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학군 - 의병-동경유학파 김병로 김성수 신익희가 이룬 독립역사
왜 함경도와 전라도를 차별했나 3
1894 동학군은 글을 몰라 실패, 의병 김병로 친족 김성수 일본유학 3.1독립선언, 이시영 임시정부 까지
역대 구국의 전라도! 담양 정읍 출발 신익희 김성수 전진한 장면 조병옥 윤보선에서 이철승 배격이...
1923 일본 동경유학생
1923년 9월1일 일본은 동경에서 관동대지진 이 일어나자 이를 조선인 방화로 보도하여 조선 독립운동에 일본인 청소년단을 충동 목적 조선인 6000명을 학살한다
방학중이라 유학생은 피해가 없었으나 와세다 대학생으로 소설가 채만식은 중퇴하였고 김낙기(수염사진)는 함경도 회령으로 알바 장소를 옮겼다
전라도 1905 소년동학군 김병로 김성수등이 한일합방후 일본유학 1919 3.1 운동 주동자로 함경도 독립군 상해정부를 세운 성역 이제는 일본총독이이 만든 서울에서 전라 함경배타 조작정서가 지금은 지역감정 전술로 변질되었 다
미국 도움으로 신익희 이시영 상해임시정부를 김구선생이 김일성을 찾앗다는 이유로 마치 김구선생 만을 성역화하고
독립의 주역 김성수를 친일로 부각하고 김병로 장덕수 백관수 신익희 이시영등을 폄하시켜 왜곡교육 되고 잇다
일본세력에 유별나게 반대하는 전라도 !! 임진난에서 부터 유달리 정읍 동학군까지 일본 식민지진출에 걸림돌이였다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간신히 건저낸 이씨 왕권이 민비에게로 돌아가자 대원군은 동학교도를 선동했다
대원군 목적은 왕권이요 동학군의 목적은 양반의 꿈을 이루는 계급타파를 요구하였는데 그원인은 미국 링컨의 "노예해방" 소식을 선교사 등으로 이미 듣고 자유의 미국국민을 동학군은 동경했다
대원군이 충청도 경상도에 호소해도 오로지 전라도 정읍에서 만이 항일동학군이 일어나고
500년간 뛰어든 동학군의 세력은 전국을 울렸다
양반세력을 고수하려던 민비 추종세력 최익현(포천사람)도 대원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읍 동학군의 항일병영기지를 인수하여 1906년 항일군으로 나섰다
포천사람 최익현이 항일 운동을 경기도 고향에서 도 못하고 동학군 전라도 항일세력을 이용하려고 내려갔다
이처럼 항일세력 독립군은 전라도가 아지트로 일본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영조때 이인좌. 박필현의 난에도 정읍 도강김씨 김도연의 세력으로 진압하였고 전봉준(1894.1- 1895 .3 )동학군은 김개남과 같이 일어낫고,
1895년 10월 8일 새벽. 민비시해에도 아무 대책도 없어 최익현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의병모병으로 김개남장군 고향 정읍군 칠보면 도강김씨 호족 김기술의 협조로 항일투쟁에 필요한 동전을 만들어 사용햇다
1892년(고종 29)부터 1894년 사이에 주조되어 사용된 상평통보. 평양전(平壤錢)·신전(新錢)이라고도 불리는데, 평양에 분설된 전환국 주전소에서 주조하였다.
아리랑 영화 나운규 친구인 윤봉춘의 부친 윤득주는 동전 만드는 주전(鑄錢) 기술자로 동학군과 의병활동 자금조달 임무로 고종 왕명으로 태인 칠보면 지역에서 독립군 자금용 주조하였다
1894-1905년에 동전을 부녀자들이 다듬이 방망이 소리로 소란하게하고 동전을 찍었다는 전설이 백화마을 등에서 행하였다고 한다
아연·주석·철 등에 30∼40%의 구리를 섞어 주조한 다음 구리를 도금했다.
1906년 대원군의 밀명으로 포천사람 최익현이 동학군 전봉준 김개남의 친족 김직술 김기술 호족세력에 다시 찾아 항일부흥 모두 도강김씨 중심으로 무성서원에서 봉기하여 일어났다
김병로 김성수 김상태의 도움으로 정읍 무성서원 도강김씨 청년을 김낙기를 와세다대학에 보내 동경유학생 호남 학생단장을 하였다
1924년 고향 무성서원에서 협율사 농악 걸궁대를 조직 자금을 모아 정읍 북면 승부리 유학규에게 보내 함경도 경유 이시영 임시정부에 보냈다
유학규는 돈을 전달 직후에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에 시달려도 돈을 땅에 뭍었다는 장소를 마당밑, 감나무밑, 마루밑, 장독밑등으로 번복하며 거짓으로 여러곳을 파내는 시간에 함경도를 건너 자금이 전달되어 갔다 (후손 전주 유숙희 말)
1905년과 1919년에 정읍 칠보면 백화마을에서 항일독립군 자금용으로 만들어 유학규가 마당에 뭍은 동전
1907 순종황제는 최익현 김기술등 항일운동 참가자들의 구속으로 고통 받는 의병을 일본군 모르게 후원하고 그 피해를 줄이려고 홍범식을 태인현감으로 보냈다
홍범식은 임꺽정전의 저자 홍명회의 부친이다 홍명희와 같이 일본에 유학하였고
홍명희는 이 노래를 북한의 소년행진곡으로 사용하였다
1907부터 1910까지 전해산 의병의 호남 유격활동이 소멸되어 국내항일이 사라젔다
1908년에 일본에 항복한 이용구 동학 항복군이 회문산 용암리에 주둔하려고 추석 다음날(8.16) 칠보 발전소 앞 행단 주막에서 숙박중 이를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 학살하였으나 같은 동학군 항복자 강진산은 "아무날 33명이 천신의 명으로 모두 죽을텐데 내가 12명을 구하였다"
라고 학살을 천지재변 천명으로 말하여 동학군종교에서 오늘에 거대종교 성경신화로 설교하고 있다
1908년 태인현감은 충청도 고향 홍성사람 이용구 동학군 시천교 교도를 왕명으로 순창 회문산에서 의병을 양성하려고 하엿으나 문맹자와 청소년 동학군이 배움이 없어 패전함을 인접 담양군 금성면대곡 창흥학원에서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이 목격하고 배워야 이긴다고 생각하여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임진왜란의병장 담양 고경명 후손이 담양에 창흥학원 김후진 후손 김직술 김기술 후손 세력이 무성서원에서 힘을 모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동경 유학대학생에서 송진우는 귀국하고 신익희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김준연이 애국단을 조직한다
1914년에 국내에서 우선 국민계몽과 산업발전 학교 신문발행으로 국내 간접 독립운동을 벌인다
국내 항일운동이 불가하게 되어 국외로 1914년 대한광복군이 설립되어 나간다
그 전투 세력으로 항일 독립군 동학군장수 김구와 백정기 의사등 거센 해외 반발에 일본 총독부는
만주국에 부의() 황제를 세우고 국내에서는 전라도 정읍에는 동학군 세력을 회유하려고 동학교도 강증산에게 상제(上帝), 차경석에게 차천자( 車天子)라고일본천황과 동등으로 호칭을 하여도 임시 묵인하였다
그러자 1918년 미국 월슨대통령 평화원칙에 의거 자국독립선언을 듣고 고무되어 이에 1919년 동경유학생이 주동 2 .8 독립선언을 하였으나 일본당국이 강제 해산하자 국내로 들어와서 1919년 3.1운동을 이르킨다
동경 유학생 신익희는 처가집 이시영 상해 임시정부 대표의 친척이다
동학군은 무지하여 실패하엿다 그래서 미국인 교수가 많은 와세다 대학에서 선진학문을 배우게된다
김성수 장덕수 백관수 는 동학군 최익현부대원이였던 김병로와 같이 담양 창평 학교에서 공부 와세다대학 등 동경유학을 하엿다
김병로의 인접 마을 정읍군 동학군 지역 호족세력 도강김씨와 고흥유씨 유학규가 이시영 함경도 독립군 지역에 자금전달을 하엿다
그러다가 전라도에 전해산 의병이 출몰하여 더욱 불안하였는데.
1920 년 일본군 조선인 장교 지청천이 만주 일본군영 에서 기밀군사지도를 가지고 탈퇴 망명하여 만주신흥독립군학교를 만들었다
지청천장군은 순종황제시대 궁중 소년병으로 한일합방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지청천 장군의 만주신흥무관학교 교가는 전주신흥고교 교가로서 이름이 같다
다급한 일본은 최익현 의병군을 추모하는 비석과 사당을 1920년에는 동학군 전봉준의 마을 정읍 산외면 동곡리에 세운다
그리고 일본은 독립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읍 산내면 섬진강 댐을 1920년대에 공사를 하고 최익현 임병찬등 독립군 주장과 가담자의
기념비를 하청사 사당을 짓고 추모비를 1920 정읍 산외 오공리 전봉준 김개남 고향에 세우는등 동학군 일자리 만들기등 회유작전을 다급히 폈다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만주와 러시아 주변 함경도 두만강 회령을 중심으로 독립 계몽
1922 지강내 사당패농악, 윤세만 내장사 절걸궁 농악단이 섬진강 땜 공사장에서 조선군악을 농악소리로 울렸을 뿐 항일운동은 불가하게 된다
다
그래서 동경유학생 호남학생단장이 주로 나서서
1922 동경유학생 회령에서 연극운동으로 조선독립고취 계몽운동이 일어난다
1923년 9월1일 일본은 동경에서 관동대지진 이 일어나자 이를 조선인 방화로 보도하여 조선 독립운동에 일본인 청소년단을 충동 목적 조선인 6000명을 학살한다
방학중이라 유학생은 피해가 없었으나 와세다 대학생으로 소설가 채만식은 중퇴하였고 김낙기는 함경도 회령으로 알바 장소를 옮겼다
1923 년 10월 수성-회령간 부설공사에 착수하여 1923년 회령 개통중 철도건설 알바를 하여 주오대학으로 졸업햇다
윤백남은 김성수와 와세다대학 1910년도 동문으로 동아일보 입사 소설연재와 독립운동 연극활동을 위하여 동경유학생 호남학생단장 김낙기등 후배들과 함께 함경도 회령 철도 공사장 알바 학생으로 참여 하엿고 정읍 칠보면 김개남 김기술 동학군 본거지 지역 토목건설 인부 유공진 권순국 김낙선 유동근를 데리고 갔는데 농악공연을 겸했다 유동근은 정읍 농악상쇠 쇠바우 무속인 상쇠이며 유명한 설장구 신기남의 장인이였다
인접 옹동면 에서 권태준이 자금을 주어 권순국이 농악대를 조직 상쇠 유동근 장구 권만청등이 함경도 회령 철도공사장 에 서 공사감독 김낙기의 판에 최초농악을 보인다
북한과 함경도에는 농악이 없거나 사자춤 탈춤으로 반주에 불과하다
중국 연변에는 여기 회령 철도공사장 에서 파격적인 동작 전라도농악이 선보여 유입된것으로 본다
와세다 대학출신 윤백남이 이기세 1922년에는 도쿄[東京]유학생 갈돕회에서도 하기방학을 이용, 전국의 주요도시는 물론, 간도까지 순회공연을 하고 함경북도 회령에서 해산하였다. 3·1운동 후 학생아마추어연극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2년 주인규는 안종화에게 발탁된 것이 기회가 되었다. 예림회는 지두한, 서정익, 박정걸 등 일본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출신들이 함흥지역에 세운 연극단체였다.
안종화, 주인규, 김태진, 그리고 나운규가 있었는데 주인규는 이때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규는 1950 월북 남노당 숙청 자살했다
이처럼 조선 1895 동학군후예가 도일하여 1910 한일합방되고 1918년 일본 유학생에서 독립선언에서 강제해산하여 국내에서 1919 3.1운동으로 그리고 국민계몽으로 구국운동이 암약한다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에 독립군 청산리싸움 이범석 장군의 승전에 일본 총독부는 전라도 동학군과, 광주학생사건 등의 연속된 반일항쟁에 보안상 제거대상으로 전라도사람 움직임을 살폈다
전라도 동학군 후예들이 일본 동경유학생 조선 학생회로 한일합방에 만주국경 함경도 회령으로 가서 연극과 농악으로 안종화 연극단에서 독립군 출신 나운규와 윤봉춘을 와세다대학 출신 윤백남과 함께 함경도 항일문화가 생긴다
김성수 설립 중앙보육학교에서 가르친 이정숙이 동경 유학생 홍난파가 가르처준 '고운소리 아리랑'으로 부른다
그래서 일본경찰은 위험한 전라도 동학군과 함경도 독립군 집단 색출에 집중햇다
서울에서 사는 전라도와 함경도 사투리는 요주의 인물 미행의 대상이였다
함경도 전라도 학생을 하숙시키거나 가까이 하여 독립군 일당으로 몰려 구속되는 시대의 악몽이다
그 애국 전통이 지금은 함경도 회령 혜산 온성 청진등 출신 탈북자 미녀 들이 남은 숙제 남북통일의 문화를 트고 있다
동경대지진 6000명 학살 현장에 분노한 와세다 대학생 김낙기는 그 동포 유골조각을 포켓에 지니고 다니며 일본순사를 구타하며 정읍농악을 회령에서 울렸다
그 당시는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와세다대학생 항의 몰린 일본 이여서 일본순사의 허점을 찾고나서 유골을 보이고 상습구타햇다
이를 본 아리랑 영화 작자 나운규가 모델로 농악놀이와 정신병자 영진이가 일본순사도 때리는 아리랑 주인공 줄거리가 생겨 난다
권희덕 n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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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유학규
전북 정읍(井邑)사람이다.
1919년 10월경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의원이었던 조한옥(趙漢鈺)을 중심으로 윤철(尹喆)·이태훈(李泰勳) 등과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하고, 유만규(柳滿圭)로부터 5천원을 모금하여 윤철(尹喆)을 거쳐 조한옥(趙漢鈺)에게 전달하고 이를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납부하였다.
윤철(尹喆)이 고일정(高一政)과 협의하여 도(道)에는 의정사(宜政使)를, 군·면에는 관장(管長)이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전북 정읍군(井邑郡) 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상해 임시정부 일원인 이영선(李英善), 어대선(魚大善) 등과 협의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인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하여 그중 4천원을 유만규(柳滿圭)로 하여금 현금화할 것을 위탁하고 활동하다가 1921년 6월 7일 피체되었다.
정읍군 칠보산 승부리 집을 일본군이 수색 상평통보 동전 자루를 마루밑에 뭍어 숨겨 독립군에 발각 온 가족이 고초를 당했다
1922년 3년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유학규는 독립운동의 인재양성을 위해 김성수 동학군 김기술 장군 친족 김낙기를 와세다대학에 정읍 거부 김상태와 보조 유학을 보냈다
1914 대한광복군
1918미국 월슨대통령 평화원칙 자국독립선언
1 6 유학생 백관수 이광수 송진우 담양금성면대곡
1919년 동경유학생 2 8 독립선언 일본강제 해산
1919년 3.1운동
1920 지청천장군 탈출 독립군
1922 지강내 사당패농악, 윤세만 내장사 절걸궁 농악단
1922 동경유학생 회령에서 연극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