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藝畵鑑賞

[스크랩]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 고서화 2

水西散仁 2012. 9. 5. 17:16
나한도(羅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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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유송년(劉松年, 1174~1224년이후까지 활동)
나한도(羅漢圖)
족자(軸), 비단에 채색, 117 x 55.8 cm
 
유송년은 전당(錢塘: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사람이다. 청파문(清波門)에 살았다하여 옛 사람들은 그를 “암문(暗門)의 劉”라고 불렀다. 순희(淳熙, 1174-1189)연간 화원의 학생이 되었고, 소희(紹熙, 1190-1194)연간에 화원 대조(待詔)가 되었다. 장돈례(張敦禮)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인물화와 산수화를 무척 잘 그려 그 솜씨가 스승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영종(寧宗, 1195-1224)때 “경직도(耕織圖)”를 바쳐 황금으로 장식한 허리띠(金帶)를 하사 받고 절품(絕品)이라 칭해졌다.


고궁박물원은 세 점의 유송년이 그린 나한도를 소장하고 있는데, 세 점 모두 “開禧丁卯(1207)劉松年畫”라는 낙관이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중 한 점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나한의 짚은 눈썹과 높은 코는 그 용모가 인도 사람 같으며 우단식(右袒式) 가사를 입고 나무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옆에는 시중을 드는 스님이 긴 팔 원숭이가 따서 넘겨주는 석류를 옷 소매로 받고 있는데 그 앞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이를 쳐다보고 있어 화면에 생동감을 더한다. 나한의 얼굴은 온통 주름이 덮여 있으며 양 미간을 찡그리고 집중하고 있는 표정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다. 전체적으로 필치의 변화가 다양한데,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유연하며, 나한 머리 뒤의 원광(圓光)은 나무 가지와 줄기와 겹쳐지지만 반투명으로 되어있어 그 순서가 분명하다. 그림 전체의 정교하면서도 절제된 채색이 곱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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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산이 있는 풍경(溪山清遠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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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하규(夏珪, 1180~1230년경에 활동)
강과 산이 있는 풍경(溪山清遠圖)
두루마리(卷), 종이에 수묵, 46.5 x 889.1 cm
 
하규의 자는 우옥(禹玉)으로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이다. 이당(李唐, 1049-1130 이후), 유송년(劉松年, 1174-1194활동), 마원(馬遠, 1190-1224 활동)과 함께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라 칭해진다. 산수와 인물에 능했으며 독필(禿筆, 몽당붓)을 즐겨 사용하였고, 누각이나 정자를 그리는데 계척(界尺, 그림을 그리는데 쓰이는 자)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그렸다고 한다. 필치가 정밀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이 횡권은 10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 제작된 것으로, 첫 번째 단락은 그 길이가 25센티미터 이고 나머지 9단락은 각각의 길이가 모두 약 96센티미터 정도가 된다. 그림 안에서 경물의 변화가 매우 다양하여 어떤 장면에서는 우뚝 솟은 산 봉우리가 나타났다가 또 시냇물이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다. 화가는 올려다 본 모습(仰視)과 똑바로 바라본 모습(平視), 내려다 본 모습(俯視) 등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경치를 운용하여 변화가 있는 산봉우리들과 층층이 이어진 암벽, 구불구불 구비구비 흘러가는 하천을 그리고 있는데, 독립적인 단락 안에서 각각 다른 시점을 사용하여 독특한 공간 구조를 만들내고 있다. 소나무 숲의 표현에 있어 필묵의 사용이 다양하며, 바위를 그리는데 사용된 대부벽준법(大斧劈皴法)은 이당(李唐)의 부벽준(斧劈皴)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다. 화가는 건조하고 마른 필묵으로 바위 벽의 윤곽을 먼저 그리고 다시 물기를 많이 머금은 필치로 빠르게 그려나가 화면에 물과 먹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힘차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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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모래밭의 백로(雪灘雙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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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마원(馬遠, 1190-1224 사이에 활동)
눈 내린 모래밭의 백로(雪灘雙鷺)
족자(軸), 비단에 채색, 59 x 37.6 cm
 
마원의 자는 흠산(欽山)이며 본적은 하중(河中, 오늘날 산서성(山西省)영제(永濟)) 출신이다. 송나라 광종(光宗)과 영종(寧宗) 시기에 화원 대조(待詔)를 지냈다. 산수화에 능하여 구도나 필법 또는 의경에 모두 새로움이 있어 “수묵창경(水墨蒼勁)”파의 양식을 수립하였다. 하규(夏珪)와 이름을 같이 하여 “마하(馬夏)”라고 불리워진다.


눈 쌓인 절벽과 마른 나뭇가지, 갈대와 대나무가 있는 겨울 물가 그리고 모래밭의 네 마리의 백로, 모두 추위에 웅승그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생생한 묘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그 장면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한다. 짙고 옅은 먹으로 그려낸 나무와 바위, 먼 산과 갈대는 그리지 않고 하얗게 남겨 두는 방법으로 묘사한 눈 쌓인 곳과 흑백의 대비를 이루며 먹의 흔적을 거의 찾볼 수가 없는 백로들은 흑과 백의 사이에 있는데 이러한 극적인 흑과 백의 대비는 설경의 맑고 차가운 느낌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암벽 위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는 꺽이고 이어지는 그 기세가 마치 교룡이 하늘로 나르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러한 필세는 아래로 끌려 내려와 길고 비스듬히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그리는 방법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마원의 길게 늘어진 가지 양식”의전형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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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들고 손님을 기다리다(秉燭夜遊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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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마린 (馬麟, 1194-1264에 활동)
촛불을 들고 손님을 기다리다(秉燭夜遊圖)


화첩(畵帖), 비단에 채색, 24.8 x 25.2 cm
“환선화책(紈扇畫冊)”의 두 번째 폭

 
마린은 본적은 산서성(山西省) 하중(河中, 오늘날 영제현(永濟縣)) 출신으로 훗날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으로 이주하였다. 궁정화가 마원의 아들로 남송 영종(寧宗)과 이종(理宗) 두 황제의 화원(畵院)에서 봉직하였으며 지위가 지후(祇候)에까지 이르렀다. 작품의 주제가 광범위하여 산수화와 화조화에 능했으며, 인물화 또한 잘 그렸다. 그 작품은 대부분 군왕에게 진상되어 감상이나 하사용으로 쓰여 그림에는 남송 영종과 양황후(楊皇后, 1162-1232) 그리고 이종의 제시가 자주 보인다.


이 그림은 소동파(蘇東坡)의 해당시(海棠詩)에서 소재를 취하였다. “東風嫋嫋泛崇光,香霧霏霏月轉廊,只恐夜深花睡去,更燒高燭照紅妝” 건물과 누각에는 밤의 정취가 드리워져 있고 어두운 밤 중에 정원에는 촛불이 높이 밝히고 있어 정원에 활짝 핀 해당화를 비추고 있다.


한 선비가 태사의 (太師椅, 등널과 팔걸이는 반원형이며 다리는 접을 수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그윽하고 고요한 달 밤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마린의 자연에 대한 관찰은 매우 예리하고 사생 능력이 매우 뛰어나 경치를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냈으며 궁궐 정원의 정자와 회랑 등 건물과 정원의 배치를 잘 묘사하고 있다. 원체(院體) 회화의 정밀하고 가지런하며 섬세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시적인 정취가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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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람이 그린 인물(宋人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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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작자 미상
송나라 사람이 그린 인물(宋人人物)


화첩(畵帖), 비단에 수묵담채, 29 x 27.8 cm
“역대화폭집책(歷代畫幅集冊)” 첫 번째 폭

 
이 그림은 한 선비가 평상에 걸터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옆에는 거문고와 바둑, 책과 그림 네 가지 물건과 음식이 놓여있고 동자가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다. 평상 뒤에는 병풍에는 선비의 초상화가 그려진 족자가 걸려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문인이 즐기는 고상한 완상물(玩賞物)들을 곁에 두어 여유롭고 우아한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은 왕희지(王羲之, 303-361)를 회상하는 것 같은데, 실제 송대 문인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남송시대에 유행했던 “향을 사르고, 차(茶)를 즐기며, 그림을 걸고, 꽃을 꽂아 장식하는” 것을 즐기는 정취가 북송 말에 이미 서서히 발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보통 “그림 속의 그림”인 병풍은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 그림은 특이하게 화조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는 매우 드물다. 이 그림 속의 그림은 북송 말기 물가에서 노니는 새를 그리던 화조화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조화가 매우 유행했던 송 휘종(徽宗) 때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은 송나라 휘종(徽宗)과 고종(高宗) 그리고 청(清) 고종(高宗: 건륭) 등 황제의 소장품이었다. 청 고종은 그림 속 인물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요문한(姚文瀚)에게 비슷한 구도의 작품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그림 속의 인물은 선비의 옷을 입은 건륭 황제로 대치되어 건륭황제의 우아하고 한적한 문인 생활`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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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묵으로 그린 선인 (潑墨仙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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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양해(梁楷,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활동)
발묵으로 그린 선인 (潑墨仙人)
화첩, 종이에 수묵, 48.7 x 27.7 cm
“명화림랑책(名畫琳瑯冊)” 두 번째 그림
 
양해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매우 유명한 대화가로 그의 선조인 양의(梁義)는 일찌기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에서 관리를 지냈다. 양해는 인물과 산수, 불교와 도교 주제의 그림, 귀신 등을 잘 그렸다. 가사고(賈師古, 12세기 중반에 활동)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 그림이 스승을 능가하였다. 남송 영종(寧宗) 가태 (嘉泰, 1201-1204) 연간, 가장 높은 직위의 궁정 화사(畫師)인 화원의 대조(待詔)를 지냈다. 황제는 특별히 양해에게 화원에게 가장 영예로운 선물인 금대(金帶)를 하사했지만 양해는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술을 마신 후에는 예법을 지키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여 스스로를 “미치광이 양씨(梁瘋子)”라고 불렀다. 오늘날 전해지는 양해 작품들을 보면 아주 간략한 붓질로 그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화법을 “감필(減筆)”이라고 부르며 이 작품 역시 이에 해당한다.


양해는 먼저 큰 붓질로 먹을 칠한 후, 어깨부터 옷의 끝단까지 그려냈는데 날아가는 듯한 붓의 기세와 먹의 리듬은 폭발적이어서 마치 우뢰와 천둥이 치는 듯 하다. 열 번 정도의 붓질만으로 그림 속에는 미소 진 얼굴로 걷고 있는 선인(仙人)의 모습이 완성되는데 간단한 필치지만 선인의 탈속한 기질을 충분히 잘 표현해내고 있다. 이 그림은 비록 순간에 완성된 것이지만 평생 노력하고 다듬은 기량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양해의 예술 창작은 술을 빌어 흥을 돋우고 그 취기를 빌어 뜻을 펼치는데,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거나 구속됨이 없는 가장 진실한 자아의 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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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람이 그린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宋人畫千手千眼觀世音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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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작자미상
송나라 사람이 그린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宋人畫千手千眼觀世音菩薩)
족자(軸), 비단에 수묵 담채, 176.8 x 76.2 cm
 
관세음(觀世音)은 관음이라고도 불리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불교 인물의 하나이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머리가 하나에 팔이 둘인 현교관음(顯教觀音)과 달리 이 작품은 머리에 모두 26개의 보살 머리와 부처 머리 하나가 달리고 천 개의 손을 가진 관음상으로 손마다 손바닥 가운데 눈이 하나씩 있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라고도 불리는 밀교관음(密敎觀音)의 중요한 전형의 하나이다.


굽이 치는 파도 위에 사천왕들이 칠보연대(七寶蓮台)를 지고 있는데,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매우 장엄한 모습으로 그 대좌 위에 서있다. 좌우로 각각 두 명의 보살이 따르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두 손을 합장하고 관음보살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머리에 화불보관(化佛寶冠)을 쓰고 있으며 감색을 띤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온다. 두 입술 아래 위로 수염이 남성적인 모습의 표현이지만 수려하고 아름다운 얼굴 모습은 동시에 여성적인 특질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채색이 매우 곱고 아름다우며, 영락 장식과 칠보연대 등도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부드럽게 날리는 듯 한 옷 주름의 선 등 전체적인 특징이 일본에 전해진 남송의 불화들과 매우 흡사하여 이 작품이 드물게 전해지는 남송 불화의 수작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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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부도(赤壁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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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    무원직(武元直, 1190-1195사이에 활동)
적벽부도(赤壁賦圖)
두루마리(卷), 종이에 수묵, 50.8 x 136.4 cm
 
작품에 낙관이 남아있지 않지만 실제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무원직(武元直)이다. 무원직의 자(字)는 선부(善夫)이며, 호는 광막도인(廣莫道人)으로 대략 12세기 하반기에 활동하였다.


소식(蘇軾, 1037-1101)의 적벽부(赤壁賦)는 송 신종(神宗) 5년(1082)에 완성된 후,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읊어지게 되는데 화가는 바로 이 적벽부의 내용을 그림의 주제를 삼고 있다. 그림 중에서 소식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두 명의 손님과 뱃사람 한 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나아가고 있다. 그림 속의 적벽은 ‘절벽이 마치 천 척에 이르는 듯 높고’ 물은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림 중에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가 강조되어 있으며, 바위의 묘사에 전형적인 부벽준법(斧劈皴法)을 사용하여 절벽은 마치 예리한 도끼로 울퉁불퉁하게 잘라낸 것만 같은데 바위의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질감을 온전히 표현해내고 있다. 조각배는 비록 작아서 한 치 밖에 안되지만 아주 작은 점들을 계속적으로 찍어 그려낸 것으로 점의 움직임이 마치 음표가 딩동댕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소용돌이 치며 흐르는 물은 물결이 솟구쳐 오르고 돌아가는 선율에 리듬감이 느껴지며, 가면 또 오는 것이 있어 전체적으로 붓질에 음악성이 충만하다. 두 언덕의 사이에 큰 강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 기상이 웅대하고, 안개가 짙게 낀 넓은 수면은 끝없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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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산과 화산의 가을색(鵲華秋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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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작산과 화산의 가을색(鵲華秋色圖)
두루마리(卷), 종이에 수묵 담채, 28.4 x 90.2 cm
 
조맹부는 일찍이 산동성 제남(濟南)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작산(鵲山)과 화불주산(華不注山)은 제남에 소재한 명산이다. 본 권의 그림은 1295년 고향인 절강(浙江)에 돌아와 주밀(周密, 1232-1298)을 위해 그린 것이다. 주밀은 본적이 산동(山東)이지만 조맹부의 고향인 오흥(吳興)에서 자라 산동 지역에 가 본적이 없다. 조씨는 주밀에게 제남의 아름다운 경치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이 그림을 그려 선물하였다. 드넓은 강과 소택지 위로 아주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지평선 위에 두 개의 산이 서 있는데 오른쪽은 쌍봉이 솟아 산세가 높고 가파른 것은 “화불주산(華不注山)”이고 왼쪽의 둥글고 평평한 정상의 것이 바로 “작산(鵲山)”이다. 이 작품은 회화사에서는 문인화풍의 청록 채색 산수라고 부른다. 두 개의 산은 모두 옅은 코발트 색으로 칠한 데 짙은 코발트 색이 섞여 있는데, 물가를 칠한 옅은 남색과 나뭇잎의 여러 가지 청색들과 어울려 동색 조화를 이룬다. 경사진 둔덕과 물에 가까운 곳은 적갈색으로, 지붕과 나무줄기, 나뭇잎은 붉은 색, 노란색, 적갈색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난색 계열의 색깔은 코발트색과 색채학적인 보색 작용을 하는데 매우 적절히 이용되고 있다.
 

출처 : 양지
글쓴이 : 양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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