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藝畵鑑賞

[스크랩]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고서화 3

水西散仁 2012. 9. 5. 17:16
부춘산에 은거하다 (富春山居圖, 무용사권(無用師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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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황공망(黃公望, 1269-1354)
부춘산에 은거하다 (富春山居圖, 무용사권(無用師卷))
두루마리(卷), 종이에 수묵, 33 x 639.9 cm
 
황공망은 강소성(江蘇) 상숙(常熟) 사람이다. 본래 성은 육(陸)씨로 이름은 견(堅), 자는 자구(子久), 호는 대치(大癡), 또는 일봉도인(一峰道人)이라 불렀고 만년에는 호를 정서도인(井西道人)이라 하였다.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영가(永嘉) 황씨에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부친이 나이 90세에 그를 얻었다하여 “黃公望子久矣(황옹은 아들을 오랜 간 바라다)”라고 했고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오진(吳鎭, 1280-1354), 예찬(倪瓚, 1301-1374), 왕몽(王蒙, 1308-1385)과 함께 “원사대가(元四大家)”로 불린다.

지정(至正) 7년, 나이가 점점 늙어가는 황공망이 절강성 부양현(富陽縣) 부춘향(富春鄕)으로 돌아와 같은 문하의 무용사(無用師)를 위하여 부춘산의 경치를 그려준 것으로 지정(至正) 10년(1350)에 3-4년의 시간을 거쳐 완성한 것으로 이때 황공망의 나의 82세였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황공망의 그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바로 황공망이 만년에 살았던 산의 모습으로 춘명촌(春明村), 묘산(廟山), 대령(大嶺) 그리고 부춘강(富春江) 등 일대의 산천 경치이다. 그림 중에는 얕트막한 언덕과 모래 둔덕이 있으며, 집과 건물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다. 산등성이와 구릉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그 산세가 중첩되고 숲과 나무가 교차하고 있다. 경물의 배열에 있어 사이를 띄었다가 또 다시 빽빽해지는 것이 매우 규칙적이며, 먹의 진하기와 물기를 달리하여 진한 먹과 엷은 먹, 물기가 많은 붓질과 마른 붓질로 먹색의 변화가 아주 풍부하다. 산과 바위는 모두 피마준법(披麻皴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운필(運筆)의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고 선의 길이가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는데 이를 나란히 배열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묘하게 번갈아가며 조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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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송도(雙松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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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오진(吳鎭, 1280-1354)
쌍송도(雙松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 180 x 111.4 cm
 
오진은 절강성 가흥(嘉興) 위당진(魏塘鎭) 사람이다. 자는 중규(仲圭), 호는 매화도인(梅花道人)으로 매사미(梅沙彌)라고 관서를 쓰기도 하였다. 오진은 시문에 능하고 초서를 잘 썼다. 수묵 산수와 묵죽도에도 뛰어났다.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왕몽(王蒙)과 함께 “원사대가(元四大家)”로 칭해진다.

오진은 처음에는 북송 명가들의 산수화를 자주 임모하였고 50세 이후, 화풍이 점차 성숙하였다고 전한다. 그림의 좌측에 쓰여진 “태정(泰定)5년(1328) 춘 이월 청명절에 뇌소존사(雷所尊師)를 위해 그리다. 오진” 이란 내용의 제발을 통해 이 그림이 오진의 나이 49세 때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 중 쓰여진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소나무 두 그루는 하늘로 향해 서 있으며 나무 뒤로 굽이굽이 한 줄기 계곡물이 그림 뒤로 흘러가고 있고, 그 너머 언덕기슭에는 집 몇 채가 있어 화면에 깊은 공간감을 준다. 이 그림의 화제는 “쌍송도”라고 되어있지만 실제 나무의 줄기 모양으로 판단해 볼 때 오진이 그린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편백(扁柏)나무이다. 편백나무 가지가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이성(李成), 곽희(郭熙) 그림 속의 나무 표현을 환기시킨다. 또 나무껍질은 긴 피마준(披麻皴)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그 필법이 동원(董源), 거연(巨然)의 양식과 비슷하다. 경사가 진 기슭에는 대부분 돌을 그렸는데 이 역시 동원과 거연 산수화풍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체적인 필력이 힘차고 묵기가 두터운데 담담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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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임옥도(具區林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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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왕몽(王蒙, 1308-1385)
구구임옥도(具區林屋圖)
족자(軸), 종이에 수묵 담채, 68.7 x 42.5 cm
 
왕몽은 오흥(吳興, 오늘날 절강성 호주(湖州))사람이다. 자는 숙명(叔明)이며 호는 황학산초(黃鶴山樵), 향광거사(香光居士)라고 하며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외손자이다. 명대 초기 호유용(胡惟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화풍은 왕유(王維, 701-761), 동원(董源, 10세기 상반에 활동), 거연(巨然, 10세기)을 따랐으나 자신만의 개성이 있었으며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오진(吳鎭, 1280-1354), 예찬(倪瓚, 1301-1374)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여 ”원사대가(元四大家)”라고 불리운다.

이 작품은 강소성(江蘇) 태호(太湖) 근처의 임옥동(林屋洞)의 경치를 그린 것이다. 작은 동굴과 층층히 겹쳐진 산석, 울창한 나무숲, 드문드문 있는 집들과 물결이 전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데 겉모습의 모방을 뛰어넘는 자연 경관에 대한 대담한 해석을 보여준다. 그림은 한치의 틈도 없이 꽉 채워져 있지만 우측 상단을 비워놓는 왕몽의 솜씨 있는 처리로 답답한 느낌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왕몽은 산석은 우모준(牛毛皴)법으로, 나무 줄기는 긴 피마준(披麻皴)법으로 그리고 다시 빽빽한 태점(苔點)을 더해 변화가 많은 붓질은 풍부하면서 섬세하다. 먹색은 층층이 칠해져 농담이 분명하며 황토색과 노란색, 붉은색 점들을 함께 사용하여 화폭 전체에는 가을 색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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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슬재도(容膝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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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예찬(倪瓚, 1301-1374)
용슬재도(容膝齋圖)
족자(軸), 종이에 수묵, 74.7 x 35.5 cm
 
예찬의 자는 원진(元鎭), 호는 운림(雲林), 우옹(迂翁)이라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서화를 많이 수집하였으며, 산수화에 뛰어났다. 원사대가(元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이 작품은 홍무(洪武) 임자(壬子)년 (1372) 72세에 창작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인 벽헌(檗軒)에게 증정된 것으로 벽헌은 이 그림을 소장한지 3년 만에 다시 의사였던 중인(仲仁)에게 선물하고는 예찬에게 제시를 써 줄 것을 청하는데 용슬재(容膝齋)는 바로 중인의 처소로 그림이 먼저 완성된 후 제문이 더해진 것이라 하겠다. 필묵은 지극히 담백하고 우아하다. 나무를 그린 먹색의 변화가 비교적 많으며 측필보다는 중봉(中鋒)을 사용하였고 바위 표현에도 선염보다는 준법(皴法)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붓질이 맑고 힘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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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내린 물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들(霜浦歸漁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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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당체(唐棣, 약 1287-1355)
서리 내린 물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들(霜浦歸漁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 담채, 144 x 89.7 cm
 
당체의 자는 자화(子華), 만년에 호를 둔재(遁齋)라고 하였다. 절강성 오흥(吳興)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약관의 나이에 이미 시와 그림으로 그 지역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산수화는 처음에는 조맹부(趙孟頫)를 배워 세련되고 화려한 정취을 얻는다. 훗날 곽희(郭熙)와 위언(韋偃)의 화법을 익히는데 그 중에서도 곽희의 화풍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이 그림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소나무 두 그루와 그 사이의 좌우로 기울어져 있는 고목(枯樹) 세 그루와 가을 나무 네 그루가 그려져 있다. 그물을 등에 지고 고기잡이 도구를 들고 가는 어부 세 사람이 서로 웃으며 이야기하면서 그 옆으로 걸어가고 있다. 중간 부분은 안개가 화면을 가로로 나누고 있다. 바위는 운두준법 (雲頭皴)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탈은 약간의 피마준법(披麻皴)을 쓰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건필을 사용하였다. 운필은 약간 기울어진 붓질을 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중봉을 사용하였고 윤곽선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둥글고 두터운 느낌이 있다. 커다란 바위 아래 물가에는 윤곽선이나 준법을 쓰지 않아 바위 위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안개로 희미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곽희의 ”조춘도(早春圖) ”의 화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배경은 층층이 엷게 먹색을 칠해 주경(主景)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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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조의 사냥그림(元世祖出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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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유관도(劉貫道, 13세기 후반에 활동)
원 세조의 사냥그림(元世祖出獵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82.9 x 104.1 cm
 
유관도의 정확한 생졸연도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연간(至元, 1264-1294)에 살았던 것 같다. 하북(河北) 사람으로 자는 중현(仲賢)으로 그림에 능하였다. 지원(至元) 16년 어명으로 “어의국사 (御衣局使)”로 봉직한다. 그림은 도교와 불교 주제의 그림, 인물화를 주로 그렸는데 진(晉)과 당(唐)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산수화는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의 화풍을 따랐다. 꽃그림과 대나무, 동물 그림 역시 역대 제가들의 장점을 융합하여 당대 화단의 고수가 되었다.

이 그림은 서기 1280년에 그려진 크기가 큰 편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북방 사막지대의 황사과 둔덕은 그 경관은 단조로운데 모래 언덕 위 먼 곳에 낙타 행렬 한줄이 가로로 넘어오고 있다. 근경에는 말에 탄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한 사람은 활을 당겨 기러기를 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손목에는 사냥용 매가 자리 잡고 있으며, 어떤 이는 말에 태운 치타를 맨 줄을 쥐고 있는데, 모두 말을 타고 사냥을 나온 모습이다. 그 중에 검은 말을 타고 흰 색 모피 옷을 입은 사람은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라 생각되며 세조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은 황후로 여겨지며 나머지 여덟 명은 시종으로 그 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흑인도 한 명있다.

그림 중의 인물과 말은 의복이나 장비 모두 매우 정교하고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표정이나 자세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생동감이 있다. 이 그림에 그려진 세조의 얼굴은 본원 소장의 <원역대제후상(元歷代帝后像)> 화첩 중의 원세조 상반신 초상화와 많이 유사하여 두 그림의 사실성을 서로 증명하고 있다. 비록 유관도의 작품은 전해지는 것이 극히 적지만, 인물의 전신(傳神)으로 유명했던 유관도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높은 여산 (廬山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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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심주(沈周, 1427-1509)
높은 여산 (廬山高)
족자(軸), 종이에 수묵담채, 193.8 x 98.1 cm
 
심주의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石田)으로 스스로 석전옹(石田翁)으로 불렀다. 장주(長洲, 오늘날 강소(江蘇)성 소주(蘇州))사람이다. 산수화를 그림에 있어 어린 시절에는 가법(家法)을 따랐다고 하며, 40세 이전에는 왕몽(王蒙)의 화풍을 배웠다. 중년 이후에는 황공망(黃公望)을, 만년에는 오진(吳鎭)에 심취했으며 남송 하규(夏圭)의 필의를 아울러 참고하였지만 화풍에 새로움이 있었다. 용필이 굳세고 빠르며 힘이 있고 먹의 사용이 함축적이고 절제되어 있지만 이들을 잘 융합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림은 수묵산수화를 주로 그렸지만 그 밖에도 사의(寫意)적인 화훼화나 새와 동물 그림 역시 뛰어났다. 후대에 미친 영향이 넓고 깊어 명사대화가(明四大畫家)의 우두머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그림은 명 성화(成化) 정해년((丁亥, 1467), 심주의 나이 41세 때 작품이다. 그의 스승인 진관(陳寬, 호 성암(醒庵))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주의를 많이 기울여 정성스럽게 그렸고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그림에서 산과 바위, 숲과 나무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필법은 모두 왕몽의 화풍을 따르고 있는데 여기에 심주 자신의 개성이 더해져 더욱 담박하면서도 웅건한 느낌을 준다. 화면은 빈 공간이 거의 없도록 꽉 채워져 있으며 산과 바위는 모두 피마준법(披麻皴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먼저 담묵으로 그린 다음 다시 농묵으로 칠하여 바위모습이 더욱 또렷해진다. 필법은 온건하면서 세밀하며 농무과 담묵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여 화면 전체 배치에 산뜻한 탁트인 느낌을 준다. 폭포는 백 길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고 골짜기 물은 가볍고 유연한데, 구름과 산색의 묘사 또한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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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과 차가운 폭포(古木寒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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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문징명(文徵明, 1470-1559)
고목과 차가운 폭포(古木寒泉)
족자(軸), 비단에 수묵 담채, 194.1 x 59.3 cm
 
문징명은 강소성(江蘇) 장주(長洲) 사람으로 초명은 벽(壁) 자는 징명(徵明)이며, 훗날 자를 이름 대신 사용하다가 자를 징중(徵仲)이라고 바꿔 불렀다. 호는 정운생(停雲生), 형산(衡山)이라고 한다. 심주를 그림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림과 서예 모두 능한 명사대가(明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오래 장수를 한데가 회화 예술과 덕행에서 모두 당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매우 많아 그 업적이 지대하다. 아들 문팽(文彭)과 문가(文嘉) 그리고 조카 문백인(文伯仁), 제자 진순(陳淳), 육치(陸治), 전곡(錢穀) 등이 모두 오파(吳派)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소나무 한 그루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서로 나란히 서있다. 측백 나무의 늙은 줄기는 갈라지고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쳐있다. 측백 나무 뒤의 소나무는 두 줄기가 나란히 뻗쳐서 구름을 뚫고 쭉 뻗어있다. 배경의 바위절벽과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바짝 붙어서 땅을 덮고 하늘을 가려 빈 공간이 거의 없으며 무척이나 높은 곳에서 나르는 듯한 폭포 한 자락이 몇 번을 꺾이며 내려와 전체적으로 빽빽하고 복잡하던 화면이 갑자기 탁 트이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참으로 절묘한 솜씨라 하겠다.

이 작품은 명 가정(嘉靖) 기유년(1549년) 겨울에 제작된 것으로 문징명의 나이 80세 고령에 그린 것이지만 여전히 힘과 기운이 넘치고 필묵이 호방하면서 기백이 당당한 것이 문징명의 거친 붓(粗筆)으로 그린 그림 중 빼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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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이 사를 바치다. (陶穀贈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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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당인(唐寅, 1470-1532)
도곡이 사를 바치다. (陶穀贈詞)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68.8 x 102.1 cm
 
당인은 오현(吳縣) 사람이다, 자는 자위(子畏), 백호(伯虎)이다. 호는 육여(六如)라고 하며 스스로 ‘강남에서 가장 풍류가 있는 인재 (江南第一風流才子)’라고 칭했다. 시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그림에 뛰어났다. 초기에는 주신(周臣, 1450-1535)을 스승으로 삼았고 이어서 이당(李唐), 마원(馬遠), 하규(夏圭)를 배웠는데 독자적인 산수화풍을 지녔다.

이 작품은 역사 속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북송 초기 도곡(陶穀, 903-970)이 남당(南唐)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남당은 약소한 나라였기에 도곡은 오만한 태도에 남당의 임금 앞에서도 언행이 겸손하지 않았다. 남당의 신하는 이에 분노하여 꾀를 내어 궁의 기녀 진약란(秦蒻蘭)을 역리의 딸로 꾸며 그를 유혹하였다. 기세 등등하던 도곡은 아름다운 진약란을 보자 마음이 동하여 환심을 사고자 시를 지어 바치며 진약란를 유혹하는데 이로 인해 그 오만하고 도도했던 모습은 무너져 버린다. 며칠 뒤에 남당 임금은 연회를 베풀어 도곡을 초대하고 도곡은 다시 의젓한 군자의 모습을 하고 연회에 참석했다. 임금이 술잔을 들고 약란에게 술을 권하고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는데, 약란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바로 도곡이 그녀에게 선사한 시로 도곡은 얼굴을 붉히고 매우 당황하였다.
그림에 그려진 인물은 매우 세밀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도곡은 평상 위에 앉아있고 옆에는 묵과 종이, 벼루가 놓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빨간 촛불이 켜져있다. 진약란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수가 곱게 놓인 비단 두건을 두루고 앉아서 비파를 타는데 아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데 도곡이 진약란에게 시를 바치던 바로 그 모습이다. 배경에는 나무와 돌, 대나무와 파초, 화분과 평상이 있으며, 뒤에 둘러쳐진 병풍에도 역시 매우 공들여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전체에 경물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채색 역시 곱고 아름다운데 배경과 인물의 묘사가 모두 훌륭하다. 오른쪽 상단에 쓰여진 「一宿姻緣逆旅中,短詞聊以識泥鴻。當時我作陶承旨,何必尊前面發紅。」라는 당인의 제시는 그림이 지닌 우의(寓意)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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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지
글쓴이 : 양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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