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藝畵鑑賞

[스크랩]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 고서화 5

水西散仁 2012. 9. 5. 17:15
복숭아 꽃과 고기잡이 배(桃花漁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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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왕휘(王翬, 1632-1717)
복숭아 꽃과 고기잡이 배(桃花漁艇)
화첩(畵帖), 종이에 수묵담채, 28.5 x 43 cm
 
왕휘는 강소성(江蘇省) 상숙(常熟) 사람이다. 자는 석곡(石谷) 호는 경연산인(耕煙散人), 경연외사(耕煙外史), 오목산중인(烏目山中人), 검문초객(劍門樵客)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능하여 왕감(王鑑, 1598-1677)과 왕시민(王時敏, 1592-1680)의 지도를 받고 이들을 따라 각지의 진귀한 소장품을 열람하였고 이를 기회로 명작들을 임모할 수 있었으며 필법이 옛것과 새로운 것을 모두 참고하고 각종 화파의 장점을 두루 익혔다. 그림의 기교가 정교하고 숙련됨이 청대 제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계곡 기슭의 복숭아꽃이 흩날리고 있는데 고기잡이 배 한척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에, 나무는 마치 비취와 같이 푸르고,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있는데 물길 사이는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작가는 제문에서 원대 조맹부(趙孟頫)의 ”도화어정도(桃花漁艇圖) ”를 그렸노라고 밝히고 있는데, 전체 그림이 청록으로 채색되어 먹과 청록의 채색이 고전적이면서 아름답다. 용필이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며 구도에 있어 채움과 비움,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잘 운용하여 화면이 전체으로 밝고 깨끗하며 우아하다. 이 그림은 도잠(陶潛)의《도화원기(桃花源記)》중에서 “어느 날 시내를 따라 가다가 어디선가 길을 잃고 말았는데 흘러흘러 어느새 복숭아 꽃이 강가에 흐드러게 핀 곳을 지나고 있었다… (緣溪行,忘路之遠近,忽逢桃花林,夾岸數百…)”라고 묘사한 경치를 바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그의 붓 아래서는 자연의 아름다운 색채들이 모두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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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牡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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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운수평(惲壽平, 1633-1690)
모란(牡丹)
화첩(畵帖), 종이에 수묵 담채, 28.5 x 43.0 cm
 
운수평은 강소(江蘇) 무진(武進) 사람이다. 초명은 격(格)으로 자는 수평(壽平) 호는 남전(南田)이라 하며, 나중에 자를 이름 대신 사용했다. 운수평은 어릴적에 큰아버지 운향(惲向, 1586-1656)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운향은 원대 화가 황공망(黃公望)의 화풍을 쫓아 화풍이 깊고 웅장하였다. 왕휘(王翬)의 산수화를 본 후 왕휘에게 “此道讓兄獨步,格恥為天下第二手(형님께서는 이 기법의 일인자이시며, 저는 세상의 둘 째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하고 전심전력으로 화훼화 연구에 매진하여 윤곽선을 그리지 않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린 화훼화로 명성을 얻는데 꽃잎이나 줄기의 윤곽선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먹이나 색채만으로 꽃송이의 형태를 그리는 독특한 양식을 창출해내었다.

이 그림은 자주색과 붉은 색, 흰 색 세 송이의 모란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것은 정면을 또 어떤 것은 측면을 그렸으며 그 자태도 위를 향해 핀 것과 아래를 향한 것 구도의 변화를 주고 있다. 색채의 농담과 명암을 이용하여 꽃잎 겹겹의 풍부한 변화를 표현하고, 꽃받침은 뒤집혀 뒤를 보이고 있으며 줄기와 가지의 세세한 부분 모두 아주 꼼꼼하게 그려져 있어 대충대충 그린 곳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운수평은 우아한 색과 색채 사용의 균형잡힌 조화로움으로 꽃의 화려함을 잘 묘사해내고 있는데 색을 다루는 그의 기교가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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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네 (雲白山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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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오력(吳歷, 1632-1718)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네 (雲白山青)
두루마리(卷), 비단에 수묵담채, 25.9 x 117.2 cm
 
오력은 강소성 상숙(常熟) 사람이다. 자는 어산(漁山), 호는 묵정도인(墨井道人)이라고 하였다. 왕휘(王翬)와 함께 왕감(王鑑)과 왕시민(王時敏)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 화법이 왕감에 가까웠다. 훗날 송대와 원대의 명가들의 화풍을 따르는데 특히, 왕몽(王蒙, 1308-1385)과 오진(吳鎭, 1280-1354)에 심취하여 필법이 섬세하고 부드럽고 아주 진한 먹을 사용하였다. 청초육가(淸初六家)의 한 사람이다. 장년 이후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선교활동에 전력을 하였던 까닭으로 작품 창작을 거의 중단하여 전해지는 작품 수가 아주 적다.
이 산수화는 그의 나이 37세 (1668)때의 작품으로 그림에는 산줄기와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진 산골짜기 사이로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산과 산기슭에는 녹색의 나무들이 무성한데 비취와 같은 초록빛에 금방이라도 푸른물이 배어나올 것 만 같다.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호수는 하늘에 닿을 듯하며 하늘과 산 사이에 집과 사원, 까마귀가 점처럼 작게 그려져 있는 풍경은 자연의 고요함과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화법은 당대와 송대 이래의 청록 산수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데 청록 채색이 특히 뛰어나며 송대와 원대 명가들의 고풍스러운 화풍에 아주 비슷하다. 그림 전체에 청록과 붉은 색, 흰색이 사용되고 있으며 동시에 옅은 붉은 색으로 물과 하늘을 물들였는데 채색이 선명하면서 청아한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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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왕몽 하일산거도(仿王蒙夏日山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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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왕원기, (王原祁, 1642-1715)
방 왕몽 하일산거도(仿王蒙夏日山居圖)
족자(軸), 종이에 수묵담채, 96.5 x 49 cm
 
왕원기의 자는 무경(茂京), 호는 녹대(麓臺)로 강소성 태창(太倉) 사람이며 청대 “사왕(四王)”의 우두머리 왕시민(王時敏, 1592-1680)의 손자이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을 보태어 28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하여 거인(擧人)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강희(康熙) 39년(1700)에 ‘우춘방우중윤(右春坊右中允)’에 임명되어 내부(內府, 청 궁정)에서 서화(書畫)를 감정하는 일을 하고, 훗날 ‘직남서방(直南書房)’에 들어가 ‘어전염한(御前染翰)’이 되어 전문적으로 황제를 위해서 그림을 그렸었으며, ”畫圖留與人看”이란 구절을 하사받고 이를 인장에 새겨 그림에 자주 사용하였다. 강희(康熙)44년(1705)에는 어명을 받들어 《패문제서화보(佩文齋書畫譜)》를 편찬하였다. 왕원기는 화론서인 《녹대제화고(麓臺題畫稿)》와 《우창만필(雨窗漫筆)》을 남겼는데 책 속의 문장을 통해 구도와 필묵, 채색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중요한 청대의 회화 이론들이 여기에 실려있다.

이 그림은 세밀하고 구성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짜임새가 있는데 원대(元代) 왕몽(王蒙, 1308-1385)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바위들이 층층히 쌓여 큰 산을 이루고, 필묵이 반복되고 융합되면서 색이 더욱 진해지고 있다. 먼저 담묵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다시 칠하고 또 건필로 빡빡한 붓질을 한 후, 다시 진한 먹으로 강조 효과를 주고 있다. 그림 상단의 하늘만 여백으로 남겨두고 그 외에는 모두 숲과 산봉우리, 푸르고 무성한 나무들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본원 소장품인 왕몽의 ”단대춘효(丹臺春曉)”는 일찌기 왕시민(王時敏)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단대춘효도의 특징적인 명암과 허실의 강렬한 대비가 이 작품 중에서도 보이는데 이와 관련하여 왕원기의 《녹대제화고(麓臺題畫稿)》에는 “먹은 반드시 담담하게 써야하며 담담함 중의 짙음을 추구해야 한다(墨須用淡, 要求淡裏之濃)”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왕원기의 작품은 항상 퇴적되고 또는 교차하여 쌓이는 평면체들로 가득한데 그 전후 배열 순서는 송대와 원대 그림 중의 수직적인 연장 방식과 다르다. 산석과 경물이 오고 가는 도약으로 연결되고, 화면은 공간의 호응으로 동세가 형성된다. 이 그림은 왕원기의 나이 53세 때 그려진 것으로 왕몽을 방(仿)한 그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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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본(清院本)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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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청원본(清院本)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두루마리(卷), 비단에 수묵담채, 35.6 x 1152.8 cm
 
‘청명상하도’는 북송(北宋, 960-1126)대에 상당히 유행하였던 주제로 그 중에서도 장택단(張擇端, 12세기 초 활동)의 청명상하도가 가장 유명하다. 장택단은 청명절(淸明節)을 소재로 삼아 수도인 변경(汴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풍속화의 걸작으로 역대에 걸쳐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방본(仿本)을 남기고 있다.

청원본(淸院本) 청명상하도는 청 궁정의 다섯명의 화가 진매(陳枚), 손호(孫祜), 김곤(金昆), 대홍(戴洪) 그리고 정지도(程志道)가 건륭 원년(乾隆元年, 1736年)에 함께 제작한 것으로 각 시대별 방본(仿本)의 장점을 한데 집성하고 명대와 청대의 특별한 풍속, 예컨대 나들이를 하거나 공연 등 오락 활동을 더 포함시켜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 그림 중에는 희극 공연, 원숭이 재주부리기, 묘기, 무술을 겨루는 경기장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비록 송대의 옛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명대와 청대 사회 풍속을 연구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화법을 살펴보면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길거리와 건물은 모두 투시도법의 원리를 적용하여 그려졌으며 심지어 서양식 건물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채색이 곱고 산뜻하며 필치가 치밀하며 교량과 건물은 자를 사용한 계화(界畫) 화법으로 그려졌고 인물 역시 하나하나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아주 뛰어난 원체(院體) 회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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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리 말 그림(百駿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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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낭세녕(郎世寧, Giuseppe Castiglione, 1688-1766)
백마리 말 그림(百駿圖)
두루마리(卷), 비단에 수묵담채, 94.5 x 776.2 cm
 
Giuseppe Castiglione의 중국식 이름은 낭세녕(郎世寧)이다. 이태리 밀라노 사람으로 예수회 수도사가 되어 27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훗날 청 조정에 봉직하며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삼대 동안 청 황실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인물과 화훼, 새와 동물 그림에 능하였는데 동물 중에서도 말 그림에 가장 뛰어나 여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에는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100필의 말이 그려져 있는데 초원에 방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낭세녕이 그린 말들은 누워있는 것도 있고 서 있는 것도 있으며 혹은 다른 말과 장난을 치거나 또 무언가를 먹고 있는 등 무리를 지어있던 홀로 그려졌던 모두 자유롭고 편안하게 쉬고 있는 모습이다. 그 구체적인 표현 수법을 살펴보면 낭세녕은 서양화의 화법인 원근법(遠近法)을 사용하여 화면에 넓고 깊은 공간을 만들고 있으며 그 안의 풀이나 나무, 산수, 인물의 표현이 역시 사실적이고 정교하면서 또 치밀하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구도가 복잡하고 짙고 고운 채색에 형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낭세녕은 중국 전통 회화의 기법에 서양의 음영 투시법과 서양화 안료를 더하여 중국과 서양의 취향이 함께 녹아 있는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림 중의 말과 인물, 나무와 흙둔덕은 모두 빛의 명암을 응용하여 대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소나무의 솔잎과 나무껍질, 풀잎 등은 윤곽선을 먹으로 그리고 바위와 흙둔덕 등의 표현에는 준법(皴法)과 같은 중국의 전통적인 수법을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또 말이나 나무의 음영표현도 중국 전통의 선염 방식으로 완성하였다. 이 그림은 옹정(雍正) 6년(1728)에 그려졌는데 전형적인 초기 대표작의 하나이다.

 

출처 : 양지
글쓴이 : 양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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