김붕기를 가야금등 국악기를  만들게 하고  협율사악단을 만들고   대동가극단에 엿장사 친구 신영채를  판소리 대가로 일본공연을 시겼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한국인 학살에 유골을 포켓에 넣고 다니며 한국에서  일본인 순사에 보이고   옷을 벗기고  구타로  한국인학살 보복한 의병장  친족이다

일본도   김병로 김성수 등 동학군 세력지 호남학생조직을  함부로  체포를 못하고  달래는 시기엿었다

 

와세다 대학 학우 고가마사오가  지은 아리랑을  와세다 대학만이 매년 추모노래로 이 일본아리랑 인생극장을 부른다

위의 일본아라랑 동영상에  아리랑 가사를 붙였다  

한국고유 고구려 소리로 일본인 아리랑을 찾아가본다

김낙기의 조카로 일본 참의원이엿던 귀화인 김진섭의 귀국  이야기다

1917년 백우용이 정읍(수제천)을 서양악보로 채보하여 그 당시는 가장 빠른가요 궁중악으로 일본민요 하루사메와 같이 조선 판소리 심청전 방아타령 곡을 오선채보  처음으로 연주하였다.

이 곡을  정읍 협율사 창극에서 심청전 방아타령으로 사용하여 대유행하고 1925년에 '장한몽'이라는 일본극을 이 곡으로 편곡 사용했다. 이어서 정읍지방에서는 자즌농부가로 불려지고 있다.

일본가요의 시조 고가마사오는  서울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호남단장 김낙기 정읍사람 학우를 만난다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정읍 동학군의 본거지 1905 년 이곳 호족 도강김씨  대장 김기술의 조카손자 김낙기는   경주김씨  김병노 김성수의 선친과     최익현 임병찬이 일제에 항거하여  여기에서 애국의 감명으로   1910 한일합방 이후에  천하장사 아들  큰주먹  김낙기를  선출하여   일본유학으로   선후배 조직으로 활동했다

김성수와 김상태의 후원으로  와세다에 다니다가   철도공사에 극장 알바로  주오대학을 졸업햇다

김낙기와 고가마사오가 고향  한국 향수의 민요 아라랑을  일본가요로  편곡하였는데  그노래가  100년후 지금도   와세다대학 동창회노래로, 제2교가로,  그리고  응원가로 사용한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사망 위안제 노래로 매년 일본아리랑 즉 '인생극장' 곡으로  연주된다

 

일본 와세다대학 만돌린부에서 활동했던 한국거주 일본인 유학생 고가정남이  학우 채만식이의 친족  채규엽(음악학교 학생)의 노래 노래반주로  와세다 대학 음악 서클이  있었다.

김낙기 동경유학생 호남 단장은 1923 관동대지진  학살 사태로  귀국하여  고향 정읍 태인에서 천한 재인악사 광대 농악대등을  조직하여   1925 한국최초 발전소 섬진강발전소 건설 공사장 인부및 주인  위안 협율사를 조직 공연한다 

한국의  백제가요  정읍사 민요소리인  정읍농악의 멜로디소리  변주곡 아리랑 민요를  

 와세다대학  선배로서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도움으로  대동가극단을 만들어 일본에도 공연했다

와세다 대학 만돌린부 학생들은 만돌린은 물론 통기타도 연주하곤 했다. 통기타반주가 위주이고 아코디언이 간주 부분에서 받쳐준다.

 

김낙기는 친일파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항일과 국악계몽의 선구자

 

고향 마을과 인근의 농악대를 인솔하고 협율사 판소리 광대를 정읍 칠보면에서 순회고연시켰고

일본 동경에도 대동가극단  순회하는 길을 열었다고 한다

 고향 반곡리 석탄마을에 사는 엿장사 신영채를 판소리 대스타로  대동가극단에 입단 도일공연 즉 현대판 가수 송대관처럼 일본공연과 해방후 정읍국악원  판소리 선생으로 만들었다

우선 대강의 요점을 여기에 기재하고 김낙기의 숨겨진 항일운동 핵심 사연은 다음에 공개하고자 여기서 줄인다.

친일파도 공산당도 아니었던 가인 김병노의 후계자로서 동경유학생 호남단장이었던 항일과 국악계몽의 선구자 김낙기는 역사에 묻혀 있다.

 

   1923  와세다대학 음악부   아리랑을 와세다대학  제2교가, 응원가,  추모가, 동창회노래로 1938 일본아리랑 인생극장  2012 년 지금도  와세다 대학 만의  응원가 교가  아리랑    1909 이등박문이 가저간 아리랑 1988년 올림픽에서  등소평이 탄복  K-POP 한류를 중국 C-POP!!의 미래를 위하여 동북공정 목적이  고구려 토탬찬송가 '아리랑'을 소유코자 욕심이다

 

김낙기는 일본유학시에  철도건설 설계와 극장가에서 알바하며  야꾸자 청년크럽과도  연결되고 동경유학 호남학생단장을 하여 와세다 대학생 김성수 (1891-1955동아일보.주)

 와  와세다대학 친구 채만식과  고가 마사오(1904~1978)도   교우를 하여  정읍 출신 김낙기 1898-1950 를 만나서  백제가요 정읍사이야기를 하였다고 전한다  한국음악  정읍과 아리랑이 유사하고   고함치는 노래 한국 아리랑을  서양식  고운 저음음악으로  편곡하여  일본 가요 아리랑곡소리로 알맞게  '인생극장'곡으로  작곡하려고  노력하다가 1939년에  작곡하여   그 곡이 1939년 대힛트 되어 모교 와세다대학의 제2교가로  그리고 응원가로  행진곡으로 사용한다 (동영상)

김성수가 귀국하여  조선음악 명창노래대회를 동아일보 주체로 실시하엿는데  전라도에서는 김낙기 여동생이 사는  정읍 신태인 호남여관 여주인이 가야금과 노래가 우수하여 친구 김성수의  동아일보에서 처음 시도한 전국명창대회에서 전라도 유일하게 신태인에서 명창 성산호주 가 상경했다.

신태인 에서  갑부 호남여관 주인이 거문고 명수로서 거느린 성상호주 라고   나에게  신태인 출신으로 

부산에 사는    부산시  인간문화재 신태영님이 일러주고 2009년에 타계했다

 

고가마사오 엔까의 뿌리는 한국의 전통음악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한국일보사장)이 긴장된 한일관계 조정업무로 일본출장을 자주 갔다.

그런데, 일본 가요(편집자: 엔까)의 창시자인 고가마사오(古賀政男)와 한국 국무총리 장기영은 서울종로 선린상고 동창생이다. 일본에서도 장기영의 일본인 동창생 서울선린상고 출신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 당시 한국일보 창립자이자 사장이었던 장기영은 고가마사오가 작곡한 일본가요의 뿌리와 관련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엔까(演歌)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라는 기사를 크게 싣기도 했다.

 

특히 기자는 1991년 한국가요 학술연구회원으로 참여하여, '목포의 눈물'의 작곡자인 손목인 선생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은 바 있다. 기자 또한 국악의 원초격인 정읍농악과 민요, 궁중악, 동동, 수제천, 판소리를 종합하여 정읍사 국악관련 민요자료를 증언해 주었다.

근대 일본과 한국의 서양음악 교사역할을 했던 에케르트(한국거주기간 1900-1917 )는 일본의 국악을 1880년에 서양악보 채보하고 일본과 조선의 애국가를 작곡했다.

20년간(1880-1900) 서양음악을 배운 일본음악가들은 1900-1917년까지 한국에 와서 정읍, 동동곡 등을 가장 잘 아는 독일인 군악대 교사  에케르트에게 수시로 교습 받아 배워 갔다. 같은 사람이 일본과 한국음악을 교육하였기에 한국과 일본의음악은 구별하기 어렵다. 그 에케르트의 군악대 제자가 백우용이며, 이후에는 김인식, 홍난파 등이 조선궁중음악을 서양악보로 연주하는 일을 하였다.

홍난파는 소년시절부터 궁중음악을 서양악보로 연주하는 직업인으로서 1920-30년대에 수제천,동동 등등 정읍음악 악보를 익혀 알고, 국악을 하면 천민무당이되는 현실의 한국인보다 개화된 일본인이기에 서슴치 않고 궁중악을 작곡 자료로 사용하였다 한다.

여기서 궁중음악 무미한 제례악 보다 정읍, 동동등의 악곡이 흥겨운 편이여서 주로 각색된다. 1917년 백우용이 수제천을 서양악보로 채보하여 그 당시는 가장 빠른가요 궁중악으로 일본민요 하루사메와 같이 방아타령 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

이 곡을 협율사 창극에서 심청전 방아타령으로 사용하여 대유행하고 1925년에 장한몽이라는 일본극을 이 곡으로 편곡 사용했다. 이어서 정읍지방에서는 자즌농부가로 불려지고 있다.

고가마사오는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의 옆집에 살면서 1930년에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를 채규엽의 노래로 발표하여 중국 일본 대만등등 대유행하였다.

 

이 곡의 첫 기타 반주곡이 3박자로 된 방아타령을 4박으로 편곡하여 대중을 사로 잡았다. 우리가요 애수의 소야곡 반주처럼 "궁자자잔잔 뽕짝 뽕짝"으로 소리나서 "뽕짝가요"라고 부르는 소리는 농부가, 방아타령, 각설이타령의 공통되고 일치되는 특징적 감별되는 음색이 있다.

즉 5마디로 부르는 정읍사소리 높낮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 노래 마디에서는 아주 낮은소리(달아 노피곰 돋으샤),

두 번째 마디에서는 높은소리(어기야 머리곰),

세 번째 마디에서 아주 높은소리(비취오시라),

네 번째 마디에서는 중간소리로(어기야 어강도리),

다섯 번째 끝 마디에는 아주 낮은 소리(아흐 다롱디리)이다,

 

이 방법은 홍난파의 노래 '고향의 봄' 노래에서 그대로 위와 같이 모방된다.

 

1 -- 나에 살든 고향은, 2-- 꽃피는 산골,  3 -- 복숭아꽃 살구꽃,

4 -- 아기진달래,  5 -- 울긋불긋 - -, 으로 높낮이가 삼각형으로 진행 된다

 

이 노래의 높낮이 형식으로 일본가요의 시조 고가마사오의 '술은 눈물이냐 탄식이냐', '당신의눈물' 등등 많은 곡에 보였으며, '인생극장'이란 곡은 곡 전체를 정읍사 형식 높낮이 같이 모방하여 만든 히트곡이 일본 가요를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에 빼앗긴 한국의 오음계

 

농현(弄絃)은 한국만의 가야금 거문고등 줄을 눌르는 센소리내는 연주법이다. 그 농현을 일본은 '미파'와 '시도'의 반음을 이용한다.

한국에서  이 5음법을 사용하면 친일파로 매도해 왜색가요로 몰아 없앤다.

한국, 중국, 일본 국악 음계는 5행사상으로 7음에서 5음으로 19세기에 구성되었는데, 농현중심의 한국은 도-레-미-솔-라 음계로 주로 내림마장조를사용하나 농현표현이 어려운데 비하여, 일본은 미-파-라-시-도.음계를 내림마장조로 사용하므로 농현표현이 가능하여 슬픈 한국적 음악표현이 5음계로 가능하다.

그래서 왜색가요라는 형식으로 작곡을 슬픈듯한 계면조(단조)는 한국계 가수가 주로 힛트 한다.

일본국악에는 줄을 눌러힘주는 농현이 없다. 오음계 도레미솔라 한국 아악음계로는 가능하고우는소리 통곡 같은 계면조 표현이 어렵다. 그래서 매력이 없어 국악이 외면당하고 있다. 오히려 일본음계가  슬픈노래 표현이 편리하다

프랑스에게 빼앗긴 직지심경은 하나의 책이다. 그 보다 수천,수만배의 문화유산 정읍사람의 것 그것이... 

정읍사는 백제 초대형궁중음악이 정읍의 유산이 아닌 일본가라오케와 일본미디어 세계산업으로 핵폭발처럼 일본이미지로 세계로 진출하여 나가고 있다

남원의 도공 심수관이 일본에 잡혀가 오늘날 일본의 도예를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듯, 정읍사 음악도 일본에서 가져가 심수관의 도자기처럼 그 소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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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 호난 군산학생 채만식의 친족으로  일본 음악대 유학생 채규엽은   

190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채규엽은 신명학교를 졸업,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정식 가수수업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가수다.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돼 <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했다. 이어 <명사십리> <시들은 청춘> 등 히트곡들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 최고 인기작곡가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히트곡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淚溜息)>를 번안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우리말로 취입,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땐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가수로 꼽혔다. 잡지사(삼천리)의 인기가수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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